김소월 (1902-1934)
소월 김정식은 본명보다는 '김소월'이라는 호칭('흰 달'이라는 뜻)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졌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꼽을 때 늘 최상위권에 있다. 그의 시들은 국어 시간에 필수로 배우는 데다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기에 대부분 그의 시 몇 편 이상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가곡 또는 가요로 만들어져서 더 친숙하기도 하다.
학교 교육에서는 김소월에 대해 '민요시인' 혹은 '한국적 정서를 잘 살린 시인'으로 가르친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그렇고, 그렇게 알고 있다. 이렇듯 그의 시가 오랫동안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이유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사용했던 율격이나 주제, 정서가 한국인으로서 보편성을 갖기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김소월은 단지 민요시인일까? 그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나 나의 의견도 '아니다'라는 답을 내리게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말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소월의 삶과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예정이다. 그런데 소월이 그렇게 유명하고 작품이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생년월일이나 사망일조차도 불분명하다. 이점은 의아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객관적인 기록보다는 그의 주변인물들의 증언(기억)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거주한 곳이 북한 지역이라 자료 확인이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삶과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며, 어느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수많은 문헌에서 주장하는 바가 오히려 혼란만 야기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대략적으로 학계의 동의가 이루어진 바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소월은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공주 김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실제 태어난 곳은 외가인 평안북도 구성군이다. 정주군과 구성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지역이며, 소월은 대부분의 삶을 이 두 곳에서 보내게 된다.
그의 집안은 증조모 덕분에 가세가 회복되었고, 조부가 금광업에 투자했다가 기적적으로 금맥을 발견한 덕에 살림도 넉넉했다. 덕분에 소월도 어릴 때부터 비교적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의 조부는 유교 사상에 철저하였으며, 소월이 5세가 될 무렵 서당인 '독서당'을 만들고 훈장을 초빙하여 소월에게 한문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한문교육은 소월의 한문 실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느 정도의 한문 교육을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또한 소월은 어려서부터 숙모인 계희영을 통해 민담, 민요, 고대소설 등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는데, 들은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또한 이때 들은 이야기들이 후에 소월의 작품에 직접 반영되기도 했다.
이후 소월은 1909년에 남산소학교(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5년에 졸업하였다. 소월은 이때부터 이미 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서춘으로부터 문학 지도를 받았다고도 하지만 본격적인 시 창작 교육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16년에는 홍단실('홍실단'이라고는 주장도 있음. 본명은 '홍상일'이었으나 소월이 '단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도록 함)과 결혼하였으나 그의 부인의 이름이나 혼인 시기도 불명확하다. 홍단실과의 사이에서는 총 4남 2녀를 두었다.
소월은 1917년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진학하였다고 알려졌으나 1915년에 입학했다는 주장도 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세운 민족주의 학교로, 당시 교장은 고당 조만식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소질을 눈여겨본 안서 김억(오산학교 영어교사였다)이 본격적으로 소월의 시 창작 교육을 맡게 되었다. 소월은 이 시기 여러 편의 시를 써서 안서를 통해 문예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한 문인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소월은 1920년에 『창조』2호에 「낭인의 봄」등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등단하였다. 이후에도 안서는 소월의 문학적 배후이자 후견인으로서 그를 키워주었지만, 안서와 소월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1919년에 3.1 독립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폐교되어 소월은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수료장(졸업예정증명서)'만 받게 되었다. 혹은 그가 1920년에 오산학교를 졸업했다고도 하나 이는 확인할 수가 없다.
1922년에 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다녔다. 그의 기록 중에서는 배재고보 시절만 정확하게 남아 있다. 소월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며, 이 때도 계속 시를 써서 발표했다.
1923년에는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상대 예과에 진학하고자 유학길에 올랐다. (기록에 따라서는 그가 진학에 실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에 간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자 그의 안위를 걱정한 가족들의 독촉에 못 이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장손이자 외아들이었기에 그에 대한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고향에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결국 일본 유학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조부와 소월을 얽매었던 모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또한 문학부가 아닌 상경대로 진학한 것에 대해서는 가업을 잇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있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것도 일본 유학을 위한 것이었기에 이 시기부터 소월은 계속 조부 및 모친과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그의 삶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일본 유학이 좌절된 소월은 작품 활동 및 몇몇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으며, 경성에 잠시 체류하거나 이북지방을 여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성에서 일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또한 1924년에는 처가 근처인 구성군으로 이사했는데 이 역시 자신을 옭아매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이때 소월은 자기 몫의 재산(상속될 예정인)까지 모두 챙겨서 밑천으로 삼았다.
1925년에는 시집 『진달래꽃』을 발행하였다. 이 시집은 안서가 비용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월이 선별한 시 126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월은 기존에 발표했던 시들도 여러 번 수정하였는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시의 대부분은 이 시집에 수록된 것들이다.
1926년, 소월은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구성지국을 개설하고 운영하였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6개월여 만에 폐업하였다. (3년~10년 정도 운영했다고도 하나 이는 증언에 따른 것이라 근거가 부족하며, 동아일보사의 기록에 따라 대체로 6개월로 본다) 이후 사채업과 농사일도 시도해 보았지만 (그런 일들을 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챙겨간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는 본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본가 역시 소월을 지원할만한 여력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당시 그의 작품에서는 돈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보인다.
게다가 그가 구성군에서 사는 동안 일본 경찰은 그를 지속적으로 감시하였으며, 수시로 그의 집을 수색하여 육필 원고들을 압수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쓰는 시가 민족주의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산학교 시절 친구였단 배찬경에게 망명자금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계속된 사업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 일본 경찰의 감시 등으로 그는 점차 절망감에 빠졌다. 이전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이때는 술에 취해 지내는 일도 많아졌다. 이 시기에도 그는 계속 시를 써서 발표했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집계된 작품 수는 많지 않다. 게다가 시의 형식이나 내용도 그가 이전에 쓰던 것과 많이 달라졌다. 이에 안서도 그에 대해 거의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둘은 각자 갈 길을 갔다고 한다. 그러나 소월은 죽기 전에 안서와는 서로 화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1934년 12월 24일, 취한 상태에서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일도 기록이 불분명하며, 사망의 원인도 몇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는 자살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이외에도 사고설(저다병으로 인한 통증 완화 목적으로 아편을 복용하려다가 과다 복용해서), 질병설(뇌일혈 혹은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 만취와 아편 복용 등의 복합 작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 등이 있으나 그의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안서는 문예지를 통해 소월의 유작 일부를 공개하였으며, 1939년에 소월의 발표작 및 미발표작, 유작 등을 모아『소월시초』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그가 소월의 유작 모두를 챙겼다고 하지만 그중 일부만 공개하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안서가 보관하고 있던 소월의 유작은 이후 1970년대에 대량으로 발굴되었지만 그중에는 소월의 작품 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러므로 1926년 이후 소월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상이 소월의 대략적인 삶이다.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면 역시 안서 김억이다. 안서는 소월과 같은 정주 사람으로서 소월의 사돈뻘 되는 친척이며 (안서의 부인이 소월의 6촌 누이로 알려져 있다), 소월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인물이다. 자비로 소월의 시집을 두 번 간행해 주었으며, 소월의 사후 추모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납북되기 전까지 소월의 작품들을 많이 알리고자 했다.
소월과 안서의 관계는 마치 가수와 연예기획사와 유사한 면도 보인다. 소월을 발굴하고 키워준 것이 안서인 것은 맞지만, 그는 소월에 대해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었다. 심지어 소월의 작품에 대해 임의로 수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안서는 소월에게 민요풍의 시를 쓸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 인해 두 사람 간의 갈등도 커진 것이다.
소월은 대체로 민요풍의 정형시를 주로 쓴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7·5조를 즐겨 사용하며 그 운율에 단어를 맞추거나 혹은 조금씩 바꾸면서 실험적인 창작을 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작품은 「산유화」, 「진달래꽃」, 「초혼」, 「사욕절」, 「왕십리」, 「접동새」 등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글자 수로 리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고려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기존과 정형시와는 다른 형식이면서도 리듬감이 있는 작품들을 쓰게 된 것이다. 하지만 7·5조는 우리나라 전통의 율격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다양한 전통적 율격의 시도도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주제면에서도 그는 우리 민족의 '한(恨)', 특히 이별의 아픔을 주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님'이 누구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김영삼은 『소월정전』에서 그 대상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오순' (계희영은 '오숙'이라고 언급함)이라고 보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학계의 정론은 그것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보편적 속성으로서의 '기다림의 대상' 혹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다. 또는 민족, 국가로 보기도 한다. 그러한 정서가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을 것이고, 이후에도 '국민 시'가 된 이유일 것이다.
소월이 스스로 그러한 시를 쓰기를 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보인다. 소월에게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의식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오산학교 시절부터 남강이나 고당에 의해 그러한 의식을 깨우쳤고, 자신이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방법으로서 전통적인 율격 혹은 민요조를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서는 소월에게서 그러한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보다 발전시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소월은 그러한 것의 한계를 알았고, 그에 얽매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안서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안서 본인은 서구시의 영향을 받아 그러한 시세계를 추구했던 반면 소월에게는 전통적인 시를 쓰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서는 1910년대 후반~1920년대에 시단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서양의 문예 이론으로부터 한국 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한 편 소월을 통해 전통적인 것을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중 전략으로 소월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 것이다.
또한 소월을 '민요시인'이라고 한 것은 그가 작품을 발표했던 문예지들이었으며, 소월은 그러한 호칭을 싫어했다고 한다.
소월이 주로 민족 고유의 정서와 소재를 이용한 작품을 썼지만,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순히 민요의 근대적 해석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시론인「시혼」을 통해 밝힌 바는 다음과 같다. (김윤식 등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정리한 부분 발췌)
1) 인간에게는 각각 영혼이 있다.
2) 그 영혼이 "이론적인 미의 옷을 입고 완전한 운율의 발걸음으로 (중략) 정조의 불붙는 산마루로“ 나아갈 때 시혼이 표현된다.
3) 그 시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그것은 영원의 존재이며 불변의 성형이다.
4) 그 시혼은 "그 시대며 그 사회와 또는 당시 정경의 여하에 의하여 작자의 심령상에 무시로 나타나는 음영"의 현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5) 시작품의 우열은 음영의 변환에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영혼’과 ‘시혼’이다. 또한 ‘시혼’은 ‘음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김윤식은 ‘시혼’과 ‘음영’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플라톤주의’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시혼’은 ‘이데아’, ‘음영’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윤식은 김소월이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하고 정조 속에 알맞게 숨어버렸다."라고 하였다. 김소월은 플라톤의 사상에 대해서 알았을까? 아마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시혼」은 그의 본격적인 시론이 아니라 안서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 불과하다고도 하지만, 시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가 추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소월의 작품은 시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9년에 주요한의 「불놀이」가 『창조』 창간호에 발표되면서 한국 문학에서도 자유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에 소월은 그러한 자유시의 새로운 형태로서 전통적 율격의 정형시를 도전적으로 창작했던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한용운이나 이상화 등의 산문시 시도에 버금갈 정도의 성과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소월의 작품 세계를 보다 확장해서 보려는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소월을 '근대에 맞선 경계인'으로 보거나 (남기혁『김소월-근대에 맞선 경계인』) ‘세계 조선시인’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연구도 있었다. (홍용희 「'근대화된 민요시'와 세계조선시인의 탄생 - 김소월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특히 홍용희는 "김소월은 근대 초기의 격동적인 전환기 속에서 서구의 외래적 요소와 내재적인 전통적 자산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구현하여 근대 자유시를 수립시킨 한 전범"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러한 근거로서 소월이 안서를 통해 프랑스 상징주의 및 서구 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았으며, 소월 스스로도 외래 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수용했다고 하였다.
소월의 시론인 「시혼」에서도 아서 시몬즈의 시를 인용하 바 있으며, 그러한 영향을 받아 시 창작에도 반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한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며, 실제로 소월의 작품들을 외래 시와 비교한 연구들도 있었다. 참고로 안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를 출간하였으며 이어 1924년에는 아서 시몬즈의 『잃어진 진주』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이때 소월은 안서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아서 시몬즈의 시집을 준 것으로 알려졌으며, 안서의 번역 작업에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또한 박일환은 저서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에서 소월의 시 세계의 넓은 스펙트럼을 소개하고자 한 바 있다. 소월의 전집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추천하다. 소월의 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월에게서 ‘근대화된 민요시’를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진달래꽃』에 수록된 126편 중에 93편(74%)이 민요적 율격으로 써졌으며, 이 중에서 3마디 시행이 80편으로 64%였다. 그만큼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시집에 수록된 시 중에서 1/4 가량은 좀 더 자유시에 가깝거나 산문시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록작 중 아래「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과 같은 시가 그러하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 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는.
그러한 시도는 1926년 이후의 작품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1925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 보는 견해가 많다. 또한 1920년대 후반 이후 소월은 시를 쓰는데 전념하기보다는 취미 생활 정도로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후기에는 주제 또한 좀 더 서민적이고 민중의 삶을 다룬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한 기반에는 늘 '자유에 대한 추구'가 있었다. 이는 그가 평생 동안 벗어나고자 했던 가족, 공동체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랑만 알 것 같은 사람이 알고 보니 현실주의자였던 것.
하지만 그러한 자유시는 1920년대 초반에 소월이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때도 이미 나타났었다. 이에 안서는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민요시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인다. 안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명확했던『진달래꽃』이후의 작품 활동에 대한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발표된 작품이 많지 않고,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은 창작 시기가 불분명하다. 안서를 통해 선별적으로 일부만 공개되었던 터라 그가 갖고 있던 소월의 유작 중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후기 작품들에 대한 연구에서는 그러한 시들은 배제되어 있다. 안서가 왜 소월의 시들을 바로 모두 공개하지 않고 비공개로 두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기존의 소월에 대한 이미지와 너무 달라져서 부담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소월이 계속 살아서 창작 활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안서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월 스스로 두 번째 시집을 낼 수 있었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가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소월의 많은 작품들이 유실되고,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그의 작품들이 이렇듯 반쪽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트롯 가수로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힙합을 하겠다고 하는 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아마 대다수는 '이게 김소월의 작품이라고?'라며 반색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꾸준하게 연구되는 것은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위상 때문이다. 학문적인 영역을 떠나서라도, 그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에게 계속 애송됨으로써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가 되었고 향후에도 끊임없이 연구될 시인이기에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 많은 내용을 다룰 수 없기에 나머지는 참고문헌으로 남겨둔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계희영, 『약산 진달래는 우련 붉어라』, 문학세계사, 1982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소월, 『진달래꽃』, 매문사, 1925
김소월, 「시혼」, 『개벽』, 1925
김억, 「김소월의 추억」, 『안서 김억 전집 』,한국문화사, 1987
김영삼, 『소월정전』, 성문각, 1965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김학동, 『김소월 평전』, 새문사, 2013
남기혁,『김소월-근대에 맞선 경계인』, 북페리타, 2014
박일환,『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한티재, 2018
홍용희. (2019). ‘근대화된 민요시’와 세계조선시인의 탄생 - 김소월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60), 343-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