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1902-1950)
'시인들의 시인'이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많은 시인들은 정지용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1930년대부터 그 이후까지, 많은 시인들은 정지용의 시들을 좋아했고, 그를 자신들의 문학적 롤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는 당대의 인기스타였다.
하지만 그는 비운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자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서 그의 작품들은 1950년 이후부터 월북 작가들에 대한 금기가 해제된 1988년에 이르기까지 거진 40년 가까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중학생 때까지는 정지용이라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잘 몰랐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작품인「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졌기에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는 그의 작품 중 「향수」나 「유리창 1」등을 많이 배우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이 시험에도 많이 출제된다. 이 시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정지용의 작품 세계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는 생전에 『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지용시선(1946)』등 총 세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하지만 마지막의 『지용시선』은 이전에 발간된 두 권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 25편을 발췌하여 수록한 것이라 엄밀하게는 그의 공식적인 시집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게다가 사실상 그는 1941년 이후에는 시 쓰기를 그만두고 주로 산문에 주력했다. 왜 그랬을까? 이 글에서는 그 이유를 찾아가 본다.
지용은 1902년 6월 20일에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지용(池龍)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부담스러웠던지 나중에 한글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지용(芝溶)으로 바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름은 그의 필명인 셈이다.
당시에는 여전히 조혼 풍습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1913년에 송재숙과 결혼한다. 당시 그의 나이 12세였는데,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송재숙과 결혼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결정이었는데, 처가를 통해 지용이 공부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그 역시 공부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부친은 그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애썼다. 지용은 1914년에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 처가 친척뻘 되는 집에 기거하며 4년간 한문을 배우다가 1918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이하 휘문고)에 입학하였다. 그가 왜 4년씩이나 한문 공부를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한학이 그의 진로라고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한학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공교육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휘문고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을 보였기에 교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휘문고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유학도 갈 수 있었다.
또한 휘문고 시절에 그는 교내 문학 동아리인 '요람'에서 시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서 김억이 먼저 『기탄잘리』번역본을 내자 지용은 그 번역 작업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용도 참여하였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다행히 교우들과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사태가 수습되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구제된다.
1923년에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일본에서도 동인지 활동 및 시 창작을 하면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조가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용은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등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학조』는 교토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만든 문예지였다.
도시샤 대학 시절에 그는 주로 일본어로 된 시를 써서 발표했지만, 조선어로 된 시도 발표하였다. 특히 1927년에는 총 50여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향수」등 그의 대표작 중 다수도 이 시기에 창작된 것이다.
1929년 3월에 도시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휘문고 장학금 조건에 따라 9월에 휘문고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서야 그의 부인과 가족이 경성으로 이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영어 교사였지만 영어 수업보다는 시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 외에 학생들의 시 창작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특히 1930년에 창간된 『시문학』의 동인 활동을 하면서 『시문학』,『조선지광』,『대조』등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가톨릭청년』의 편집 고문을 맡았으며, '구인회'의 창립회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청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이상 등의 작가를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이후 1935년에는 그동안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정지용시집』을 간행하였고,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백록담』을 간행하였다.
1939년에는 『문장』의 고선위원(또는 '선고위원'이라고도 함)을 담당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등단이라는 개념보다는 고선위원이 잡지에 게재될 작품을 추천함으로써 등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그는 청록파 시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신인들을 추천하여 등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는 휘문고를 그만두고, 신생 이화여전의 교수로 가게 되었다. 이화여전에서 그는 한국어, 영어, 라틴어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화여전은 이듬해에 이화여대로 바뀌었는데, 그는 1948년 2월까지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부임했다.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이 해에 『지용 시선』을 간행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전 두 권의 시집에서 뽑은 시들을 수록한 시집이었다. 또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겸했다.
1946년 이후에 지용의 행보는 불안정했는데 이는 그가 작가로서 활동하는 발판이 불안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화여대에서도 안정적이지 못했고, 경향신문사 주간도 몇 달 못 했으며,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강사로 출강하여 『시경』등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오래 하지는 못했다.
해방 이후부터 납북되기 전까지 그는 주로 산문을 많이 썼고, 1949년에는 산문집 『산문』을 간행했다. 여기에는 시문, 수필과 휘트먼 시를 번역한 시 등이 수록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좌익계 인사들에 의해 연행되었고, 서울 수복 직전에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다가 경기도 포천 근처에서 포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용의 사망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 확인이 어려우나 남한 측과 북한 측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 사실 확인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동안 자진해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강제적으로 끌려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용은 해방 이후 좌익 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 활동을 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문인들은 문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문학가동맹과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상적 확신보다는 문학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그는 좀 더 안정적으로 문예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으로 전향한다. 이것이 좌익에게는 배반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며, 한국전쟁 발발 후 그를 끌고 간 이유가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도 배신자의 오명을 썼다. 반면 남한에서는 그가 조선문학가동맹 활동을 했던 경력과 북한으로 갔다는 정확으로 그가 자진해서 월북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남북 각각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는 199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가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데 손색이 없는 것은 한국시의 정립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한국시의 발전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며,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김기림 등의 활동 못지않게 정지용의 활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는 한학과 영문과를 전공한 덕에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언어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렇기에 그의 시들이 같은 시기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보다 문학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가령, 소월의 시는 민요조 운율과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아 사랑을 받았다면, 지용의 시는 그를 넘어서 '언어의 고도의 정제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1939년에『문장』지에 발표했던「시와 언어」라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언어를 떠나서 시는 제작되지 않는다. 무기를 쓸 줄 모르는 병학자는 얼마든지 고명할 수 있었고 언어를 구성치 못하는 광의적인 심리적인 시인이 얼마나 다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총검술은 참모본부에 직속되지 않아도 부대戰에 지장이 없겠으나 언어구성에 百練하지 못하고서 '시인'을 허여하기에는 곤란한 문제다. (...)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다. 시는 언어와 Incarnation적 일치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으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 제작에 오를 수 없다. 다만 시의 심도가 자연 인간생활 사상에 뿌리를 깊이서림을 따라서 다시 시에 긴밀히 혈육화되지 않은 언어는 결국 시를 사산시킨다. 시신이 거하는 궁전이 언어요, 이를 다시 방축하는 것도 언어다.
이 외에도 그는 자신의 시론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이렇듯 그는 시를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데서 성립하는 예술'이라고 보았으며, 이미지는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언어적 내용을 뚜렷하게 시각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가 단순히 노래라거나 혹은 감정의 표출이나 이념의 전달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같은 시를 여러 번 발표하거나 혹은 시집으로 낸 것은 그의 시를 더 다듬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1940년대 이후에는 한국어의 표준어 및 맞춤법도 정립되어 가는 시기라 그에 맞추어 수정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가 작품을 발표한 순서에 따라 각 작품이 변해 가는 양상을 보면 완성도 및 맞춤법이 점점 더 완전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지용은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용의 공식적인 시 작품 수는 총 122편인데, 이중 89편은 『정지용 시집』에, 33편은 『백록담』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의 초기 시들은 ‘감각적 사물시’로 평가받으며 이미지를 통해 언어적 내용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가 중기 이후에는 가톨릭 사상에 심취하여 기존의 사물시를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따라 사물 묘사 위주보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 시들을 주로 썼다. 1935년에 출간된 『정지용시집』에는 그의 그러한 초(2,3부)·중기(1,4부)의 시 세계가 함께 담겨 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며, 이 시들이『백록담』에 수록되었다. 이 시들은 '전통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한학을 배웠고, 한학이 그의 학문적 기반이 되었으므로 전통과 고전에 대한 이해와 추구가 자연스러웠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원해서라기보다는 현실 도피적인 측면도 보인다. 그는 문학을 통해, 종교를 통해, 그리고 자연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지용의 시 세계 연구에서는 시기에 따라 전, 중, 후기 등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아는 그의 시들은 대체로 초기의 시들이며, 1920년대 중후반에 쓴 것들이 많다. 아무래도 일본 유학 시절에 느꼈던 외로움과 슬픔이 그의 시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어로 쓴 시는 대부분 자신이 한국어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집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그의 시 전집에만 수록되어 있다.
또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용은 꽤 많은 동시를 썼다. 그는 1926년에 『학조』에 작품들을 발표할 때도 동요(동시)를 발표한 바 있는데 당시 그는 「카페-프란스」를 비롯해 시 3편, 시조 9편, 동요 5편을 발표했었다. 그러므로 이들 각각이 그의 시 세계의 독립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요와 동시는 다르지만 1920년대~1930년대는 그러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동요나 동시를 유사한 것들로 볼 수 있고, 실제로 동시를 그대로 동요로 바꿀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동요시의 개념에서 그냥 동시라고 하겠다.
당시에는 그러한 동시를 구전동요와 구분해서 '신동요'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신동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동요의 대표주자는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이다. 이후에 많은 아동문학가들이 나왔는데, 정지용은 그러한 아동문학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지용의 동시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시문학적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율격 등 형식적인 측면과 소재 측면에서 그랬는데, 특히 그가 자신의 시에서 언어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을 그대로 동시에도 적용했다. 지용의 동시 및 아동문학에 대한 애정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조선문학가동맹에서도 아동문학위원을 맡았으며, 후에 보도연맹으로 전향한 뒤에도 어린이잡지에서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을 맡았던 것이다.
이렇듯 지용은 동시 등 아동문학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며, 동요와 동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기준을 세웠다. 그 자신도 많은 동시를 발표하면서 더 많은, 수준 높은 동시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지용은 왜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었을까? 그의 종교적인 시는 주로 1933년부터 1935년까지 『가톨릭청년』에 발표한 것들인데, 이 시기 그는 이 잡지의 문예란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그가 잡지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겠지만, 신앙심의 발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다. 하지만 1928년 7월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프란시스코('방지거'라고도 함)였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은 했지만 두 종교는 모두 기독교였기에 그러한 개종 과정에서 별다른 고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의아한 점은 그가 갑자기 그러한 종교적인 색채를 걷어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193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종교적인 시 대신 전통과 자연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중기의 시들은 그의 일시적인 퇴행이거나 혹은 이탈일까?
하지만 지용과 그의 가족은 평생 가톨릭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종교 자체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스스로 내세웠던 시의 원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시에서 벗어난 이유가 그의 심경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인 문제, 시대상과도 연관이 있겠다. 당시 종교계는 일제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지용은 이에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심경이 드러난 작품이 『백록담』에 수록된 「슬픈 우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이 시집에 수록된 유일한 종교시지만,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절망감으로 가득하다. 여기에서 그의 시작(詩作)은 자연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그나마 순수히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제의 검열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이라고 해서 그가 안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였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전의 시에서 자연은 그저 대상이거나 배경, 혹은 종교적 찬미의 은유적 대상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순수히 자연 그 자체에 다가가기에는 그의 현실이 너무나 가혹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강압은 극에 달했고, 모든 것이 통제당했다. 말과 문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그는 더 깊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즉,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서 현실이 발목을 잡아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1942년에 「이토(異土)」라는 시를 발표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낳아 자란 곳 어디거니
묻힐 데를 밀어 나가쟈
꿈에서 처럼 그립다 하랴
따로 진힌 고향이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 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제
피였다 꽃처럼 지고 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실리고 화약 싸아 한
충성과 피로 곻아진 흙에
싸흡은 이겨야만 법이요
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기러기 한 형제 높이 줄을 마추고
햇살에 일곱식구 호미날을 세우쟈
시에서 느껴지다시피, 이 시는 일본제국을 위해 쓴 것이며, 젊은이들에게 참전하도록 독려했다. 그는 일제의 압력에 의해 친일시를 썼지만 그 치욕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아예 시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시를 두고 학계에서는 그가 친일을 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최재서 등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후에 더 이상 시를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친일 시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해방 후에 「그대 돌아오시니」와 「애국의 노래」 등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들을 발표하지만 이 시들도 그의 시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는 어렵다.
이후 1950년 초까지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지만 이 시들은 전통적인 율격을 사용하거나 정형률을 사용하는 등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서 더욱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이전에 그가 시조를 발표했던 적도 있고, 한학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기에 그러한 시도가 전혀 뜻밖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는 『백록담』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만약 그가 한국 전쟁 이후까지 계속 남한에 생존하여 시를 썼다면 아마도 전통적인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시기의 시들은 현실로 돌아와 있다. 그가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엔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은 것일까.
이렇듯 정지용의 시는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들에서 그가 슬픔, 특히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주목했다. 그러한 것은 많이 알려진 「유리창 1」에서도 드러나지만, 나는 그 외에 『정지용 시집』에서 몇 작품을 선정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아래 인용된 시들은 『정지용 시집』초판본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나 한자로 된 부분만 음을 달아보았다.
「悲劇(비극)」의 힌얼골을 뵈인적이 있느냐?
그손님의 얼골은 실로 美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高貴(고귀)한 尋訪(심방)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唐慌(당황)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최가 얼마나 香(향)그럽기에
오랜 後日(후일)에야 平和(평화)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두고 간줄을 알었다.
그의 발음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스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墨(묵)이 말러 詩(시)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있다.
일즉이 나의 딸하나와 아들하나를 드린일이 있기에
혹은 이밤에 그가 禮儀(예의)를 가추지 않고 오량이면
문밖에서 가벼히 사양하겠다!
위는 정지용의 「悲劇」 전문이다.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작중에 ‘일즉이 나의 딸하나와 아들하나를 드린일이 있기에’라는 표현으로 보아 최소한 1930년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지용은 1927년에 첫 딸을 잃었고, 1929년에 둘째 아들도 잃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자녀를 잃은 슬픔을 「발열」, 「유리창 1」 등에서도 잘 드러낸 바 있는데, 이 시에서는 그러한 슬픔, 즉 비극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비극이 ‘흰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얼굴은 아름답지만, 검은 옷을 입고 찾아온다. 검은 옷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극은 이러한 형태로 사람들을 갑자기 방문하고, 사람들은 당황해한다. 그런데 비극이 찾아온 그 순간은 너무나 슬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슬픔도 가라앉고 평화의 때가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그가 남기고 간 자취가 얼마나 향기로운가를 느낀다.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통해 개인의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며,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는데 지용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카타르시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타인의 비극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정화이지 본인의 비극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본인의 비극을 마치 타인의 것처럼 간주하여 카타르시스를 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두 아이를 잃었지만 다시 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갖고 있다. 그러한 불안감과 초연함이 대비를 이룬다. 황망하게 아이들을 잃은 것은 슬프지만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에 ‘이밤에 그가 禮儀를 가추지 않고 오량이면’이라는 말의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갑자기 찾아오지는 말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할 기회를 달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가 자녀 둘을 연달아 잃은 상실감과 슬픔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를 담담하고 초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후주근한 물결소리 등에 지고 홀로 돌아가노니
어데선지 그누구 씨러서 울음 우는듯한 기척,
돌아 서서 보니 먼 燈臺(등대)가 반짝 반짝 깜박이고
갈메기떼 끼루룩 끼루룩 비를 부르며 날어간다.
울음 우는 이는 燈濠(등호)도 아니고 갈메기도 아니고
어덴지 홀로 떠러진 이름 모를 스러움이 하나.
위는 「바다 4」 전문으로 짧은 시다. 바다는 지용의 시의 주된 소재 중 하나다. 그는 총 9 편의 바다 연작을 발표했으나 제목에 붙어있는 순서가 발표 순서는 아니다. 그중에 「바다 4」는 1927년에 발표된 것으로 그가 일본에 유학 중일 때였다.
이 시에서 화자는 혼자 해변을 거닐다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울음을 우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등대 불빛만 반짝이며 갈매기 떼만 보일 뿐이다. 누구 운 것일까. 화자는 그에 대한 의문을 남기지만 답은 그 자신도 알고 있다. 바로 자신이 운 것이다. 홀로 떨어진 서러움, 즉 외로움 때문에 그는 슬픔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정지용은 그 서러움이 마치 해변에 주인 없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그 서러움을 ‘사물화’시켜 화자로부터 분리한 것이다.
또한 등대와 갈매기 떼의 무심한 듯 보이는 풍경은 그러한 화자의 심경을 더 대비하여 드러나게 한다. 지용의 초기 시는 대체로 감정을 절제하고 사물화, 이미지화를 통해 시상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절제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슬픔을 참아내기 위한 것이다.
悲哀(비애)! 너는 모양할수도 없도다.
너는 나의 가장 안에서 살었도다.
너는 박힌 화살, 날지안는 새,
나는 너의 슬픈 울음과 아픈 몸짓을 진히노라.
너를 돌려보낼 아모 이웃도 찾지 못하였노라.
은밀히 이르노니! 「幸福(행복)」이 너를 아조 싫여하더라.
너는 짐짓 나의 心腸(심장)을 차지 하였더뇨?
悲哀(비애)! 오오 나의 新婦(신부)! 너를 위하야 나의 窓(창)과 우슴을 닫었노라.
이제 나의 靑春(청춘)이 다한 어느날 너는 죽었도다.
그러나 너를 묻은 아모 石門(석문)도 보지 못하였노라.
스사로 불탄 자리 에서 나래를 펴는
오오 悲哀(비애)! 너의 不死鳥(불사조) 나의 눈물이여!
이 시는 정지용의 중기 시로 볼 수 있는 「不死烏」 전문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지용은 193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가톨릭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에서는 그러한 종교적인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불사조’가 내포한 의미, 즉 ‘부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과 상통한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비애’를 세 번이나 부른다. 그의 초기 시들이 감정을 절제하고 사물화와 이미지화를 통해 표현한 것과는 비교된다. 그래서 이전의 시들보다는 감정이 더 격앙되어 보이며, 그가 추구하던 모더니즘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그는 그 비애가 자신의 깊숙한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고통과 슬픔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비애를 버릴 수 없었다. 비애는 자신의 배우자(신부) 또는 동반자이며 비애와 함께하므로 마음을 열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비애도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것은 다른 감정으로 승화될 것이다. 그것이 비애의 부활이다. 그는 ‘나의 청춘이 다한 어느날’ 비애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왜 청춘이 다 한 어느 날일까. 사실 어떤 사실(상실)로 인한 비애는 평생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인생에 대해 알게 될 때쯤에 비애의 의미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비애의 시간이 단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는 앞서 보았던 「悲劇」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며, 이 시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이 보인다.
보통 부활의 속성은 그것의 소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기에 비애가 사라진다고 해도 다른 감정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감정으로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정지용의 시에서는 시기에 따라 상실감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초기의 이미지화, 사물화에 기반한 모더니즘에서 가톨릭 사상에 기반한 시풍으로 가면서 감정의 표현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정지용시집』에는 슬픔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지만, 자녀를 잃은 슬픔처럼 구체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저 막연한 슬픔인 것들도 있다. 또는 대상은 알 수 없지만 실연의 아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용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슬픔의 근원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두 자녀를 잃은 슬픔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그에게는 근본적인 슬픔의 원인이 있다.
여진숙은 “정지용에게서 그리움과 애도로 나타나는 미학의 거리가 있다”라고 보았다. 그는 “몸서리가 떨리도록 고독하고 슬프고 가난하던 환경은 그(정지용)의 사고를 내면화시키면서 그가 자란 산천과 전설의 바다 속에서 그를 시적 상상의 세계로 연결시킨 것이다. 4대 독자로서의 체험과 가난한 환경 엄격한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유년의 자연환경 등이 지용의 문학을 형성하는 복합적 근원으로 이해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인채는 “정지용이 식민지 현실 생활의 체험으로 상실 의식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언급한 정지용의 상실 의식은 '어머니 부재 의식', '주체성 위기의식', '고향 상실 의식' 등이다. 그러면서 “정지용이 모더니스트로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반박하며 “상실 의식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지용의 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가 한국 시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그가 한국어를 조탁하여 시를 완성하는 방식과 고유어의 감각을 살려 시를 쓰는 표현 기법은 이후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용을 단순하게 서정 시인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야박하지만, 그가 서정시에 미친 영향은 크다. 어쩌면 한국적 서정시는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 한국의 시는 비로소 낡은 것들과 일본식의 것들, 그리고 서양식의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뒤에 윤동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윤동주는 지용을 흠모하여 그의 시집을 늘 가지고 다녔고,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으로 학적을 옮기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도시샤 대학에는 두 사람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또한 그가 발굴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시인은 훗날 '청록파'라 불리며 독자적인 시풍을 형성하였고, 한국 시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의 시인도 지용의 선고 덕분에 등단하여 활동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가 시를 선고하면서 함께 쓴 추천사는 시인을 지망하는 이들에게도 가이드라인이 되었으며, 지용이 쓴 시론들은 시 창작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1940년대 들어서 시 쓰기를 멈추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후대 시인들 덕에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가 1950년에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그의 시들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계속 시를 썼더라면 이후에는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궁금해진다. 또한 정지용에 대한 연구는 40년 가까이 금기시된 바람에 많이 늦어졌는데, 1988년에라도 해금되어 다행이지만 그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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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권영민(편집). 『정지용 전집 1 - 시』. 민음사. 2016
정지용, 권영민(편집). 『정지용 전집 2 - 산문』. 민음사. 2016
정지용, 권영민(편집). 『정지용 전집 3 - 미수록 작품』. 민음사. 2016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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