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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8. 2024

김기림, 태양과 바다의 모더니스트

김기림 (1908-?)

김기림 (1908-?)


편석촌 김기림은 당시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서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 듯하다. 그 역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가 되었지만 (그래서 사망 연도는 공식적으로 모른다), 다른 월북/납북 시인들처럼 그 역시 1988년에 해금 조치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의 작품 중에서는 「바다와 나비」 정도만 배우거나 혹은 수능 대비로 일부 시를 배우는 정도였다. 아직 그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출제된 적은 없다고 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하지만 이 시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이 시에서 그는 기존에 보였던 주지주의에서 탈피한 것으로 보이며, 서정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는 그가 기존에 비판하였던 감상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림을 단지 이 시 하나로만 평가할 수 없다. 


더군다나 1930년대~1940년대의 그의 업적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시인이자 비평가, 수필가로서 활동했는데 시와 비평에서 모두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의 호가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관계로 여기에서는 본명으로 지칭하겠다. 

 



김기림은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명은 인손, 호는 편석촌(片石村)인데 한학자인 그의 백부가 중국 고전에서 따와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그는 1914년에 임명보통학교에 입학하나 그해 가을에 병으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의 셋째 누이도 사망했다. 이로 인해 그는 계모 밑에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1918년에 보통학교를 마친 후 백부의 권유에 따라 한학을 배웠다. 1921년에는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김환태, 이상, 이헌구, 윤기정, 임화 등이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그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대신 일본으로 가 릿쿄오중학교에 4학년에 편입하였다. 


현재 보성고에는 김기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1990년에 동료 시인이었던 김광균, 구상 등이 주도하여 학교 측과 함께 세운 것이다. 


보성고에 세워진 김기림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21simon/222449230287


1926년에 릿쿄오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에 입학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게 되었다. 1930년에 니혼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조선일보 사회부에 채용되어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후 학예부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시「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당시 그의 필명은  'G.W.'였다고 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바빌론으로
바빌론으로
작은 여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개나리의 얼굴이
여린 볕을 향할 때…….
바빌론으로 간 `미미'에게서
복숭아꽃 봉투가 날아왔다.
그날부터 아내의 마음은 시들어져
썼다가 찢어버린 편지만 쌓여 간다.
아내여, 작은 마음이여
 


너의 날아가는 자유(自由)의 날개를 나는 막지 않는다.
호을로 쌓아 놓은 좁은 성벽(城壁)의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의 외로움은 돌아봄 없이 너는 가거라.
 


아내여 나는 안다.
너의 작은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동트지도 않은 내일의 창머리에 매달리는 너의 얼굴 위에
새벽을 기다리는 작은 불안을 나는 본다.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가거라.
너는 내일(來日)을 가져라.
밝아 가는 새벽을 가져라



1932년에는 신보금과 결혼하였고, 장남 세환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그는 시, 평론, 소설, 수필, 희곡 등 전 영역에 걸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933년 8월 30일에는 이종명, 김유영,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이효석, 조용만, 유치진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였다. 구인회 활동은 당시 문단의 주요 흐름이었던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반발하여 순수문학을 지향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김유영, 이종명, 이효석 등이 탈퇴하고 이상, 박태원, 박팔양 등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상, 박태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편석촌과 이상의 관계는 서로의 작품 활동 및 집필, 출판에 도움을 주며 꾸준히 유지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에 소속되어 있던 문인들과도 친분을 나누었는데, 당시에는 신문사에 소속되어 있으면 작품 발표가 좀 더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1936년에 그는 조선일보사를 휴직하고 일본 토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이는 조선일보사에서 후원하는 정상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9년 토호쿠제대를 졸업하였는데 영국 주지주의 비평가인 I.A. 리차즈 연구로 졸업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부터 주지주의에 대한 그의 갈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호쿠대학에는 현재 아래 사진과 같이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그의 작품들을 사랑했던 일본인들이 '김기림기념회'를 조직하고 2018년에 세운 것이다. 


일본 토호쿠대학에 세워진 김기림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22570


1935년에는  『중앙』과 『삼천리』에 장시 「기상도」를 연재하였고, 이는 1936년에 첫 시집 『기상도』로 창문사에서 발간되었다.  이 시집의 표지는 이상이 맡았으며, 이때 김기림은 일본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편집과 출간도 이상이 대행해 주었다. 


또한 1939년에는 이전에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두 번째 시집인 『태양의 풍속』을 학예사에서 발간하였다. 하지만 1940년에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그는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942년에는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였지만,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이후에는 수학교사를 맡기도 했었다. 그는 1945년에 해방이 될 때까지는 더 이상의 집필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는 서울 소재 여러 대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하는 한편, 좌우합작 문인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가담하였다. 이후 1946년에는 월남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시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그는 기존의 모더니즘을 탈피하여 새로운 민죽문화와 세계문화 건설에 몰두하게 되었다. 또한, 세 번째 시집인 『바다와 나비』가 신문화연구소에서 출간되었고, 평론집인 『문학개론』도 같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신문화연구소는 그가 설립한 곳이었다.


하지만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탈퇴하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다. 이는 당시 국내 문단계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이 해에는 시론집 『시론』을 백양당에서 간행하였고, 1948년에는 네 번째 시집인 『새 노래』를 아문각에서 발행하였다. 또한 수필집 『바다와 육체』를 평범사에서 간행하였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gounikorea/221214963551


1950년에는 평론집인 『시의 이해』를 을유문화사에서, 『문장론 신강』을 민중서관에서 간행하였다. 그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북송되었다. 이후 그의 생사는 불명이며, 알려진 바가 없다. 




김기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모더니즘이다. 1920년대~1930년대 당시에는 국내에서도 모더니즘 문학 작품들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문학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결과였다. 당시 상당수의 문인들이 일본 유학 경험이 있었으며, 그 역시 일본 유학 시절에 당시 일본 문학의 경향을 흡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니혼대학교 문학예술과에서 정통으로 문학 이론들을 공부하면서 다른 시인들에 비해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가 비평가로서 활동할 때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모더니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모더니즘'은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을 위해서도, 다른 하나는 당시의 偏(편) 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였다. '모더니즘'은 시가 우선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과 시는 문명에 대한 일정한 감수를 기초로 한 다음 일정한 가치를 의식하고 쓰여야 된다는 주장 위에 섰다.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인문평론』, 1939



이렇듯 그는 한국 현대시문학사에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 시풍을 도입하였고, 그에 입각하여 창작 활동을 펼쳐나갔다. 한편으로는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여 '시학(詩學)'을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의식적인 방법에 기초하여 시를 써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감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비판하였다. 더불어 기존 시들의 감상주의와 허무주의를 비판하였고, 밝고 건강한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시를 쓰고자 했다. 


그가 『시론』에서 「시의 방법」에 대해 언급한 바는 다음과 같다.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한 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써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전연 별개의 제작상 방법이다. 흔히 그것을 주지적 태도라고 불러왔다.



특히 '모든 시는 가시적으로, 심상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언어적으로 조형함으로써 움직임과 형상을 가시화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시인으로 정지용과 신석정을 들었다. 앞서 정지용의 작품 세계에서 보았듯, 김기림은 정지용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그는 많은 신인들을 발굴하여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들은 아직 그의 시론이 성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1933년에 구인회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시적으로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시 창작을 하는 동시에 비평도 겸했기 때문에 상호 보완적인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태양'과 '바다'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태양의 풍속』에 담긴 시들은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기에 수록된 시 중 표제시인 「태양의 풍속」을 옮겨 본다.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야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비러오마. 나의 마음이 문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우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어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쫓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힌 방천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 버려라. 나의 시내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魚族)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詩). 태양일 수 없는 설어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밤을 새여가며 기다린다.



그가 지칭하는 '태양'은 근대 문명과 진보, 발전 등인 것이다. 그는 그러한 역동적 이미지를 통해 기존의 시문학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함께 담겨 있다.


'바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바다는 '세계화'였으며, 그는 그러한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세계정세와 현실에 계속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동경과 열망이 표현된 것이 그의 초기와 중기 시집들이다. 


『기상도』는 모더니즘 계열 최초의 장시라고 할 수 있으며, 단행본 발간 시에는 연재되었던 것을 재편집하여 7부 424 행의 장시로 만들었다. 이는  '(1) 세계의 아침, (2) 시민 행렬, (3) 태풍의 기침(起寢) 시간, (4)자최, (5) 병든 풍경, (6) 올빼미의 주문(呪文), (7) 쇠바퀴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 시들은 그가 주장했던 '전체시' -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 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 수록된 시들은 짧은 외신의 나열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마치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듯한 느낌도 주며, 세계정세와 자본주의, 그리고 문명의 현 상태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이는 그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암울했던 삶에서 벗어나 관심을 세계로 돌리는 한편,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중간중간에 태풍이 오고 있는 기상 예보를 넣어서 그러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불안정한 날씨가 세계정세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시집들인 『기상도』나 『태양의 풍속』을 읽어보면 외래어의 과다한 남발과 이미지즘이 지나쳐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산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서구중심주의에 편향되어 있었고, 동양적인 것이나 전통적인 것에 대하여 거리를 두었다. 그가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좀 의외이지만, 그가 일본 유학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 문학사조들이 그러한 것들을 압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모더니즘의 한계를 보였고, 그러한 것을 인정했다. 결국 그는 바다의 넓이도, 깊이도 알 수 없었던 '나비'였던 것이다. 


더구나 모더니즘은 당시에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으며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김소월이나 한용운, 이상화 등 당시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해방 후 그의 행보는 좌편향적이었으며, 민족 및 사회 현실을 수용하는 한편, 모더니즘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시 창작에서 이론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기에 실제 시학과는 괴리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시집인 『새 노래』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그의 의지와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집의 앞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나는 새 도시와 새 백성들을 노래한 걸세

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참말이지 어저께는 지나간 바람결

서천(西天)에 진 낙일(落日)이네

참말이지 세상엔 아모것도 없느니

오직 수없는 내일의 바다뿐

수없는 내일의 창공일뿐



이것이 그가 이 시집을 내게 된 이유이며,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바일 것이다. 발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전문 인용)



세계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나로 조직하고 바로잡으며, 또 거기 옳고 굵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태세를 갖추고 가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한 무겁고 번거로운 부담일세 옳다. 짐이 너무 무겁고 앞뒤가 하도 막막할 적에 우리는 때로는 차라리 저 들즘생의 무심(無心)하고 순수함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시(詩)는 내게 있어서는 이러한 스스로의 살아가는 문제의 조정(調整)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이란 사람의 사람으로서의 짐을 남달리 깊이 의식하고 자진하야 그것을 걸머지고 가는 무릇 못나고 줄난 종족인 것 같다. 벗어버리려면 못 버릴 것도 없다. 편한 길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즘생의 생활에 한 걸음씩 더 가까이만 가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모두가 짐을 잊어버리고 또는 일부러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아서 세속의 행렬에서는 가장 뒤떨어진 곳에 정신의 무거운 부담을 끓은 채 시대의 거센 물굽이를 간신히 헤치고 나갈밖에 없다. 사납고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그는 더 필요하고 슬프고 노엽고 초라하고 상기(上氣)해야 하나보다. 그러므로 그는 항용 창황히 짐을 꾸리는 버릇이 있다. 까닭 모를 출발이 그를 몰아세는 때문이다.욕(辱)스런 현재에 대한 끊임없는 결별(訣別)──그것은 예술의 성장을 위한 윤리인 듯도 하다. 도약,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정신의 체조(體操)일지도 모른다. 모다 떳떳하고 훌륭하게 살아가려는 몸짓이다.


우리는 일찍이 센티멘털, 로맨티시즘 홍수 속에서 시(詩)를 건져냈다. 저 야수적인 시대에 감상에 살기가 싫었고 좀 더 투명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속담대로 죽어가면서도 제정신만은 잃지 말고저 한 것이다. 그러나 건져내놓고 보니 그것은 청결하기는 하나 피가 흐르지 않는 한낱 ‘미라’였다. 시(詩)의 소생(蘇生)을 위하여는 역시 사람이 흘린 피와 더운 입김이 적당히 다시 섞여야 했다. 하지만 벌써 한낱 정신이 형이상학은 아니라 할지라도, 또 단순한 육체의 동계(動悸)(심장의 울렁거림)일 수도 없었다. 그러한 것을 실천의 지혜와 정열 속에서 통일하는 한 전(全) 인간의 소리라야 했다. 생활의 현실 속에서 우러나와야 했다. 떨어져 나간 한 고독한 영혼의 고백이 아니라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민족의 베일래 베일 수 없는 한 토막으로서의 한 사람의 무엇보다도 노래라야 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다.무척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던지기란 그리 쉬운 노래 노릇이 아니다. 비록 낡은 때요 찌라 할지라도 제게 묻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 그저 망설이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연약한 버릇인 것 같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피자에 위로나 격려의 말로 항용 쓰기는 하나 하는 편에서도 그리 효과에 기대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긴장한 대화의 장을 배우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다. 사실 이별을 간단히 해치우기 위하여는 ‘괴테’처럼 약간의 숙련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사는 데 있어서도 예술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단호하게 해야 할 일이면서도 그저 주저주저하는 동안에 사람들의 반신(半身)은 언제까지고 적당히 과거라는 진흙탕 속에 잠긴 채 좀체로 솟아나지 못하고 마나보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가 막 다닥친 것은 전에 없던 풍랑이 아니냐? 아모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라면 어서어서 배짱밖에 팽개치자. 약간의 생리와 습성의 미련이라면 우리들이 경쾌한 항해를 위하여 그만 단념하면 어떨까?도처에 이별이 있어야 하겠다. 예술에 있어서도 인생에 있어서도──이윽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기 위하야──.





또한 그가 단순히 이미지즘이나 서정주의만 강조하지는 않았다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시가 갖는 운율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확실히 김소월 등의 민요적 운율에 대해서는 배격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율격을 찾고자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김기림의 작품 세계 및 시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아 보인다. 이는 그가 추구했던 시 세계가 여러 번 변화의 과정을 거쳤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납북 후 그의 생사와 활동이 알려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가 북한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북한 쪽의 연구나 보고가 있다면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시 창작과 평론은 1950년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렸다.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지 못한 채로.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기림, 『기상도』, 창문사, 1935

김기림,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새노래』, 아문각, 1947

김기림, 『시론』, 백양당, 1947

김윤정, 『김기림과 그의 세계』, 푸른사상, 2005

이미순, 『김기림의 시론과 수사학』, 푸른사상, 2007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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