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1894-1938)
포석 조명희. 이번 연재를 하면서 그를 포함시킨 것에 대해 낯설거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이며,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사실 지금까지 소개한 시인들은 그래도 국내에서 많이 알려졌거나 사랑받는 시인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연재를 통해 소개하는 시인들에는 단순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뿐만 아니라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시인들, 그리고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시인들도 포함시켰다.
그러면서도 포석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나도 <현대시인론> 수업을 듣기 전에는 그에 대해서 잘 몰랐다. 게다가 그를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애매하기도 했다. 그는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 작품들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그를 꼭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1920년대와 1930년대 한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포석 조명희의 삶과 그의 문학 작품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포석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네 살 때 돌아가셨고, 둘째 형인 조경희의 집에 머물며 한글과 한자를 배웠다. 1906년에는 진천소학교에 들어갔으며, 열네 살이던 1907년에는 민식과 혼인을 하였다.
1911년에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졸업반이면 1914년에 베이징 무관학교에 가기 위해 가출했다가 평양에서 둘째 형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고향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신소설 및 중국소설, 근대 소설, 잡지 등을 접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또한 타고르 등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해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도쿄의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언어,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20년에는 김우진 등과 극예술협회를 창립하였고, 1921년에는 순회공연 목적으로 희곡「김영일의 사」를 썼다. 이는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평가받는다.
1924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된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시대일보(혹은 조선일보라고도 함) 기자로 일하게 되었으며, 시집 『봄 잔듸밧 위에』를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일본 유학 전에 썼던 시들과 일본 유학 시절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사실상 최초의 근대 창작 시집으로 평가받는다. 순서 상으로는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와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이지만, 『해파리의 노래』는 번역시집이었으며, 『무궁화』는 출간 금지 조치로 출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5년에는 『개벽』지에 단편 「땅속으로」를 발표한다. 이때부터 필명으로 '포석(抱石)'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27년에는 극단 '불개미'를 조직하였고, 『조선지광』지에 단편 「낙동강」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데, 1928년에 동명의 창작집 『낙동강』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1928년, 그는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소련으로 망명한 이유는 일본 경찰에 의한 신변의 위협과 압박감 때문이었다. 소련 망명 이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주하며 '조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였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 및 민족 해방, 계급투쟁 등 그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
1929년에는 연해주 고려인 마을에 거주하며 『선봉』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선봉』은 연해주 고려인들의 신문이며 한글로 간행되었다.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는데, 1931년에는 동료교사였던 황명희와 재혼하게 된다. 포석은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문예도 지도하였으며, 본인도 꾸준히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작품들은 '소비에트 조선 문학' 혹은 '고려인 문학'의 기틀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1934년에는 파제예프의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선봉』문예면 편집 자문도 맡게 되었다. 이어 1935년에는 조선사범대학 교수, 1936년에는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도 맡는 등 소련 내 고려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집필 도중 소련내무인민위원회에 연행되었고, 1938년에 일본이 첩자 혐의로 처형된다. 그의 가족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하지만 1956년에 그는 무혐의 처분으로 다시 복권된다.
소련에서는 1959년에 『조명희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간행된 바 있는데, 국내에서는 아직 그의 전집이나 작품집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1988년에 풀빛출판사에서 『조명희선집』이 나온 바 있고, 1994년에 『포석 조명희 전집』이 간행된 바 있지만 현재는 구하기 어렵다.
국내에서는 그의 시선으로는 아래의 『조명희 시선』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그의 첫 시집인『봄 잔듸밧 위에』를 비롯하여 창작집 『낙동강』,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이 외에 종합출판범우에서 나온 『낙동강(외)』에서는 그의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작품들을 읽어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시 67편 (일반시 54편, 산문시 5편, 동시 8편), 소설 12편, 희곡 2편, 평론 10편, 수필 17편 등으로 다양하다. 여기에서는 시에 한정해서 보기로 한다.
포석의 작품세계는 여러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는 일본유학 전~일본유학 시기라고 볼 수 있으며, 중기는 일본 유학 후 조선에서 활동하던 시기, 그리고 후기는 소련 망명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국내에서도 이른 시기에 시집을 간행하였으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또한 KAPF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1928년에 소련으로 망명함에 따라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냉전과 정치적인 여건으로 인해 국내에는 알려지지 못했다. 그 역시 1988년에 월북문인 해금조치와 더불어 재조명된 것이었다.
『봄 잔듸밧 위에』에 수록된 시들은 의외로 서정적인 면이 강하며, 관념론적으로도 보인다. 이는 그 역시 1920년대 초반의 국내 시문학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상징주의로 대표되는 외래시의 유입이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 창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는 민족 고유의 것에 더 가치를 두었으며, 민족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생각이 이 시집에 담긴 것이다.
포석은 이 시집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말의 예술이다. 그 말은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말 가운데에는 회회의 요소인 빗이 잇고 음악의 요소인 리듬이 잇슴이라. 엇던 사람의 시는 빗이 전연 읍슴은 아니나 음악에 갓가운 것이 잇스며, 엇던 사람의 시는 리듬이 전연 읍슴은 아니나 회화에 갓가운 것이 잇나니. 그러나 그 말의 빗좃차 음악적 배열로 되여야만 함을 보던 시가는 회화보다도 음악에 갓가운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여기에서 그는 시를 언어 예술로 보았으며, 특히 문학적 언어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또한 시의 표현을 회화와 리듬으로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리듬을 더 강조하였다. 이는 1920년대 한국 현대시가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표제시인 「봄 잔듸밧 위에」의 전문이다. (『조명희 시선』발췌)
내가 이 잔듸밧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 주실 수 읍슬가
어린 아기가 어머니 젓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갓치
내가 이 잔듸밧 위에 징둥그를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 주실 수 읍슬가
밋칠 듯한 마음을 견데지 못하여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엿더니
땅이 '우애!'하고 한울이 '우애!' 하옴애
어나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읍서라.
이 시집에서는 그의 고민과 갈등도 함께 보인다. 그는 서정시를 쓰면서도 현실 참여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며, 이는 일본 유학에까지 이어졌다.
그러한 고민은 그가 쓴 「생활 기록의 단편-문예에 뜻을 두던 때부터」(『조선지광』65호, 1927)에서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서 그는 "노동일까? 문학일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타골'류의 신낭만주의냐, 그렇지 않으면 '고리끼'류의 신사실주의냐?'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다 결국 "현실주의다. 현실에 부딪치자, 뚫고 나가자"라고 결심하였다.
그의 결심은 그가 조선으로 돌아온 후 KAPF 활동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그는 시와 소설을 계속 발표하였지만 이 작품들을 작품성만으로 논하기에는 어렵다. 당시 KAPF 문학(프로 문학)의 대다수가 그러했듯, 그의 작품 역시 목적성과 '수단으로써의 문학'이라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항일 저항의 요소가 담겨 있다. 당시 식민치하의 작가들은 현실 속 서민들, 빈민들의 삶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더 나아가 사회주의 사상 및 민족주의를 내포하는, 직접적인 항일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의 그러한 시도는 점점 강도를 더해가다가 소련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산문시「짓밟힌 고려」를 통해 그러한 의지의 표현을 극대화하였다. 아래는 이 시의 전문이다. (『조명희 시선』발췌)
일본 제국주의 무지한 발이
고려의 땅을 짓밟은 지도 벌써 오래이다.
그놈들은 군대와 경찰과 법률과 감옥으로
온 고려의 땅을 얽어 놓앗다.
칭칭 얽어 놓앗다 ─ 온 고려 대중의 입을 눈을 귀를 손과 발을.
그리고 그놈들은 공장과 상점과 광산과 토디를 모조리 삼키며
노예와 노예의 떼를 몰아 채즉질 아래에 피와 살을 사정없이 글어 먹는다.
보라! 농촌에는 땅을 잃고 밥을 잃은 무리가
북으로 북으로, 남으로 남으로, 나날이 쫓기어가지 안는가
뼈품을 팔아도 먹지 못하는 그 사회다. 도외에는 집도 밥도 없는 무리가 죽으러 가는 양의 떼같이 이리저리 몰니지 안는가?
그러나, 채즉은 오히려 더 그네의 머리 우에 떨어진다 ─
순사에게 눈 흘긴 죄로, 디주에게 소작료 감해달라는 죄로, 자본주에게 품값 올려 달라는 죄로.
그리고 또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한 죄로, 쁘로레따리아트를 위하야 나워 가며 일하는 죄로.
주림과 학대에 시달려 빼, 말은 그네의 몸둥이 위에는 모진 채죽이 던져진다.
어린 ‘복남’이는 저의 홀어머니가 진고개 왜놈에게 종노릇하느라고 만나지 못하야 보고 싶다고 운다
젊은 ‘순이’는 산같이 믿던 저의 남편이 품파리하러 일본간 뒤에 몇 년이나 소식이 없다고, '강곡구베야'에서 죽엇는가 보다고, 감독하는 왜놈에게 총살당하엿나 보다고. 왜놈의 밥솟에 불을 집혀 주며 한숨 끝에는 눈물짓는다.
아니다. 이것은 아직도 둘째다
기운 씩씩하고 말 잘하던 인쇄 직공 공산당원 ‘성룡’의 늙은 어머니는 어느 날 아츰결에 경찰서 문턱에서 매맞아 죽어 나오는 아들의 시테를 부등켜 안고 쓰러졋다 ─ 그는 지금 꿈에도 자긔 아들의 일흠을 부르며 운다
아니다, 또 있다
십 년이나 두고 보지 못하던 자긔 아들이 정치범 미결감 삼년 동안에 옷 한 벌, 밥 한 그릇 들이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겟다고 천리 밖에서 달려와 공판정으로 기여들다가 무지한 간수 놈의 발길에 채여 땅에 잡버저 구르며 한울을 치어다보아 탄식하는 쉰 머리의 로인도 잇었다
이것뿐이냐? 아니다
온 고려 쁠로레타리아의 동무 ─ 몇 천의 동무는 왜놈들의 악독한 주먹에 맞아 죽고 병들고 쇠사슬에 매어 감옥으로 갓다.
그놈들은 이와 같이 우리의 형과 아오를, 아니 온 고려 뿌로레타리아트를 박해하랴 든다
고려의 쁘로레타리아 그들에게는 오직 죽임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임과 죽음!
그러나 우리는 락심치 안는다. 우리의 힘을 믿기 때문에 ─
우리의 뼈만 남은 주먹에는 원수를 꺽구려트리랴는 거룩한 마음의 싸움의 힘이 숨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옳도다, 다만 이 싸흠이 있을 뿐이다.
칼을 칼로 갚고 피를 피로 씻으랴는 싸흠이. 힘쎄인 뿌로레타리아트의 새 긔ㅅ대를 높이 세우랴는 거룩한 싸흠이!
그리고 우리는 또 믿는다
죽음의 골작이 죽음의 산을 넘어
그러나 굳건한 거름으로 거러 나가는 온 세계 뿌로레타리아들의 상하괴 싶슴인 몇 억만의 손과 손들이
저 동쪽 하늘에서 붉은 피로 물들인 태양을 떠밀어 올린 것을
거룩한 뿌로레따리아트의 세상이 올 것을 굳게 믿고 나간다!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는 마음껏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쏟아내듯 이 시에 담았다. 이 시에는 항일정신과 독립의 염원, 그리고 계급 혁명까지 모두 들어 있다.
하지만 자유를 위해 소련으로 망명했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자유롭지 못했다. 공산주의 하에서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작품들을 계속 써야 했는데, 후기의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공산주의의 선전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또 어느 정도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꿈꾸던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처형당하기까지 했으니 죽기 직전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에게는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종종 따라붙는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길게 이어지는데, 그처럼 소련으로 망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 모두가 사회주의자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는 사회주의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는 저항의 한 축이자 독립 후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이상을 짓밟았고, 더군다나 소련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버렸다. 물론 이러한 강제 이주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럼에도 포석은 민족과 이념 둘 모두를 안고 가려했다. 소련 내 조선인, 즉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고, 그의 활동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어졌다. 이는 그가 가진 민족의식 때문이었으며, 디아스포라의 비극 속에서도 결속을 다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지금도 타슈켄트에는 포석을 기념하는 '조명희 거리'가 있다.
또한 포석의 민족의식을 기리고자 충북 진천군에서는 그의 문학관과 공원을 조성하였고, 1994년부터 포석 조명희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아울러 연변에서도 포석 조명희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나 그를 기리는 것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에 맞춰져 있는데, 민족과 이념 둘 모두를 지향했던 그의 신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다면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강의
조명희, 우윤호 엮음. 『조명희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조명희, 이명재 책임편집. 『낙동강(외)』, 종합출판 범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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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배. (2011). 디아스포라와 망각을 넘어 기억의 복원으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한인 망명문학 연구(1) - ‘포석 조명희’를 중심으로-. 외국학연구, 16, 171-190.
김성수. (2022). 분단과 이산의 코리아문학 ― 포석 조명희와 벽암 조중흡 . 국제한인문학연구, 3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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