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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4

임화, 한 시대 아이콘의 몰락

임화 (1908-1953)


임화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시대를 잘 만난 것일까, 아니면 잘못 만난 것일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여러 면에서 그 당시의 아이콘이라고 불릴 만했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비평가, 그리고 영화배우로까지 활약했던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에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에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따라가 보며, 그가 추구했던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임화의 본명은 임임식이다. 그런데 그의 가족 관계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1908년에 서울 낙산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밝힌 것 정도가 전부다. 그는 1921년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지만 1925년에 중퇴하고 가출했다. 그가 가출한 이유는 가정이 파산하고 가족에게도 안 좋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문화계(문학계와 연극계, 영화계)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개인적인 불행에 대해 문학을 돌파구로 삼은 것이다.


1926년에는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에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당시 그의 필명은 성아(星兒)였지만, 청로, 김철우, 쌍수대인, 임다다, 다임다 등 여러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상징주의적 모습을 보이다가, 필명에서도 보이듯이, '다다이즘'이나 '미래주의' 등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27년에는 필명을 임화(林和)로 바꾸었고, 이후로는 이 필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의 작품 중에 최초로 1926년 4월 16일에 <매일신보>에 발표했던 「무엇 찾니」라는 시를 보면 그의 초기 시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사춘기 소년의 정서로 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에는 상징주의의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러한 시작(詩作)은 오래가지는 못하고, 금세 다다이즘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죽은듯한 밤은 땅과 하늘에 가만히 멈췄고

음울한 대기는 갈사락 컴컴한

저문 날 끝에서 땅 우를 헤매는데

소리없이 자최를 감추고 나리는 가는 비는

고요히 졸고 있는 나뭇잎에

구슬같은 눈물을 지워

어둔 밤에 헤매면서 우는

두견의 슬픈 눈물같이 울며 내려진다

남모르게 홀로 뛰는 영혼아

이 어둔 비오는 밤에도 쉬지 않고 날뛰며

무엇을 너는 찾느냐?



그는 1927년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KAPF)에 가입한다. 이후 1928년에는 KAPF의 중앙위원이 되며, 1932년에는 KAPF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KAPF 내에서 핵심 인물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KAPF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시들은 '현실참여'를 지향하는 모습과, 서민, 노동 계층의 삶을 대변하는 양상을 보인다.


1928년, 그는 영화 <유랑>과 <혼가> 등의 주연을 맡았다. 그가 그 영화의 주연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화들이 KAPF 연극부에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발렌티노'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그의 외모가 이국적으로 보여서 그가 외국인과의 혼혈이 아니냐는 오해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그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며, 그가 출연한 영화들도 그다지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활동한 기간은 길지는 않았지만, 그는 배우로 활동하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연극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김기진은 그의 시 작품들을 가리켜 '단편서사시(혹은 프로 서사시)'라고 하였다.


이 시기, 그는 박영희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간다. 그가 일본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김윤식 등에 의하면 이는 '아버지 찾기'였다고 한다. 그가 찾던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사상적, 문학적 아버지를 의미한다. 


처음에 그는 KAPF의 박영희를 따랐고, 그의 영향력 하에서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 하지만 박영희에 대해 실망을 느낀 그는 일본에 있던 이북만을 따르게 되었고, 1931년에 그의 누이동생인 이귀례(또는 이귀혜라고도 함)와 결혼하여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는 KAPF  내에서도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북만, 이귀례, 그리고 임화의 관계는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서 '누이 콤플렉스'로 나타난다고 김윤식은 지적하였다.


임화와 이귀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artichoke_kr/222568957614


하지만 그는 KAPF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는데, 얼마의 감옥살이 후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이후 KAPF 서기장으로 선출된 한편, 기관지인 『집단』의 책임편집도 맡았다. 하지만 이 기관지는 발행되지는 못했다.


1934년에는 다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될 뻔했지만 폐결핵으로 검거를 모면한다. 그리고 이귀례와는 이혼한다. 그는 이후에도 결핵으로 인해 계속 병원 치료를 받게 된다.


1935년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혹은 자진해서라고도 한다) 경기도 경찰부에 KAPF 해산계를 제출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KAPF는 해산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이현욱 (필명 지하련으로도 알려져 있음)과 재혼한다. 그리고 그의 평론 중 하나인 「조선문학사론 서설」을 발표한다.


임화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지하련의 전집.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이후 그는 비평가로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는 다른 비평가들과 여러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전인 1933년에 김남천과 '물' 논쟁을 벌인 것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가 비평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벌인 논쟁은 김기림에 대한 기교주의 비판이라든가, 혹은 이식문화론 등 당시 한국 문학계 전반을 뒤흔들만한 것들이었다. 


특히, 그가 주장한 이식문화론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더 논란이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1940년에 발표한 「조선문학 연구의 과제」나 평론집 『문학의 논리』등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그의 이식문화론은 국문학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개별 시인들의 작품론과 비평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소설 분야까지 확장되었다. 그가 시인보다는 비평가로 더 인정받았던 만큼, 그가 남긴 비평의 편 수 역시 매우 많다.


1938년에 그는 첫 시집인 『현해탄』을 발간한다. 그는 이 시집의 발간을 위해 '바다'를 주제로 한 시들을 집필하고자 했지만, 그가 새로 쓴 시들을 비롯해서 이전에 발표했던 시들도 함께 수록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현해탄』초판본. 이미지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0058900


이후 그는'조선영화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영화론」을 발표하는 등 다시 영화계로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문학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 서기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로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한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민족문학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 보고」를 발표한다. 이후 그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 부위원장으로 선출된다.


1947년, 그는 두 번째 시집인 『찬가』와 『회상시집』을 발행한다. 그해 11월, 그는 박헌영을 따라 지하련과 함께 월북하여 해주 제1인쇄소에서 활동하며,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그의 삶은 참담하였고,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찬가』초판본.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kd2865553/222125328480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한군을 따라 서울 및 낙동강 전선까지 갔다. 서울에서 그는 조선문화총동맹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한다. 1951년에는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발간한다. 이 시집에서 그는 그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비관적 심경을 작품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러한 것이 북한에서는 사상적으로 문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8월, 그는 남로당 중심인물들과 함께 숙청당한다.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 간첩 테러 및 선전선동 혐의"였는데, 한마디로 '미제 간첩'이라는 의미였다. 사실 이는 한국전쟁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두고 김일성이 박헌영 등 남로당파를 숙청한 것이었다. 전쟁 후 그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대해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의 경력 때문이긴 하지만, 그 역시 1988년의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연구와 그의 작품들, 특히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갔는지를 고찰한 연구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20년대 후반~1930년대는 한국문학, 특히 시문학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많은 시인들이 있었다. 이 연재에서 지금까지 소개했던 시인들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임화 역시 한국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그는 시 창작과 더불어 비평까지 함께 함으로써 이론적인 뒷받침을 더했다. 이는 앞서 소개했던 김기림에 버금가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KAPF 활동을 통해 프로문학의 정교화와 창작방법론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문학은 현실 참여의 강조와 사상적 기반 등으로 인해 작품성보다는 그 주제와 구호성이 더 강조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대중과는 멀어져 있었다. 그는 '단편서사시'라는 장르의 개척을 통해 그 작품성 또한 끌어올린 것이다. 이로 인해 프로문학도 내용과 형식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단편서사시에 주력한 이유는 "시가 문학과 사회 혁명을 견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식적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사시의 형식을 차용하되, 분량이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우리 오빠와 화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永男[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火[화]젓가락만이 불쌍한 永男[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卷煙[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永男[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중략)


화로는 깨어져도 火[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永男[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永男[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永男[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이 시는 누이동생이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였다. 이 시에는 삼남매의 가혹한 현실과 노동운동에 뛰어든 오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은 직접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깨진 화로와 화젓갈, 그리고 궐련 등 사물이 가진 상징성을 통해 보인다. 특히 화자를 누이동생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좀 더 대중적이고 정서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오빠가 연행되어 부재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고, 노동 운동과 사회 변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네거리의 순이」또한 이와 비슷한 구조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중략)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이 작품은 「우리 오빠와 화로」와는 반대로 오빠가 누이동생인 순이에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위로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다독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와 순이, 그리고 순이의 연인인 청년은 함께 노동운동을 하였지만, 그 청년은 현재 투옥된 상태다. 이 시에서 그는 누이동생인 순이를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이라고 일컫는다. 이 시에서도 그는 노동 운동이나 계급투쟁, 사회 변혁 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정서적 공감을 야기하는 쪽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의 완성도도 높였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의 「다시 네거리에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반복적인 소모로 인해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고, 특히 감정과 감상주의를 과하게 보임으로써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임화가 실제로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나 혹은 의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그러한 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민족적인 정서, 그리고 그러한 사회운동의 현실의 비참함을 부각하는데 더 주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볼셰비키화를 주장하였고, 그의 작품에서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의지가 드러나 보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그의 신념을 올곧이 느끼기는 어렵다.


게다가 KAPF 내에서의 그의 활동을 보면 그는 조직 내에서 주도권을 쥐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당시 KAPF가 국내 문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가 그 가운데서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 것이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시 KAPF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내외부적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결국 그는 KAPF를 해산시킨 인물이 되고 말았다.


KAPF 해산 이후에는 그의 작품 세계도 바뀌게 되는데, 그의 후기 작품들은 낭만주의적인 면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근대화와 신문명에 대한 동경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시집 『현해탄』에서도 나타나 있다. 『현해탄』은 제목 그대로 조선과 일본 간 놓인 바다이며, 그 바다를 건너감으로써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이식문화론으로 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윤식은 이를 '현해탄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그는 임화에 대해서 '지성이 마비된' 인물이며 모순된 인물로 보았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1930년~1931년 정도로 1년 남짓이다. 이 시기 그는 '무산자'라는 단체 등에서 활동을 하거나 주로 프로문학과 연계된 활동을 하였다. 그런 그가 왜 1930년대 후반에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


이는 그 역시 일제의 검열과 감시에 굴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는 친일어용단체인 '황군작가단'이나 '조선문인협회'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사적인 형식을 포기하고 낭만주의와 서정성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40년 이후 그는 시 창작을 중단하고 대외적인 활동도 중단한다. 그래서 1940년대 초반에는 그의 이력이 비게 되었다.


『현해탄』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 「바다의 찬가」은 그가 새로운 형식을 작품을 쓰고자 했던 출발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을랑,

무덤 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빠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개 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너의

가슴에는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그는 문학과 관련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고, KAPF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이들을 통해 그러한 이론을 습득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본적으로 글 쓰는데 소질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의 창작뿐만 아니라 비평에 있어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던 점은 놀랍다. 그가 그렇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시대를 잘 만났기 때문일까? 


그는 KAPF의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그의 삶 역시 그러한 방향을 지향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그는 그 시기, 개인적으로나 조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작품 자체보다는 그의 삶이 더 부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가 시인, 비평가, 영화배우로서 보여준 이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보와 말로 또한 극적인 측면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활동들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도 변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문학적 의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확립한 단편서사시라는 장르와 그의 비평들이 구축한 이론적 시론은 이후의 한국 시문학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발한 활동이 보여주듯 그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그도 일제강점기라는 현실과 남북의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비극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서 그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감내했던 것이다. 이는 한 시대의 아이콘의 몰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는 여전히 1930년대를 대표하는 문인임은 부정할 수 없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김윤식, 『임화 연구』, 문학사상사, 1989

김윤식, 『임화』, 한길사, 2008

임화, 『현해탄』, 열린책들, 2023

임화, 『개설 신문학사』, 온이퍼브, 2021

임화, 『조선신문학사론서설』, 토지, 2019

임화, 이형권 편집, 『임화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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