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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9. 2024

이상한 시인, 이상

이상 (1910-1937)

이상 (1910-1937)


'이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이상한 시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상'해서 이름도 '이상'이라고 지은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두 단어의 한자는 다르다. 그의 필명인 이상(李箱)은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한자뜻 그대로라면 '오얏나무'와 '상자'이니 '오얏나무로 만든 상자'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의미는 없다. 혹자는 그의 필명을 본명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본명이 이 씨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지만 아니다. (일본인 중에는 그가 '이 씨'라고 생각해서 '이 상(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그는 1910년 경성의 김연창과 박세창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세 살이 되던 때에 백부인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백부에게 입양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데, 김연필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하급직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백부 밑에서 유교적인 교육과 한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즉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평생 그에게 콤플렉스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1918년에는 신명학교에 입학하였고, 1921년에는 신명학교 졸업 후 동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다 1922년에 동광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되자 그는 보성고보 4학년에 편입한다. 보성고보 시절에 그는 미술에 관심을 갖고 화가를 꿈꾸기도 했는데, 1925년에는 교내 전시회에 풍경화가 당선되기도 했다. 학창 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보성고등학교 이상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kwank99/30021724612


1926년에는 보성고보 졸업 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여기에서도 그는 우수한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1927년에 학생 회람지인 『난파선』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고, 여기에 시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필명으로 이상(李箱)을 쓴 것 같지만, 그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1929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바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 발령을 받는다. 이때 일본인 건축기술자들이 '조선건축회'를 만들고 『조선과건축』이라는 일본어로 된 학회지를 만들었는데 이상은 이 학회지의 표지 도안의 현상 모집에서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특히 19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 「자상」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상은 그림 및 디자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미술부에서의 이상. 이미지 출처: 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3922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홍보잡지인 『조선』에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발표는 소설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에게는 폐결핵 증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결핵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931년에는 『조선과건축』에 일본어로 된 시 「이상한가역반응」등 20여 편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이상은 시인으로서도 알려지게 되었지만, 주로 일본어로 된 시를 썼기 때문에 아직 국내 문단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어로 썼던 시들 중에 여러 편은 이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거나 개작되어 발표되기도 했다.


1932년에는 백부가 사망한다. 실질적으로 그를 키워주었던 백부의 사망은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가족사와 관련하여 연작시「위독」에서 「분총의 백골」이라는 작품에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하여 압박감과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조선과건축』에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시를 일본어로 발표하였는데, 이 시 역시 나중에 한국어로 다시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몇 편의 단편소설을 비구나 보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1933년, 그는 폐결핵이 악화되어 조선총독부를 사직하고 황해도 배천에서 요양을 한다. 여기에서 금홍을 만나게 되어 금홍과 함께 서울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한다. 제비는 그가 문인들과 교류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구인회'의 핵임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류하였으며, 정지용의 주선으로 『가톨릭청년』에 「꽃나무」,「이런시」등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는 국내 문단에서도 정식으로 시인으로서 인정받게 된 셈이었다. 이후 이상이 활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구인회 회원들의 도움이 많았는데 특히 정지용, 김기림 등이 많이 도와주었고, 김기림과는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이상과 금홍. 이미지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1134093


1934년에는 이태준의 도움으로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하였으나 독자들의 항의로 인해 애초 목표했던 30여 편을 다 채우지 못하고 15편이 발표된 후에 중단되었다. 이상의 시는 지금도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으니, 당시로서는 더 파격적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특히 「오감도」연작은 뒤로 갈수록 더 난해해져 시제4호와 시제5호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과연 시인가?'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작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 연재된 오감도 시


한편으로는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하는 동안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박태원, 박팔양 등과 함께 구인회에 새로 가입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 '제비'가 경영난으로 폐업하였으며 금홍과 결별하게 된다. 그는 애초에 다방의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돈을 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영난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도 카페 '쓰루나 다방 '69', '무기'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 계속 경제난에 시달리던 그는 절친인 구본웅이 소개해 준 인쇄소 (구본웅의 부친이 운영하고 있었음) '창문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mika3000/222837367371


1936년에 구인회가 동인지 『시와소설』을 발간하자 그는 창간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단편소설 「지주회시」,「날개」 등을 발표하였다. 이 해 6월에는 변동림과 결혼하였고, 10월에는 홀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변동림은 구본웅의 계모의 이복동생이라는 복잡한 관계였는데, 변동림은 병상의 이상을 잘 돌봐주었다. 그러다가 이상이 죽은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고 김환기와 재혼한다. 


하지만 1937년 2월에 사상혐의로 동경 니시간다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던 도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4월 17일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의 28세였다. 그의 부친이었던 김연창은 그보다 하루 앞서 4월 16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화장된 그의 유골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시집이나 작품집을 발간한 적이 없다. 그러한 준비를 하기에는 그가 너무 일찍 요절하였던 탓이다. 하지만 1949년에 김기림이 이상의 국문시와 단편소설들을 모아 『이상선집』을 발간하였고, 1956년에는 임종국이 『이상전집』을 전 3권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이상의 일본어 시와 유고시,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77년에는 이어령이 『이상소설전작집』이 전 2권으로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이상수필전작집』,『이상시전작집』이 갑인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1993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이상이 원본을 남겨두지 않았고, 여러 매체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오탈자가 많아 정확한 원전을 찾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 정본을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서 현재는 어느 정도 작품들의 정리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이상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 한다. 그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가질까?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 '아방가르드' 등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말이지만, 단지 이러한 표현들만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학계에서는 그의 시 작품들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텍스트의 체계적 해석이 불가능한 작품

2. 텍스트의 해석이 약간 가능한 작품

3. 텍스트의 해석이 상당히 가능한 작품 


이러한 구분이 당연한 것 같기에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을 분석할 때는 이러한 구분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1의 경우에는 그 작품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경우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며 대체로 후대에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 어떠한 것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해석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텍스트에 주목하지 못하고 그의 개인사를 통해 해석하려고 하거나 혹은 확대, 과장해서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시에는 숫자나 행렬, 도형도 많이 등장한다. 그가 건축에 전문가였으며,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공간도형, 심지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이용한 해석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완전하지는 않다. 이러한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연작시「건축무한육면각체」나 연작시인 「삼차각설계도」등에 잘 나타난다. 


이 밖에도 신형철의 박사학위 논문과 같이 역사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 연구도 있었다.


다음은 「건축무한육면각체」중에서 "AU MAGASIN DE NOUVEAUTES (양품점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로, 연작시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시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발췌,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만 옮김)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빈혈면포. 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가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하늘에붕유하는Z백호. 회충양약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 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Ⅻ에내리워진두개의젖은황혼.

도아의내부의도아의내부의조롱의내부의카나리아의내부의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식당의문간에방금도착한자웅과같은붕우가헤어진다.

검정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실린다.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구를질구하는조화금련.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나는애처로운해후에애처로워하는나)

사각이난케─스가걷기시작한다.(소름이끼치는일이다)

라지에─터의근방에서승천하는굳빠이.

바깥은비. 발광어류의군집이동.



이 시는 그가 경성의 미츠코시 백화점을 보고 지은 시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와 유사한, 혹은 더 높은 난이도를 보이는 것이 「삼차각설계도」연작이다. 다음은 그중에 「선에관한각서 1」전문이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발췌,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만 옮김)



   1   2   3  4  5   6  7   8  9  0

1  ⦁   ⦁   ⦁   ⦁  ⦁   ⦁   ⦁  ⦁   ⦁   ⦁

2  ⦁   ⦁   ⦁   ⦁  ⦁   ⦁   ⦁   ⦁   ⦁   ⦁

3  ⦁   ⦁   ⦁   ⦁  ⦁   ⦁   ⦁   ⦁   ⦁   ⦁

4  ⦁   ⦁   ⦁   ⦁  ⦁   ⦁   ⦁   ⦁   ⦁   ⦁

5  ⦁   ⦁   ⦁   ⦁  ⦁   ⦁   ⦁   ⦁   ⦁   ⦁

6  ⦁   ⦁   ⦁   ⦁  ⦁   ⦁   ⦁   ⦁   ⦁   ⦁

7  ⦁   ⦁   ⦁   ⦁  ⦁   ⦁   ⦁   ⦁   ⦁   ⦁

8  ⦁   ⦁   ⦁   ⦁  ⦁   ⦁   ⦁   ⦁   ⦁   ⦁

9  ⦁   ⦁   ⦁   ⦁  ⦁  ⦁   ⦁   ⦁   ⦁   ⦁

0  ⦁   ⦁   ⦁   ⦁  ⦁   ⦁   ⦁   ⦁   ⦁   ⦁


(우주는멱에의하는멱에의한다)

(사람은수자를버리라)

(고요하게나를전자의양자로하라)


스펙톨


축 X 축 Y 축 Z


속도etc의통제예컨대광선은매초당300,000키로메-터달아나는것이확실하다면사람의발명은매초당600,000키로메-터달아날수없다는법은물론없다.그것을기천배기만배기억배기조배하면사람은수십년수백년수천년수만년수억년수조년의태고의사실이보여질것이아닌가. 그것을또끊임없이붕괴하는것이라고하는가.원자는원자이고원자이고원자이다.생리작용은변이하는것인가.원자는원자가아니고원자가아니고원자가아니다. 방사는붕괴인가.사람은영겁인영겁을살수있는것은생명은생도아니고명도아니고광선인것이라는것이다.


취각의미각과미각의취각


(입체에의절망에의한탄생)

(운동에의절망에의한탄생)

(지구는빈집일경우봉건시대는눈물이날이만큼그리워진다)



과연 이상이 정말 현대물리학의 이론들을 알고 있었을까?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가 체계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주제나 소재 등을 기억하고 있다가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것은 이미 일본어로 시를 발표할 때부터 정립된 듯하다.




2의 경우, 즉 '텍스트의 해석이 약간 가능한 작품'은 그나마 텍스트의 의미를 일반적인 관점에서, 혹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한 경우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는 일반적인 상징성이 과연 그의 시에서도 그대로 쓰였는가 하는 점과, 단어 혹은 부분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더라도 전체적인 의미나 맥락의 파악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징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 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대표작으로는 「오감도」연작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시제1호」를 들 수 있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발췌,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만 옮김)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이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삼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사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오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육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칠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팔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구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이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십삼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십삼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길은뚫닌골목이라도적당하오.)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야도좃소.



너무 많이 알려진 시고, 학교에서도 배우지만 해석은 어렵다. 물론 교육과정에서는 학계에서처럼 깊이 들어가지는 않고 어느 정도 의견이 모아진 정도로만 배운다. 가령, '13'이라는 숫자가 서양에서 불길함을 의미한다거나 ''도로를 질주', 막다른 골목' 역시 불안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감도」연작에서는 1의 경우처럼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기에 전체적으로 어떠한 난이도라고 일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3의 경우,  즉 '텍스트의 해석이 상당히 가능한 작품 '도 생각보다 많다. 특히 그가 초기에 『가톨릭청년』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그가 이전에 일본어로 혹은 이후에 발표했던 시 보다 '상대적으로' 이해가 용이하다. 가령  「꽃나무」나 「거울」등의 시가 그러하다. 다음은 「거울」전문이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현재 표기법으로 수정된 작품 발췌)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ㅡ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 시 역시 학교에서도 많이 배우고 많이 알려진 시인데, 그의 작품 중에서는 난이도가 가장 낮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그가 즐겨 쓰던 소재였으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반대' 혹은 '대립'의 구도를 나타내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자주 이용되는 상징성이다. 그러므로 시의 해석에 있어 크게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는 이 시에서 거울 속의 자아와 거울 밖의 자아(자기 자신)의 통합을 모색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자아의 분열은 그가 느끼는 절망감의 근원일 것이다.




또한 그의 시문학을 다음과 같이 시기별로 구분하기도 한다. (각 연도별 활동은 위의 일대기를 참조)


1기: 1927년~1932년

2기: 1933년~1935년

3기: 1936년~1937년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역시 2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한 편, 구인회 활동을 하면서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단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또한「오감도」연재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인회는 알려진 대로 KAPF계열 문학시류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지향하였으며, 특히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김기림이나 이상 등은 초현실주의에도 집중하였는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시점에서부터 그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의 집필에 더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후기 시들은 1기나 2기의 난해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는 그가 신체적,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상은 왜 그런 시들을 썼을까? 사실 그는 매 작품을 쓸 때 매우 진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장난 같아 보이는, 낙서 같아 보이는 시들이 사실은 고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 활동은 다시 독자에게 강요된다. 


혹자는 이상이 그러한 시를 쓸 때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시를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너무 깊이 생각함으로써 해석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괴롭다는 점이다. 이상은 그러한 '괴롭힘'을 즐겼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당시 식민치하 조선인들이 느꼈을 보편적인 감정, 그리고 이상의 개인적인 감정들의 내포를 느낀다. 그 역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며, 그러한 현실의 돌파구로서, 그리고 검열과 통제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우회적인 방법을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그가 인간적으로 느끼는 감정들도 그 속에 담겨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상실감'과 '슬픔'의 표현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그가 1934년에 『중앙』에 발표한 「∙表∙榮∙爲∙題∙」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발췌,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만 옮김)



1

달빗속에잇는네얼골앞에서내얼골은한장얇은피부가되여너를칭찬하는내말슴이발음하지아니하고미닫이를간즐으는한숨처럼동백꼿밧내음새진이고잇는네머리털속으로기여들면서모심듯키내설음을하나하나심어가네나     

2

진흙밭헤매일적에네구두뒤축이눌러놋는자욱에비나려가득고엿스니이는온갓네거짓말네농담에한없이고단한이설음을곡으로울기전에따에노아하늘에부어놋는내억울한술잔네발자욱이진흙밭을헤매이며헛뜨려노음이냐     

3

달빗이내등에무든거적자욱에앉으면내그림자에는실고초같은피가아믈거리고대신혈관에는달빗에놀래인냉수가방울방울젓기로니너는내벽돌을씹어삼킨원통하게배곱하이즈러진헌겁심장을드려다보면서어항이라하느냐



이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이상이 이런 시도 썼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도 정확한 해석은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석이 가능한 시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에서 대체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인데, 그는 의도적으로 띄어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 시보다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는데, 시기상으로는 상대방이 금홍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금홍과의 관계를 이후에 시로 발표하기도 했었다. 


또한 그가 죽은 후인 1938년에 『맥』 제3호에 발표된 시 중에 제목이 붙어있지 않아 로 되어「무제」 있는 작품이 있다. 그 시의 전문도 옮겨 본다. (『이상 시 전집』(민음사) 발췌,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만 옮김)



내 마음에 크기는 한개 권연 기러기만하다고 그렇게보고

처심은 숫제 성냥을 그어 권연을 부쳐서는

숫제 내게 자살을 권유하는도다.

내 마음은 과연 바지작 바지작 타들어가고 타는대로 작아가고,

한개 권연 불이 손가락에 옮겨 붙으렬적에

과연 나는 내 마음의 공동에 마지막 재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음향을 들었더니라.    

 

처심은 재떨이를 버리듯이 대문밖으로 나를 쫓고,

완전한 공허를 시험하듯이 한마디 노크를 내 옷깃에남기고

그리고 조인이 끝난듯이 빗장을 미끄러뜨리는 소리

여러번 굽은 골목이 담장이 좌우 못 보는 내 아픈 마음에 부딪쳐 달은 밝은데

그 때부터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걷는 버릇을 배웠 드니라.



이 시는 아마도 그의 말년에, 일본 유학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은 건강의 악화와 경제적 상황, 여러 가지 안 좋은 여건으로 인해 힘들었을 것이다. 재기를 위해 애를 썼고, 변동림과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시에서 나타난 상실감은 자신이 추구하던 목표에 대한 상실감이며 현실에 대한 상실감이다. 금홍과의 결별이나 사업에 잇따라 실패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고, 구인회가 해체된 영향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어쩌면 자기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절망감마저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그가 폐결핵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아 결국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가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밖에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 쓰거나 혹은 진료 과정, 병원 등도 자신의 시의 소재로 삼는 등 그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시는 여럿이 있다. 어쩌면 그는 평생 고통스러웠을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영위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이는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간 길이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건축기사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에 대한 후회가 드는 동시에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의 삶은 그렇게 고난의 연속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스스로를 '박제된 천재'라고 하였다.




이렇듯 이상은 시대를 앞서 간, 선구적인 시인이며 작가였지만 그의 짧은 생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약 그가 결핵 치료를 제대로 받아서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그의 이후의 문학 세계는 어떠했을까? 그의 후기 작품들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퇴보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에 있어서도 난해한 시를 쓰는 대신 감정을 더 드러내는 시를 썼다고 해서 퇴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시가 난해하고 전위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시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다. 이는 그가 너무 파격적이었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기 때문에 주류를 형성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과대 평가된 측면도 있다. 그는 과연 천재였을까. 그것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의 영향력은 그와 그의 주변 정도로 밖에 퍼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상의 시도들이 이후의 시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도 있는데, 현재도 그와 유사하게 전위적이고 난해한 시를 쓰는 작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을 이상의 아류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그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처럼.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이상, 권영민 편집, 『이상 시 전집』, 민음사, 2022

신형철, 「이상 철학의 역사철학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엄경희. (2014). 이상의 시에 내포된 소외와 정념. 한민족문화연구, 48(0), pp.337-375.

조은주. (2017). 구인회의 니체주의 - 김기림, 이상, 정지용 시인이 보여준 '고통'과 '비극'의 의미. 구보학보, 16, pp.8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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