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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Sep 05. 2024

국민이 사랑하는 아웃사이더, 윤동주

윤동주 (1917-1945)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 사진


윤동주. 그 이름에 더 설명이 필요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 중에 최상위권에 들고, 그의 시는 (적어도 「서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많이 배우며, 시험에서도 단골로 나온다.


그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된 바가 있지만, 사실 자세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에는 아웃사이더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또한 유명한 그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모두 읽어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듯하다. 여기에서는 그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그가 추구했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길림성 용정 인근에 있으며, 그의 외삼촌인 김약연이 개척한 지역으로 만주 내에서도 교육, 종교, 독립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래서 윤동주를 길림성 출신 혹은 용정 출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연변 용정의 윤동주 생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kgeon/120211868097


그의 조부 윤하현과 부친인 윤영석은 기독교 장로였으며, 그의 가족들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윤동주 역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그러한 종교관은 이후 그의 시 세계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의 고향 역시 그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시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생가 근처의 우물은 그의 시 「자화상」에도 등장한다.


그는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급우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문익환이 있었다. 송몽규는 그와 동갑이었지만 생일이 몇 달 빨라서 동주는 그를 형처럼 대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이후 학업과 유학까지 같이 하며 평생의 벗으로 지냈으나 둘 모두 비슷하게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13세가 되던 1929년에는 등사판으로 발행되던 문예지 『새명동』에 여러 편의 동요, 동시들을 발표하였다.


1932년에는 캐나다 선교사가 경영하는 미션계 학교인 은진중학교(길림성 용정)에 입학하였다. 학교가 집으로부터 8 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가족들은 윤동주를 위해 용정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1934년에는 여러 편의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자작시에 날짜를 명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날짜 표기는 이후 그의 유작시집을 발표할 때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연구에서도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초 한 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등은 이 시기에 쓰인 작품들 중에서 남아 있는 것들이다. 또한 1936년경부터는 『카톨릭 소년』에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더불어, 백석, 정지용, 김영랑, 변영로, 한용운 등의 시인의 시집을 구하여 읽었는데, 그가 백석의 100부 한정 발간 『사슴』을 구하지 못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필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듯 백석과 정지용은 그의 시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는 학교를 여러 번 옮기게 되는데 여기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다.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옮겼던 그는 숭실중학교도 자퇴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으로 편입하여 1938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부친은 그가 의대에 가기를 원했지만, 윤동주는 자신의 의지로 문과에 간 것이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최현배 교수와 이양하 교수가 있었는데, 최현배 교수로부터 조선어의 중요성을 배웠고, 이양하 교수로부터 영문학, 특히 영시를 배웠다고 한다. 최현배 교수로부터의 가르침은 이후에 그가 조선어로만 시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41년에는 연희전문 잡지였던 『문우』에 「자화상」,「새로운 길」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 해에 연희전문을 졸업하였고, 자비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출간하고자 하였으나 출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양하 교수의 만류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시를 출간하기에는 부적절했다는 것이다. 대신, 윤동주는 육필 원고를 묶은 시집을 세 부 만들어 자신이 한 부를 갖고, 나머지 두 부는 이양하 교수와 후배인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그의 유고시집을 만드는 자료가 되었다. 


그가 발간하고자 했던 시집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는데, 이는 시를 통해 병든 사회를 치료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시」를 쓰고 난 후 (당시엔 시의 제목 없음) 시집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꾼 것이다.


현재 연세대학교에는 윤동주 시비와 윤동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연희전문이 연세대학교의 전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윤동주 기념관은 그가 생활했던 기숙사 건물에 지난 2020년에 개관한 곳이다.


연세대 내 윤동주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ipsi1004/220693081439


1942년에는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가을에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한다. 그가 도시샤대학으로 옮긴 이유는 이전에 도시샤대학에 정지용이 유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이전에도 정지용을 흠모했으며, 그를 롤모델로 삼아 정지용의 시집을 늘 갖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도시샤대학에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함께 서 있다. (정지용 편 참고)


교토 도시샤 대학의 윤동주, 정지용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ionyoohan/223347709461)


하지만 도쿄에서 대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차출하는 것에 대한 분위기 때문에 교토로 옮긴 것이라는 말도 있다. 참고로, 송몽규도 윤동주와 함께 일본 유학을 갔으나 그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일본에서는 떨어져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가 교토로 가면서 송몽규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송몽규는 교토 내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던 차였다. 


결국 윤동주는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하기 직전에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었다. 1944년 2월 22일, 그는 독립운동 죄목으로 기소되어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송몽규와 함께 수감된다.


1945년 2월 16일, 그는 옥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사망에 대해 생체실험설(정체불명의 주사. '소금물'이라고도 알려져 있음)이 유력하게 대두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송몽규 역시 3월 10일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시신은 화장되어 현재 용정에 안장되어 있다.


용정의 윤동주 묘소.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doublebean/223467139443




그는 짧은 생을 살았으며, 삶의 대부분이 학생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또한 그는 생전에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 적이 거의 없으며 (앞서 언급한 경우 이외에 없음),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등단하지 못했고, 그의 시집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무명일 따름이었다. 


그의 유고시집은 1948년에 강처중과 정병욱 등에 의해 생전 그가 내고자 했던 시집의 제목대로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정병욱이 윤동주로부터 받은 육필 원고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는 정지용이 서문을 썼고, 발문은 강처중이 썼으며, 윤동주의 시 31편이 담겨 있다.


정지용은 생전에 윤동주에 대해서 몰랐으나 나중에 윤동주에 대해 알고 매우 통탄스러운 마음을 서문에 표현하였다. 또한 윤동주의 시들에 자극받아 자신의 시 세계를 돌아보게 되었다고도 한다.


1948년 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625


그러다가 월남했던 윤동주의 여동생이 갖고 내려온 윤동주의 시 원본 등 미발견 시들을 포함하여 1955년에 재판본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시 총 89편과 산문 4편이 수록되었다. 


1955년 재판본 복간본 표지. 이미지 출처: YES24 


이 시집은 시간이 지나면서 개정판이 나왔으나 수록 작품 수에는 변화가 없었는데, 1970년대에 그의 시들이 더 발견되면서 1977년에 5판에서는 총 112편, 산문 4편이 수록되었다. 현재까지는 이 작품이 그의 작품 전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문인들이 바뀌었는데, 이들은 모두 윤동주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서문과 발문을 쓴 사람들이 바뀌게 된 이유는 정지용이나 강처중처럼 월북 인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등단문인들이 중심인 문단에 속하지도 못했고, 시인으로서도 공인받지 못했다. 그는 시를 사랑했고, 꾸준하게 시를 썼지만 그러한 것을 그의 스승이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공식적인 문예지에 발표하고 등단하지 않았을까? 시집을 낼 생각이었다면 그의 시를 발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시가 읽히기를 꺼렸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읽히기를 더 바랐던 것 같다. 


다만, 자신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일제의 감시망에 드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듯하다. 또한 자신의 성찰적 내용이 담긴 시를 지인이 아닌 모르는 이들이 읽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을 듯하다. 그래서 자선시집도 77부만 만들려고 했던 것이 이라.


만약 생전에 그가 의도했던 대로 시집을 출간했더라면 어땠을까? 가정이긴 하지만, 이양하의 우려대로 일제에 체포되어 더 빨리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시를 보면 일제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일제는 그의 시를 저항시라고 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1943년에 그가 체포되어 수감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해방을 6개월 여 앞두고 사망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도 많다. 윤동주의 생을 이야기할 때는 유독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만약 그가 해방 이후까지 살아서 자신이 시집을 발간하고 계속 시를 썼다면 또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실 그의 시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공감을 얻는 이유는 그의 시의 순수성과 감수성, 젊은 시절의 고뇌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에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동정심도 함께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시는 당시 주류 시문학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므로 문학계에서는 아웃사이더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시인이 되었으며, 그의 시는 '국민시'가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 그의 중학교 시절부터다. 하지만 초기의 시들은 동요나 동시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가령 1936년에 쓴 「오줌싸개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에서는 김소월의 시와 유사하게 정형적 율격, 특히 민요조와 유사한 일본식 율격이 느껴진다. 



빨랫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그러한 정형성은 이후 점점 줄어들고, 자유시나 산문시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의 중후기 시들은 대부분 그러한 자유시나 산문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시에 대해 공부하면서 각성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20대에 접어들면서 주제에 있어서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의 시들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성찰 또는 일상, 사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데, 이로 인해 이념적 성향, 사회적 가치 혹은 거대 담론보다는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이를 시에 여러 번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양심이 작용한다. 이러한 것들이 시집의 「서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너무 유명한 시이기에 굳이 다시 옮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위에서 설명했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에 이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가져와 본다. 참고로, 이 시는 1941년 11월 20일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래는 제목이 없었지만,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되면서 「서시」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가 이야기하는 바는 직관적이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늘, 바람, 잎새, 별 등이 상징하는 것도 대체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 역시 이러한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시를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어 기독교적 관점이나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표현되는 것은 그의 양심의 발로와 주어진 길에 대한 순응, 하지만 단순한 순응이 아니라 주체성이 결의되는 순응이다. 이 짧은 시에는 그의 고뇌가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이기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보편성이 그의 시가 국민시가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그러한 성찰의 태도는 그의 시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자의식과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 특히 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횡포가 극악으로 치닫던 시기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반성, 나아가 분노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이 포함된 시들로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 「참회록」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그가 1942년 6월 3일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일본 유학 중의 그의 심경과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쉽다'라는 표현은 그에겐 역설적인 말이다. 그가 그의 시들을 쉽게 썼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특히 「참회록」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민족과 역사에 대한 성찰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는 직접적인 저항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민족의식과 조국의 해방을 그리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시에서 표현했기에 '민족시인'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점이 일제에게 체포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도 자주 나타난다. 그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특히 예수를 통한 '속죄양' 의식에서 더 잘 나타나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십자가」가 그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41년 5월 31일 작)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에서는 속죄양 의식을 직접 표현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시를 통해 자신을 희생해야 할 필연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는 그의 강인한 결단과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시를 종교적인 관점보다는 독립운동과 저항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시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는 텍스트 자체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과 목표 역시 모두 암울한 시대 상황을 극복하는 것, 나아가 조국이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기에도 무리가 있을 수 있기에, 개인과 민족, 양쪽 모두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 분석에 대해서는 상징적, 서정적, 미학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전반적으로 짧고,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들의 표면적인 의미를 걷어내고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다고 말할 수 없기도 하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했지만 평생을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일본어로 시를 쓴 적이 없으며, 모두 조선어(한국어)로 작품을 썼다. 그러한 사실 역시 일제에게 저항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하지만 고향이 길림성(현재 연변)이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대한민국 국적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출생지 및 묘소가 모두 길림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을 '연변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특히 중국은 그를 자국민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2022년에 국가유공자 중 대한민국으로 등록기준지(구. 호적등록지)가 되어 있지 않은 156명에게 독립기념관 주소지를 등록기준지로 부여하였다. 이로 인해 그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윤동주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 간의 견해 차이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서울 종로구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2012년에 개관하였다. 이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하숙하던 집 인근에 있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므로 (연세대와 그의 하숙집 근처 정도) 그의 생과 작품 세계를 알고 싶다면 연세대 내의 윤동주기념관이나 윤동주문학관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울 윤동주 문학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zamppo73/223411651246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6

윤동주, 『윤동주 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 2022

윤동주,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소와다리, 2016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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