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1920-1968)
앞서 정지용 편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1939년에 『문장』지에서 정지용의 추천에 의해 세 명의 시인이 등단한다. 바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이다. 이들은 따로 동인을 결성하거나 함께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추구하는 시풍이 유사했고, 특히 자연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동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1946년에 '청록파'를 결성하고, 을유문화사에서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함께 간행하게 되었다. 이 제목은 박목월의 「청노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들의 시 세계를 잘 드러내는 용어이기도 했다. 이후 이 세 명의 시인은 '청록파 시인'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번 연재를 하면서 청록파 시인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좀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 대중에게는 박목월이 좀 더 친숙한 느낌이 들 것 같지만, 나는 조지훈을 선택했다. 각 시인의 삶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박두진의 경우에는 다른 두 시인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며, 박목월의 경우에는 그 행적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지훈의 행적이 더 나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이들은 모두 시대 상황에 따라 살아가고, 작품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머지 두 시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해보고자 한다. 박목월은 1915년 1월 6일에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등단하여 약 460여 편 (최근 공개된 미발표작 290여 편 포함)의 시를 썼다. 이중 160여 편의 시가 발표된 바 있는데, 작품의 수가 많다 보니 작품성이나 주제, 수준면에서는 편차를 보인다. 특히 1950년대 이후에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행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그는 1978년 3월 24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향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두진은 1916년 3월 16일, 경기도 안성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혜산이며, 그 역시 등단이나 초기 활동은 다른 청록파 시인과 유사하다. 1949년에 개인 시집인 『해』를 발간하였고, 이후 이화여대, 연세대 등에서 국어국문학과 교수로서 재하다가 1998년 9월 16일에 향년 82세로 사망하였다.
조지훈은 1920년 12월 3일에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동탁이며, '지훈'은 그의 아호였는데 그의 호가 본명보다 더 알려지게 되었다. (문인들 중에는 호가 더 알려진 이들도 많지만, 본명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는 조부인 조인석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영양 보통학교에 재학했다. 1929년 경에는 처음 동화를 썼다고 하며, 1931년에는 형인 조세림과 함께 '소년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소파 방정환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들은 마을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문집 『꽃탑』을 만들었다.
1935년에는 시 습작을 쓰기 시작했는데, 1936년에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고서점인 '일월서방'을 열었다. 또한 조선어학회와도 연관되었다. 이후 1939년 4월, 『문장』3호에 「고풍의상」으로 등단하였고, 11월에 「승무」로 재추천받았다.
1940년 2월에는 「봉황수」로 세 번째 추천을 받았다. 당시 등단 시스템은 문선위원들에게 여러 차례 (주로 세 차례) 추천을 받음으로써 등단하는 체계였다. 그를 추천한 것은 모두 정지용인데, 이렇듯 지용은 청록파의 탄생에 가장 기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김위남과 결혼하였다. 그는 부인의 이름이 남자 같다며, '난희'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1941년에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강원 외전강사로 취임하였다. 이렇듯 그의 사상적 배경에는 불교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과 관련하여 피검되어 조사를 받았고, 수감되지는 않았지만 해방될 때까지 낙향과 상경을 되풀이했다. 그가 등단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추천받았던 『문장』지는 그가 세 번째 추천을 받은 이후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문화건설협의회에 가담하였고, 10월에 한글학회에서 『국어교본』을 발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또한 명륜전문학교에 강사가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경기여고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3월에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의원이 되었다. 또한 청년문학화협회 고전문학부장도 맡았다. 이후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였고, 9월에는 서울여자의전 교수가 되었다.
이후 동국대 강사,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위원,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위원 등 문인협회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사망 시까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에 전쟁이 나자 문총구국대 기회위원장으로 종군하였다. 그는 전쟁 중인 1952년에 두 번째 시집인 『풀잎단장』을 간행하였고, 1953년에는 시론집 『시의 원리』를 간행하였다. 1956년에는 세 번째 시집인 『조지훈 시선』을 간행하였으며, 이 해에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8년에는 만해의 지인들 및 후학들과 함께 『한용운 전집』간행위원회를 발족하고, 이 전집을 발행하는데 힘썼다. 1959년에는 또한 네 번째 시집인 『역사 앞에서』, 수상집 『시와 인생』, 번역서 『채근담』을 간행하였다.
그는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이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에도 앞장섰다. 그러한 것은 4.19 혁명 당시 <고대신문>에 투고한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에서도 나타나 있으며,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고려대 교가를 작사하는 등 고려대와 연관이 많았다. 그는 시인으로 뿐만 아니라 국문학자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는 박목월의 행보와는 대조되는 점이다. 1959년에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도 맡는 등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지만,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1961년에는 세계문화 자유회의 한국본부의 창립위원이 되어 그 해에 벨기에 크로케에서 개초된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지조론』을 간행하였다. 이렇듯 그는 신념이 있었으며,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가 그러한 명성을 얻게 된 데는 그러한 측면들이 많이 부각된 점도 있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지조론』 중에서
1963년에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한국문화사 대계』를 기획하고, 『한국민족운동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는 수상집 『돌의 미학』을 간행하였다. 이렇듯 그는 시뿐만 아니라 수필, 논설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1966년에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7년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1968년 5월 17일에 향년 47세로 사망한다. 그는 청록파 시인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가장 일찍 사망한 것이다.
그의 시는 교과서나 시험에서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친숙할 것이다. 특히 「승무」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제목은 모르더라도 첫 구절인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구절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이 부분을 외우고 있는 사람도 많을 듯하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작품은 최승희의 승무를 보고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시는 1939년 11월에 『문장』지에 발표되었는데, 박목월이나 박두진이 좀 더 자연친화적 또는 자연의 대상물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한 것에 비해 조지훈은 그보다는 좀 더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의 시에서는 한국의 전통미가 표현된 것들이 많은데, 이는 그가 한국의 전통에서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빌레라'와 같이 고문(古文)에 가까운 시어의 창조는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그가 처음은 아니었으며, 당대 혹은 그 전후의 시인들도 한국적인 것을 시에 담고자 했다. 이는 전통, 토속어, 율격 등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지만, 지훈의 시는 전통적 의장을 통해 그러한 것을 더 선명하고 극적으로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시의 용어는 전통적인 것, 불교적인 것들이 함께 나타나있는데, 이는 그의 시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시가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등단작인「고풍의상」 역시 비슷한 작품이며,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접(蝴蝶)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ㅅ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시를 쓴 것은 아니다. 그가 등단하기 전에 습작처럼 쓴 시들은 1930년대 당시의 시풍과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 특히 탐미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등단하던 시기까지 이어졌지만, 「고풍의상」이후 그의 시 세계가 정립되어갔던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추천작인 「봉황수」는 산문시이며, 조선왕조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 더불어 허망함, 굴욕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고풍스러운 어조이며,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잘 드러났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1940년대 초반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아래는 이 시의 전문이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1940년대 초, 청록파 시인들은 ('청록파'라는 명칭이 붙기 전) 현실을 외면하고 자연을 노래하거나 심미적인 것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은 이미 KAPF가 와해되어 직접적인 현실참여적인 시인들이 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고,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인해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다. 또한 정지용을 비롯해서 많은 문인들이 절필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현실을 외면하였다는 비판은 당대보다는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 많은데, 특히 김수영 등은 그의 시 「김일성 만세」에서 대놓고 조지훈을 비판한 것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조지훈의 보수우파성향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도 그가 현실을 외면하였다는 비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의 행보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그는 꾸준하게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록파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단순히 청록파라는 이름으로 그를 묶어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그 세 명의 시인을 어떻게 같은 카테고리로 묶었는지 의문이기는 하다. 물론 크게 보면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정지용이나 당시 평가에 의한 것이지 만약 각각 등단하였더라도 그렇게 평가가 이루어졌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가령, 그들이 함께 내놓은 『청록집』에는 박목월의 시 15편, 박두진의 시 12편, 조지훈의 시 1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박목월과 박두진의 시는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조지훈의 시는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시집에 수록된 각 시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임
윤사월
삼월
청노루
갑사댕이
나그네
달무리
박꽃
길처럼
가을 어스름
연륜
귀밑 사마귀
춘일
산이 날 에워싸고
산그늘
봉황수鳳凰愁
고풍의상古風衣裳
무고舞敲
낙화
피리를 불면
고사古寺1
고사古寺2
완화삼玩花衫
율객律客
산방山房
파초우芭蕉雨
승무僧舞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도봉道峯
별
흰 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연륜
숲
푸른 하늘 아래
설악부
푸른 숲에서
어서 너는 오너라
장미의 노래
하지만 그들의 시를 같이 묶을 수 있었던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자연이라는 대상물 때문이 아니라 내재된 '존재론적 생명관' 때문이다. 결국 자연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존재의 중요성을 나타내려 한 것이며, 존재, 특히 인간-자연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연보다는 인간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한 지훈의 시들도 그러한 시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초우」나 「낙화」처럼 많이 알려진 그의 시들은 좀 더 자연에 가까운 것이므로, 이러한 시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청록파에 속하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낙화」 전문이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정지용은 조지훈에 대한 추천사에서 지훈이 '회고적 에스프리'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지훈의 전통적인 것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지훈은 서구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에서 전통주의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는 내용과 소재, 언어적 형식 (시어)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는 「승무」처럼 불교적인 소재를 직접 이용한 것들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 특히 선이나 해탈 등을 내포하고 있는 시들도 있다. 위의 「낙화」 역시 그러한 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배경을 알아둘 필요도 있다. 최동훈은 『조지훈 시와 현대 불교시』라는 저서에서 조지훈의 시에 나타난 불교 사상을 잘 설명하였다. 거기에 한국적 전통미, 유교사상, 자연관, 생명관 등이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지훈 이외에도 그 이전에 만해 한용운이나 미당 서정주 등도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시를 썼다. 하지만 지훈의 시는 만해나 미당과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지훈 시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훈은 한국 현대시와 현대 불교시에 있어 그 가능성을 확장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적 전통미의 탐구와 종교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작품에 녹여낸 기법은 그가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서 손색이 없게 한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청록집』, 을유문화사, 2006 (초판 60주년 기념 개정판 2판)
최동훈, 『조지훈 시와 현대 불교시』,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조지훈, 『시 - 조지훈전집 1』, 나남, 1996
조지훈, 『지조론 - 조지훈전집 5』, 나남, 1996
조지훈, 『승무』, 시인생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