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1912-1996)
백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며, 그의 시 중에서 특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대표작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다. 나는 백석을, 그의 시들을 왜 좋아하게 된 것일까?
『백석평전』을 쓴 화가 김영진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왜 백석에게 미쳤는가"를 간략하게 적었는데, 그는 백석의 시에 광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으며, 처음에는 딱딱하지만 씹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와 가슴에 맺히고, 심장에 새겨지고 인이 박혀서 영혼을 관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백석의 시는 언뜻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 이는 그의 시의 언어가 다소 낯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한 편씩 읽다 보면 그가 왜 이국적으로 느껴지면서도 한국적인 시인인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그의 시들은 모던한 그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더 토속적이기도 하다.
이번 백석편에서는 그의 삶과 시세계를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그는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석동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오산학교 앞에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는 1919년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1924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이전에 김소월 편에서도 얘기했었지만, 김소월, 김억 역시 정주 출신이며, 오산학교에 다녔다. 소월은 백석의 6년 선배가 되는데, 백석은 소월을 동경했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는 아직 시를 쓰거나 시인이 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결벽증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산학교는 4년제였지만 1926년에 학제 개편으로 5년제가 되어 오산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그는 1929년에 오산고보를 졸업하였는데, 그가 졸업하던 해에 후배로 이중섭, 문학수, 황순원 등이 입학하였다. 하지만 백석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졸업 후, 그는 1년 동안 집에서 쉬면서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로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또한 춘해장학회에 장학생으로 뽑여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법과에 입학했다. 춘해장학회는 정주 출신의 '금광왕' 방응모가 설립한 것으로서, 그 역시 조선일보사와 연관이 있었다. (이때는 아직 직접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여할 때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백석 역시 자연스럽게 조선일보사와 연관이 생겼으며, 유학 후 1934년에 귀국해서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한다. 이때 신현중, 허준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의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백석은 이 시기에도 고급 양복을 입는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며, '모던보이'로도 알려졌다고 한다. 또한 결벽증도 여전했다고 한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후 「주막」,「여우난골족」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 1월에는 100부 한정으로 시집 『사슴』을 발간한다. 그는 정식으로 시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시를 계속 써왔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은 백석의 유일한 시집이 되었다. 또한 이 시집의 발간에 김기림의 도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에는 3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속설에는 그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리기 위해서라거나, 33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집은 인기가 좋아 금방 다 판매되었으며,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서 윤동주 시인 편에서 얘기했던 대로, 그는 이 시집을 구하지 못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본을 만들어 갖고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시집 간행 후 그는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이때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지도했다고 한다.
백석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몇몇 여성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함흥에 있을 때는 소설가인 한설야, 시인 김동명 등과 관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과는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석은 친구인 신현중을 통해 통영 출신의 박경련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 통영에도 몇 차례 내려갔다. 하지만 박경련은 백석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훗날 신현중과 결혼하였다. 이때의 백석의 심경은 몇몇 시에 남아 있다. (주로 '난' 또는 '란'이라고 표현됨) 특히 그가 쓴 「통영 2」는 통영에 있는 충렬사 앞의 시비에 새겨져 있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가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 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山)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갓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갓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山)을 넘어 동백(冬柏)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갓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갓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女人)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 한데 동백(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지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시집 간행 후 그는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이때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지도했다고 한다.
또한 함흥에서는 기생인 김진향(본명은 김영한)을 만나게 되었다. 백석은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석과 김진향과의 관계는 그녀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학설도 있으며 사실 확인이 어렵다.
1936년 말, 그는 박경련에게 청혼을 하였는데, 이 혼인은 성사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백석은 1937년 말과 1939년 초, 부모의 강요로 두 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두 번 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42년에 화가 문학수의 동생인 문경옥과 결혼했으나 이 역시 1년 남짓 지나 이혼하는 등 그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은 불안정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야와의 관계가 이어지거나 동거를 했다고 하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역시 확인은 어렵다. 그는 1939년 말, 자야에게 같이 만주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자야가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1938년, 그는 함흥의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왔다. 그리고 이 해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등 2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후 백석은 『여성』지 편집주임으로 일하다가 1940년에 만주의 신징으로 간다. 그는 만주의 여러 기관에서 근무하며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하지만 1942년 이후에는 시를 쓰지 않으며 만주에 은거해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고향인 정주로 돌아갔다. 그는 조만식의 러시아어 통역비서로 일하며 그의 활동을 도왔다. 그는 1930년대에 함흥에 있을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주로 건너간 뒤에 본격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그의 러시아어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라는 러시아 여성의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1945년 말에 리윤희와 결혼하였는데, 리윤희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고 평생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이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에는 문학예술총동맹에 참여하여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백석이 해반 전에 썼던 몇 편의 시들은 허준을 통해 남한에서 발표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발표된 작품은 1948년 10월 『학풍』창간호에 발표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다. 이는 백석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이 시의 창작시기 및 해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그가 만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남신의주 지역의 집 또는 해방 후 살던 곳이리라고 생각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구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백석은 남한에서 새로운 시집을 출간할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을유문화사에서 그의 시집이 나올 예정이라는 예고가 있었지만 시집 발간이 취소되었다. 아무래도 백석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설상가상으로 그의 절친인 허준이 월북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백석은 주로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을 했지만 시는 쓰지 않았다. 이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시를 쓰지 않고 주로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외국문학 분과원으로서 일했지만 그가 원해서 한 것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그는 1956년에 몇 편의 동시 및 아동문학, 아동문학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백석은 북한의 아동문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창작 활동도 다시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쓴 글들은 대체로 북한의 이념을 담은 것들이었는데, 그럼에도 아동문학 논쟁을 야기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자아비판을 당하고 1959년에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양을 키우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백석은 당국의 허락 없이 농촌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는 한편 자신의 경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삼지연 스키장 취재기를 쓰기도 했는데, 공식적인 활동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그는 남쪽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과 시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문학신문>에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복고주의와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그는 이후 1962년 이후로는 글 쓰는 활동을 금지당했다. 사실상 작가로서는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백석의 1956년~1962년까지의 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석의 이후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6년에 향년 85세로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백석은 생전에 시집을 『사슴』 한 권 밖에 출간하지 않았다. 그것도 1936년에 그가 25세가 될 때였는데, 그러다 보니 그의 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나 그가 북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연구하거나 그의 작품을 출간하거나 읽는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8년의 해금 조치 이후 그의 작품도 많이 알려져 현재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더불어 그의 시와 수필, 작품 등을 모은 정본도 몇 차례 간행된 바 있다.
백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슴』이후에 발표된 시들은 그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한 평가를 하는 이유는 1930년대 중반까지 그의 시들이 보여준 여러 시도들 때문이다. 백석 역시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시적 언어들을 그의 고향인 평안도 방언에서 구하거나 우리말에서 찾으려 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과 삶의 모습들도 시에 담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조선어로 시를 쓰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확대하였으며, 우리말의 단어를 확장하였다. 특히 1930년대는 한국적인 현대시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다른 시인들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가령 「여우난골족」과 같은 시는 아래와 같다. 이 시에서는 '여우가 난 골짜기'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소년인데, 화자가 시인 자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석의 시는 산문시 형태가 많으며, 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분량이 많지 않고 짧은 시 안에 그러한 서사를 담는 경우도 많다. 그의 시는 대체로 장면 묘사나 사건의 간략한 서술 등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러한 감각적 표현을 통해 더 실감 나게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가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 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 방등에 심지를 멫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멫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일제강점기에서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들은 조선인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시가 시집 발간 이후에 수준이 낮아졌다는 평가는 이후 그의 시들이 그러한 시도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1938년에 발표된 것이며, 그의 후기 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는 그의 사랑과 소망을 담고 있는데, 현실 도피적인 면도 보인다. 여기에서 '나타샤'가 '자야'라고 하기도 하지만,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는 그와 관련이 있었던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이름이 러시아의 흔한 여성 이름이기에 이름 자체가 가지는 특별함이 있는 것은 아니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는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시피 돌아다녔지만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고향은 늘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떠남과 돌아옴. 그의 삶은 그러한 것의 반복이었지만 결국 그는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고자 했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등단작인「정주성」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가 자신의 첫 발표 작품을 자신의 고향에 있던 '정주성'으로 한 이유는 그곳이 자신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학세계의 원점임을 명시한 것이다.
山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그러므로 백석이 북한에 남았던 것은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KAPF 출신들이나 좌익 인사들처럼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분단 전에 북한에 있었고, 월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0 년 넘게 금기시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월북, 납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이 있기 전까지, 많은 문인들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로 약 40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과연 그들에 대해 그러한 조치가 적절한 것이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현재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인인 정지용, 백석 등이 그러한 블랙리스트의 희생양인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백석은 많은 시인들에게 사랑받았고 영감을 주었기에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불린다. 대표적으로는 『백석평전』을 쓴 안도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또한 김영진 화백 등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 연재의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한국의 대표 시인 열 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를 선정하는 것에 별 이견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의 시들이 보여주는 한국적인, 민족적인 면들 때문일 것이다. 비록 시대와 장소는 달랐어도 그러한 정서를 시로 표현한 것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백석, 『사슴』(초판본 복간본), 소와다리, 2016
백석, 고형진 편집, 『백석 정본』, 문학동네, 2022
안도현, 『백석평전』, 다산책방, 2014
김영진, 『백석평전』, 미다스북스, 2011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