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1915-2000)
'서정주'라는 이름을 접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시문학사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일제에 찬동한 변절자이자 전두환 정권을 미화한 행적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았다. 또한 그가 오랜 시간 시작을 한 만큼 남긴 작품도 많지만 그 작품들의 수준이나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도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쓰면서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연재의 목적이 그 시인에 대해 평가한다기보다는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가급적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친일 행적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는 이 연재의 분량과 내 필력의 한계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한 고민을 안고 미당 서정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마을은 '질마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의 부친인 서광한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으로, 인촌의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거두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2년에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924년에 전북 줄포공립고등학교, 1929년에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 1주년 시위를 주모하였다가 퇴학당하였고, 구속되었으나 당시 15세의 나이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1931년에 고창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지만 여기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좌절되었고, 결국 교장의 권고로 자퇴하였다. 이렇듯 그의 학생 시절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독립군이 되려던 생각도 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또한 그는 이후 정규 교육을 받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불교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3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잠시 넝마주이 생활을 했고, 이때 소설가 김동리와 승려인 박한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초등학생의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다가 박한영의 권유로 서울의 개운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5년에 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36년에는 해인사에서 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3년 12월에는 습작시 「그어머니의 부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식 등단은 아니었고, 1935년에 <동아일보> 독자투고란에 발표한 후 이듬해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벽」을 그의 등단작으로 본다. 다음은 「벽」의 전문이다.
덧없이 바라보던 壁에 지치어
불과 時計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 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靜止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壁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벽아.
1936년 11월에는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등과 '시인부락'을 결성하여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도 2호까지 발간하였다. 1937년에는 「자화상」을 썼는데 이는 나중에 첫 시집인 『화사집』의 권두시가 되었다.
1938년에 전북 정읍의 방옥숙과 결혼하였고, 1940년에는 만주로 이주하여 연길에 있는 양곡주식회사에서 경리사원으로 일하였지만, 1941년 초 사직하고 귀국하여 2월에 첫 시집 『화사집』을 남만서고에서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일생동안 총 15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는데 그 목록은 아래에서 따로 작성하는 편이 좋을 듯하여 시집 발간 내용은 일단 약력에서는 제외하겠다. 또한 그는 이 당시 아래와 같이 '궁발'이라는 호도 잠시 사용하였는데 이는 『장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또한 표지의 글씨는 정지용이 써주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4월에는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9월에는 동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1942년 봄에 동광학교도 퇴직하고 번역 등으로 생계를 조달하였다. 8월에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유산을 받아 흑석동에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42년에 그는 다츠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하고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다. 또한 1943년부터는 일본군에 종군하며 친일시와 산문 등을 10여 편 발표하였다. 반면 1944년에는 민족주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혐의로 고창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물타기가 될 수는 없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는 마포구 공덕동에 일본인이 살던 집으로 이사 간다. 하지만 직업도 불안정했고 생계도 어려웠다. 춘추사 편집부장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고, 남조선대학(현 동아대) 전임강사나 동아일보 사회부장, 문화부장 등으로도 일했었다. 그러다가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이 되었는데 이듬해 7월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후 한국문학과협회 시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그는 「김좌진 장군전」, 「이승만 박사전」등을 출간하였지만, 이승만 일가가 그 전기에 불만을 품고 이 책을 모두 몰수하는 일도 있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혼자 서울에서 도망쳤지만, 9월에 서울이 수복되자 귀경하였다. 하지만 1951년에 1.4 후퇴 당시 다시 가족들과 함께 전주로 피난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전주고등학교 교사 및 조선대 부교수 등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 쓴 시로 「무등을 보며」가 있는데, 이 시에서는 전쟁의 충격과 전쟁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변하는 것도 보여준다.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山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午後의 때가 되거든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휴전 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서라벌예술대학 강사를 거쳐 1960년에는 동국대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이후 1979년에 정년퇴임 할 때까지 동국대 교수로 교직 생활을 하는 한편 꾸준하게 시집과 평론집, 소설 등 저서를 집필했다.
1977년에는 약 1년간 세계일주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에 세계 방랑기 『떠돌며 머흘며 무엇을 보려느뇨』를 전 두 권으로 발행하였다. 1994년에는 <국민일보>에 「미당 세계 방랑기」를 연재하였고, 이를 나중에 세 권의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는 2000년 12월 24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이 그보다 두 달 반 전에 먼저 죽은 뒤였는데, 부인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으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당은 시집 이외에도 남긴 저서가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시집 총 15 권만 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
『화사집』 1941, 남만서고
『귀촉도』 1948, 선문사
『서정주시선』 1956, 정음사
『신라초』 1961, 정음사
『동천』 1968, 민중서관
『질마재 신화』 1975, 일지사
『떠돌이의 시』 1976, 민음사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문학사상사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소설문학사
『안 잊히는 일들』 1983, 현대문학사
『노래』 1984, 정음문화사
『팔할이 바람』 1988, 혜원출판사
『산시』 1991, 민음사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민음사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 시와시학사
그는 등단했던 20대 초반부터 85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60년 이상 시를 썼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서 다른 지향점과 작품성이 보인다. 그래서 시기에 따라 그의 작품들의 주제가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중점을 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대체로는 초기의 갈등과 대립, 방황과 좌절의 세계로부터 점차 이상적이고 안정된 세계로 나아갔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데, 중후기 시들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한 안정된 세계가 결국은 미당 자신만의 것으로, 현실도피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 세계가 그러한 변화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시 시대상 및 자신의 삶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화상」은 『화사집』에 수록된 것으로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23세인 1937년에 쓴 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작품에서 미당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자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찰한다. 그러면서 갈등과 고뇌, 정신적 방황도 드러난다.
이렇듯 첫 시집인 『화사집』에는 '화사(꽃뱀)'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탐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욕망과 성찰, 생명탐구를 담은 그의 시 24 편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 시집에는 동명의 「화사」라는 작품도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전문인데, 이 또한 미당의 초기시의 특성을 보여준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은 고운
입설······스며라, 배망!
또한 학자들은 서정주의 시에서 불교적 인생관이 보인다는 것에 대부분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서정주는 불교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나타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1960년대를 중심으로 창작된 시들에서 주로 나타났다는 견해가 있다. 김윤식 등에 의하면 그의 초기 시에서는 불교적인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1930년대에 쓰인 그의 초기 시들은 식민지 치하의 그 어떤 시인들보다도 더 절실하게 억눌린 정신의 아픔을 노래했다고 하였다.
다수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작품에서 불교적 인생관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네 번째 시집인 『신라초』(1961)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시집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신라'를 소재로 한 시들을 다수 수록하였다. 김윤식 등은 "서정주에게 신라는 동양적인 일원적 평화를 상징하는 그의 상상적 고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태준은 서정주가 『신라초』를 발표하기 이전에도 불교적인 인생관이 나타났으며, 특히 '영생 실감'이라는 주제가 그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에서도 이미 전조가 드러났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서정주가 "『신라초』를 통해 사적(史的) 계승자가 되어 보다 광활하고 비정형적이며 균질하지 않은 화려 장엄한 영혼과 시간으로의 활공을 선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영원주의로 일컬어지는 신라 정신은 ‘세대 계승’의 차원에서 시작된 미학적 기획"이라고 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서정주가 겪었던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만난 정신적 원형이었으며, 또한 이러한 지향에는 서정주의 인생의 원숙함이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신라' 표상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상관성으로서의 세계 인식, 인간과 자연의 융화, 윤회하는 주체 등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잉태된 것이다. 서정주의 시는 불교적 상상력을 채용함으로써 한국의 시사(詩史)에서 돌올하고도 유현한 형이상학적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신라초』 이후 발표된 다섯 번째 시집인 『동천』(1968)에서도 불교적인 인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신라초』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기도 하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인간관이 스며 있어서 『신라초』의 인연 설화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견해도 있다.
미당의 불교적인 성향이 『신라초』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이후 이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사하면서도 계속 변해가는 그의 시 세계에 대하여 김윤식 등은 "서정주의 모든 문학적 노력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계속적인 탐구 정신이다. 그는 같은 주제 혹은 소재를 되풀이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의 편차가 빚어내는 묘한 질감을 향유한다"라고 하였다. 서정주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세계의 정신, 소재 언어를 선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계속했다.
장창영은 서정주의 불교적 인생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서정주는 자서전에서 여러 번 밝힌 바처럼 한평생 불교에 침잠하였고, 이를 시에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가 보들레르에 심취했던 초기 시의 격정에서 벗어나 불교적 상상력에 기초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했던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일찍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약했던 서정주는 불교를 통하여 심리적인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였고, 그 실체를 신라정신과 질마재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서정주는 불교의 힘을 토대로 자신의 현실적인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서정주가 직면했던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년시절 부친과의 일화에서 나타나듯이, 서정주에게는 현실계에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욕망 부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현세 대신에 실현 불가능한 신라 몰입과 영원 지향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상으로 볼 때 서정주가 『신라초』를 발표하기 이전에도 이미 불교적 인생관을 깨닫고 있었으며 그것을 작품세계에 반영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생명에의 경외라는 관점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기로 가면서 그의 작품들이 불교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질마재 신화』와 같이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는 그가 상상적 고향으로 두었던 '신라'에서 그의 실제 고향인 질마재로 옮겨간 것일 뿐 그 안에서는 여전히 불교적 인생관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은석은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는 서정주의 시론을 구현한 작품으로 그 핵심에는 신화적 사고와 ‘한국적 사물들의 불교적 인과관계’라는 시적 인식이 존재한다. 서정주의 신라정신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융합된 한국 불교의 종합적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질마재 신화』는 신화적 사고와 그의 불교적 인식이 접목한 결과물로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
『질마재 신화』는 그의 고향 질마재에서 전해오는 설화를 소재로 했는데, 대체로 산문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의 고향 회귀를 보여주며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아름다움, 문화를 잘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작품들과 시집들은 그의 이전 작품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완성도와 수준이 낮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미당이 남긴 작품은 1000여 편에 이른다. 그가 한국 시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분명하다. 지금껏 시문단에 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은 드물고, 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이전에 한국의 대표 시인 10인에 선정되는데 큰 이견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10대 시인 선정단들은 미당의 작품 중 「동천」을 최고로 꼽았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인데, 5행의 짧은 시지만 그의 시 세계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반면 그의 친일, 독재 미화 행위는 두고두고 그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 할까? 그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고 그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했다고는 하나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의심스럽다) 문학 작품과 시인의 삶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 상 그러한 행적을 쉽게 용서하거나 잊지는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시인으로 미당 서정주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그가 너무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만약 무명의, 혹은 덜 알려졌거나 작품 활동을 오래 하지 못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논란이 되었을까 싶기도 하니까.
그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한 말은 자신의 삶 전체를 미리 알고 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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