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1930-1969)
지금까지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시인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해방 후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아우르는 시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이 시인들에게도 녹록지 않았겠으나 해방 이후의 혼란과 곧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의 비참함, 그리고 독재와 부정부패, 이념의 대립으로 점철된 사회는 그 폭압의 주체만 달라졌을 뿐 시인들에게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소개할 시인들 역시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시를 썼던 시인들이 될 것이다.
이번 화에서는 1960년대 대표적인 시인인 신동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부친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동엽의 교육을 위해 애썼다. 이는 동엽이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엽이 부여국민학교에 들어간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44년에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록에 따라서는 부여국민학교를 1943년에 졸업 후 가난으로 인해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1년을 쉰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그의 학력에 대해서도 기록에 따라 연도가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는 1944년(기록에 따라 1943년 또는 1945년이라고도 함)에 관립학교인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였지만 1948년에 동맹휴학에 참가하여 무단 장기결석으로 인해 퇴학되었다. 그가 전주사범에 들어간 이유는 학비가 무료였으며, 졸업 후 장래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전주사범 시절, 그는 노자, 장자 등 동양 철학과 김소월,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집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엘리엇과 투르게네프, 크로포트킨 등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시기에 읽은 책들의 그의 사상과 신념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전주사범에서 퇴학당한 후 그는 부여로 돌아왔는데, 그는 비록 졸업은 못했지만 교원자격에는 부합하였다. 그는 그곳의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1949년에 공주사범대학 국문과에 합격했지만, 그곳으로 진학하는 대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7월부터 9월 말까지 부여에서 인민군에 의해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맡았다. 이는 그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무정부주의자로서, 이념보다는 현실을 더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퇴각하자 그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는데, 12월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1951년 2월, 그는 국민방위군 대구수용소를 탈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민물게를 날로 먹었는데 이로 인해 간디스토마에 걸리게 되었다. 이 간디스토마는 이후 자주 재발하였으며, 결국 그의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간디스토마에 걸린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요양을 하며 건강이 다소 회복되자 대전의 전시연합대학을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또한 친구인 구상회와 함께 1년간 부여와 충남의 백제 유적지와 갑오동학혁명의 자취를 답사하였는데, 이때의 답사 경험 역시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1953년에 그는 대전에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휴전이 되자 그는 서울로 올라와 고향 선배 (또는 친구라고도 함)의 헌책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였다. 이때 서점을 자주 찾던 인병선을 만나게 된다. 병선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이었는데, 농촌경제학자인 인정식의 외동딸이었다.
1955년, 그는 동두천에서 군대에 들어간다. 그는 6군단 공보실에서 근무하다가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로 전속되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의가사로 전역한다. 이는 병선이 애쓴 바가 큰데, 두 사람은 1957년 초(또는 기록에 따라 1956년 말)에 부여에서 결혼하였고, 그곳에서 살림을 차렸다. 인병선은 1957년에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결혼 생활을 위해 학교를 중퇴하였다.
하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이에 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고, 동엽은 충남 보령의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직을 맡았으나 1958년부터는 폐결핵도 앓으면서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 가족에게 옮을 것을 우려한 그는 병선과 맏딸 정섭을 처가로 보내고 홀로 고향에서 요양을 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시 쓰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는데, 그 이전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발표한 작품은 없었다. 1956년에 구상회, 노문, 이상배, 유옥담 등과 교류하며 『야화(野火)』라는 동인지를 낼 계획도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 발간되지는 못했다. 이는 동인지 발행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며,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응모하여 시부문에 가작으로 입선하였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는 평론 「추수기(秋收記)」로 응모하였은 결선에서 탈락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상경하여 돈암동에서 가족과 다시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아늘 좌섭도 태어난다.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며 「진달래 산천」, 「새로 열리는 땅」, 「향아」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진달래 산천」은 한국전쟁 당시에 죽어간 젊은 군인들에 대한 애도를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 전후의 빨치산에 대한 작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 이에 대한 논란은 별로 없는 편이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1960년에는 교육평론사에 입사하여 전주사범 동창이었던 하근찬을 다시 만나게 되어 절친관계가 되었다. 이때 4.19 혁명이 일어나자 그 역시 가두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혁명 후 『학생혁명시집』을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사녀」등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도 생계난은 여전하였기에 그는 교직을 알아보았는데, 1961년에 명성여고 야간부에 국어교사로 특채되었다. 이후 그는 사망할 때까지 명성여고 (현재의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나갔는데, 여러 시와 더불어 시론인 「시인정신론」, 평론인 「60년대의 시단분포도」등도 발표하였다. 이어 1963년에는 첫 시집인 『아사녀』를 문학사에서 출판하였다.
한편, 그는 현실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65년에는 한일협정비준반대 문인서명운동에 가담한 바 있다. 더불어 현실 비판적인 시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고, 1966년 6월에는 시극 동인회 제2회 공연 작품으로 단막시극인 <그 입술에 패인 그늘>을 국립극장에서 상연하기도 했다. 또한 「4월은 갈아엎는 달」, 「산에도 분수를」, 「담배연기처럼」등을 발표하였다.
1967년에 1월에 신구문화사에서는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을 『52인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는데, 동엽은 여기에 「삼월」등 기존 시 여섯 편과 신작시인 「껍데기는 가라」를 수록하였다. 그러면서 펜클럽 작가기금을 받아 대작 장편서사인 「금강」의 집필에 착수하였는데, 1967년 12월에 총 26장 4,800여행의 대작으로 발표하였다.
1968년에는 장편서사시인 「임진강」을 구상한 후 문산 지역과 임진강 유역을 답사하였으나 이 작품은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그해 5월에는 그의 시에 백승동이 곡을 붙인 오페레타 <석가탑>이 상연되었으며, 6월에 김수영이 사망하자 조시 「지맥 속의 분수」를 발표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시론인 『시인·가인·사업가』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3월에 간암 진단을 받았으며, 결국 4월 7일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처음에 파주의 월롱산 기슭에 안정되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로 이장하였다. 백제유적인 현재의 능산리 고분군 인근이었다. 부여군에서는 부여읍에 있는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동엽의 사망 후인 1967년 7월에 유작시인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발표된다. 이 시는 4.19 혁명 당시 그의 심경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그의 저항시 중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민중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4.19 혁명 이후에 군사독재 정권으로 좌절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며, 그의 의지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1967년 3월에는 동명의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발표되기도 했다. 다음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전문이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동엽의 사후 부인인 인병선은 그의 육필 원고를 모아 유고집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병선은 2남 1녀를 홀로 키우며 출판사에서 일했고, 마침내 1975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전집』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판매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의 대표작은 「껍데기는 가라」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자주 수록되며 시험에도 종종 출제되기에 전문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제목 정도는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길지 않은 이 시에서 그는 간결하면서도 명징하게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과 4.19 혁명이 미완으로 끝났기에 민중들에게 그 혁명을 완수해 줄 것을 당부하며, 평화로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더불어 '껍데기'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렇듯 동엽은 그의 작품에 그의 사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시가 길어질수록 그러한 주제의식은 조금 더 옅어지는 감이 있다. 그의 등단작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나 「아사녀」에서도 그의 신념이 드러나지만 아무래도 간결성과 압축성 면에서는 짧은 시들에 비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현배는 특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서는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동엽의 시는 동학의 중심사상인 '인내천'과 '개벽정신'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한 사상은 「금강」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동엽이 꿈꾸었던 혁명의 밑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현배는 동엽의 시가 '서정시의 혁신의 시도'이며, '서정적 형식의 서사적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이는 "현실을 토대로 창조적 모색을 시도한 동학 정신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그러한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들 소재 다수가 역사적인 사건 혹은 역사적인 (설화 속의)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는 '민족주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 투쟁과 혁명의 뿌리를 찾고자 한 그의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가령 「아사녀」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원래 석가탑과 관련된 '아사달과 아사녀' 신화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는 이 설화를 4.19와 연관 지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였으며, 더 나아가 이것이 한국사를 관통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시를 1960년에 간행된 『학생혁명시집』에 수록했던 것이다.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 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예 도망쳐 갔구나.
―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운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려마, 너는.
오욕(汚辱)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개나리,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 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하지만 한국적인 소재를 주로 차용했다고 해서 그를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가둬두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그는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에 더 가깝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권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러한 권력이 없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 작품들 및 시론, 평론 등에서는 그의 그러한 꿈이 종종 드러난다. 가령 다음과 같이 「산문시 1」에서는 스웨덴의 사례를 들어 그러한 세계가 한국에도 도래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의 염원이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인가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뒤집어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 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레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놀이 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금강」을 빼놓을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워낙 대작이기에 여기에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치 한 편의 소설 작품과도 같은 이 작품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 전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혁명은 1960년대까지 이어져 있다.
이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실을 가져온 것이며, 그 속에 담긴 민중들의 투쟁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전후의 조선의 상황을 그려내면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가 민중들에게 민족적 주체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민족과 민중이 함께 담겨 있다. 다만, 작품이 워낙 장편이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동엽이 1961년에 발표했던 「시인정신론」에서 그는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말하기도 했다. 자연은 무계급의 평등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시가 생명의 발현'이며, 시가 현대인들을 구원할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시인은 선지자인 것이다.
나아가 김완하는 동엽에 대해 '우주적 순환과 원수성의 환원'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그는 동엽의 시가 민족주의적, 혹은 현실참여적인 시로만 인식되는 것에 대해 그 가치평가가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인류의 근원적 뿌리까지 탐구해 나아갔음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동엽의 세계관이 단지 한 국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적, 전 우주적인 것이며, 그가 추구한 현실참여는 그러한 '원수성의 환원'의 의미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40년이 채 못 되는 짧은 생을 살았으며, 그가 시인이자 작가로서 활동한 기간도 1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시기에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그를 김수영과 더불어 1960년대 현실 참여시인으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그는 현실을 비판하고 혁명을 꿈꾼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평화적으로 그러한 세계가 오기를 바랐다. 과연 그런 이상적인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그것을 믿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그가 가진 무기는 문학이었으며,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 울림을 주는 이유다.
만약 그의 건강이 온전하여 그 이후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시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염원은 1982년에 신동엽문학상의 제정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신동엽, 강형철·김윤태 엮음. 『신동엽 시전집』, 창비, 2013
신동엽. 『금강』, 창작과비평사, 1999
김준오. 『신동엽 - 문학의 이해와 감상 103』, 건국대학교출판부, 1997
김완하. 『신동엽의 시와 삶 - 우주적 순환과 원수성의 환원』, 푸른사상, 2014
지현배. (2013). 「신동엽 시에 나타난 동학사상과 글쓰기 방식-『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중심으로」. 동학학보, 27, 31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