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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김수영

김수영 (1921-1968)

by 칼란드리아
김수영.jpg 김수영 (1921-1968)]


김수영은 묘한 시인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시인이고, 그의 대표작인 「풀」은 교과서에도 수록되었고,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저항시인이라는 인식이 더 크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소시민적이고 찌질하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보인 모습이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마저도 개의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니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마이 웨이(My way)"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그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대의 격동에 휘말렸다. 그러니 그의 운명은 내적인 욕망과 외적인 압력 사이에서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 화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김수영 시인의 삶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에서 김태욱과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원래는 셋째 아들이었으나 그의 형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이 된 것이다. 아들 둘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데다 김수영도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가족들의 관심과 애정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특히 그의 조부는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이 커서 김수영에게 애정을 많이 보였다. 김수영의 집안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였으나 김수영이 태어날 즈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김수영의 아버지는 지전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IMG_4878.jpg 김수영 시인 생가 터 표지석.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adiaya/222593266628


김수영은 6세 때 계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수학하였고, 이어 1928년에 어의동 보통공립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졸업을 얼마 앞두고 열린 가을운동회 이후 김수영은 장티푸스와 폐렴, 뇌막염 등이 발생하여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등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병에서 회복되기는 했지만 학교 진학은 계속 순조롭지 못하여 1935년에야 선린상업학교 야간반에 입학하였다.


그는 1938년에 선린상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한 후 이어 같은 학교 주간부 2학년에 진학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특히 영어와 미술, 주산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마저도 순조롭지는 못했다. 당시 일본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자격 인정을 위해 고등예비학교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김수영은 도쿄 조호쿠고등예비학교에 입학하지만 얼마 못 가 자퇴하였다. 대신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를 다니며 연출공부를 하는 한편 시작(詩作)도 계속했다. 이때 배운 ‘드라마’는 그의 시에 도입되어 새로운 시를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렇듯 '다시 가문을 부흥시키라'는 가족의 바람을 뒤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의 가족들은 1943년에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였고, 김수영 역시 1944년에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서울과 길림을 오가며 귀금속 및 생필품을 팔고 있었는데 김수영은 어머니를 따라간 것이었다.


그에게 만주 생활은 절망적이었다. 길림에서도 <춘수와 함께>라는 3 막극 상연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연극 활동보다는 점차 시문학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는 관련 내용을 그의 산문 「연극에서 시로 전향」에 적었다.


김수영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1946년에는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중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때 김병욱, 박인환 등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신시론 동인'을 결성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또한 임화 등 KAPF 계열 문인들과도 교류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가 전쟁 시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는 1945년에 시 「묘정의 노래」를 썼으며 이를 1947년에 『예술부락』에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그의 등단작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시의 발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가 어렸을 때 한문교육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시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고 보거나, 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등 모더니즘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시작이 모더니즘에서 출발했지만 모더니즘으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 세계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남묘(南廟)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朱雀星)

깃들인 시전(矢箭)

붉은 주초(柱礎)에 꽂혀 있는

반절이 과하도다

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성화(星火)

서리 앉은 호궁(胡弓)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한아(寒鴉)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2

백화(百花)의 의장(意匠)

만화(萬華)의 거동이

지금 고오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관공(關公)의 색대(色帶)로 감도는

향로의 여연(餘烟)이 신비한데

어드매에 담기려고

칠흑의 벽판(壁板) 위로

향연(香烟)을 찍어

백련(白蓮)을 무늬 놓는

이 밤 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1950년 4월에는 김현경과 결혼하였으나 사실상 동거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한국전쟁의 발발로 김수영은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었고, 탈출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52년 11월에 석방되었다. 그가 의용군에 강제 동원 경험담과 탈출기,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감 이야기 등은 그의 수필 여러 편과 그의 전기 등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가 의용군이 된 과정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당시 전쟁 하에서는 그러한 상식이 통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수용소 생활을 통해 미 군의관과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그는 수용소 내 야전병원에서 통역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1955년에는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근무하며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9년에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판하였으며 현실 참여에 대한 인식으로 사회비판적인 시들을 지속해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출간한 시집은 『달나라의 장난』뿐이었다.


달나라의_장난.jpeg 『달나라의 장난』표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mohea/222857404691


그에게 '존재의 자유'는 평생의 화두였으며, 실존주의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특히 하이데거의『존재와 시간』을 애독했으며, 『횔덜린의 시와 본질』을 탐독하며 그의 시론을 정립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60년에 4.19 혁명이 일어난 후, 그는 정부를 비판하는 시와 평론들을 계속 발표한다. 이 글들은 과격하면서도 직설적인 그의 어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으며, 그러한 시작 자체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욱이 1961년에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작품들도 발표한다. 이후 그는 사회참여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로 강하게 인식된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에도 참여하였으며, 다른 문인들과 함께 성명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사상계』 1월호에 평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에서 이어령과 3회에 걸쳐 논쟁을 하기도 했다. 또한 4월에는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논쟁과 평론들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1968년 6월 15일 밤에 그는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어 중태에 빠졌다.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그다음 날 오전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47세였다.


이후 1974년 9월에 민음사에서 시선집 『거대한 뿌리』가 발간되었고, 1975년 6월에는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가 역시 민음사에서 발간되었다. 또한 1976년 8월에도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와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이 민음사에서 발간되었는데, 1981년에는 그의 작품들을 모두 모은 『김수영 전집』전 두 권이 민음사에서 발간되었다. 또한 '김수영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이 『김수영 전집』은 계속 개정판이 나왔으며, 2018년에 나온 "김수영 사후 50주년 기념판"이 가장 최근의 개정판이다. 이 개정판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의 정본으로 인정받는다. 그의 전집은 초판본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사용자_지정_1.jpg 『김수영 전집 I 시』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universeze/40126933363


2013년 11월에는 서울 도봉구에 "김수영 문학관"이 개관하였으며, 2021년 11월에는 "김수영 기념사업회"도 발족되었다. 현재 김수영 문학관은 도봉구청에서 관리하는 공립 문학관이지만, 김수영 문학관과 김수영 기념사업회의 중심에는 그의 아내 김현경이 있었다.


sub_about_img01.jpg 김수영 문학관 전경. 이미지 출처: http://kimsuyoung.dobong.go.kr/company/index


김수영과 김현경과 관계에 대해서는 김수영 기념사업회 홍기원 이사장이 쓴 두 권의 책인 『길 위의 김수영』과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특히 김수영의 행적을 직접 찾아다니며 쓴 『길 위의 김수영』은 김수영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김수영 본가의 입장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많다.


반면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은 아내 김현경의 회고록에 가까운 내용으로서, 대부분 김현경의 입장에서 쓴 내용들이라 세세한 부분에서 『길 위의 김수영』또는 기존의 『김수영 평전』에서 언급된 내용과 다른 것이 많다. 특히 가장 이견이 있는 부분은 결혼 직후부터 한국 전쟁 당시 상황, 그 둘이 헤어졌다가 다시 결합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서다. 이 부분은 김수영 본인도 여러 수필을 통해 밝히긴 했지만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계속 논란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김수영은 왜 그렇게 유명해진 것일까? 그가 어려서부터 시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다. 그로부터 십 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그는 시와 산문, 평론 등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였고, 사회문제, 특히 정치계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초기 그는 모더니즘 문학에서 출발하였지만 이내 현실주의적인 시적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문학과 사상의 일치, 지식으로서 현실 참여를 강조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그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시가 가진 한계, 즉 형식적 제약을 넘어 그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모두 심각하거나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산문, 평론 작품들을 보면 많이 알려진 것들 이외에도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솔직하게 모두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추고 싶었을 부분까지 밝힘으로써, 요즘으로 치면 "관심병 환자" 취급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그의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종종 당혹스러움도 느끼게 된다.


또한 그가 작품에서 주로 이용한 소재는 가족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직간접적으로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특히 산문의 경우에는 상당수가 가족, 특히 결혼 후 가정을 꾸리며 사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사회 참여 못지않게 가족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에 주목했다.


김수영에게 가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결혼 전 조부모님 및 부모님과 대가족을 이루어 살 때의 가족이며, 두 번째는 그가 결혼 후 이룬 가족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두 부류의 가족 내에서 모두 잘 지내지 못했다. 특히 김수영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김수영이 상업을 공부하여 기울어 가는 가세를 일으키기를 바랐으나 김수영은 연극과 문학에 빠져 있었으므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족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자 고민이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내 김현경과의 관계는 더 좋지 않았다. 특히 김현경과의 결혼 직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어 그의 생사가 불명해지자 김현경은 갓 태어난 아들을 시댁에 맡긴 채 김수영의 선배인 이종구와 부산 피난처에서 동거했던 적이 있었다. 김수영이 김현경을 찾아갔을 때 김현경은 김수영과 같이 가는 것을 거부했다. 김수영이 이때의 경험으로 지은 시가 「너를 잃고」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에서 김수영은 절망보다는 모욕을 표현하였다.


이후 김수영과 김현경은 1954년 말에 재결합하여 성북동으로 분가해서 살게 되었다. 김현경은 생활력이 강하였고, 김수영 역시 문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가는 중이었다. 김수영과 김현경 사이에는 김준, 김우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원만할 수가 없었고 잦은 충돌이 있었으며, 김수영은 김현경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과정은 심지어 김수영의 시 「죄와 벌」에서 소재로 이용되었다.




여기에서 각각의 가족을 소재로 한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아버지의 사진」 전문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오

나의 기아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

나는 모-든 사람을 또한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오


영탄(永嘆)이 아닌 그의 키와

저주가 아닌 나의 얼굴에서

오-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오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무리하는 생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 하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오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 시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이 시는 1949년에 탈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첫 시집에 게재되기 이전에 따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김수영의 아버지는 1949년 1월에 돌아가셨다. 김수영은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마저도 떳떳이 보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본다. 심지어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데 여기에서 처는 물론 김현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비참'이다. 김수영은 아버지의 사진에서 자신의 비참해 보이는 삶이 아버지와 겹쳐 보인다. 김수영은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은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도 이미 아버지의 삶은 비참했다. 그로 인해 고통받았을 것이고, 이는 사진 속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그래도 사진의 모습은 돌아가시기 직전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김수영은 사진 속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고, 사진 속의 아버지는 김수영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아'의 한자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굶주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비참한 삶을 더욱 강조한다.


김수영은 아버지의 사진이 보고 싶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김수영의 가족의 삶은 비참했다. 이는 김수영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계속 그랬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김수영은 불안감을 느낀다. 이는 '조바심'으로 표현되며,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다. 아버지 역시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집안의 몰락과 재기에 대한 기대감의 상실, 그것은 아버지 본인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김수영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1949년 당시는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으며 만주에서 돌아온 가족의 삶도 어려웠고, 갓 결혼한 김수영의 삶도 그랬다.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했지만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그러한 것을 타개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이 또한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무리하는 생'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이유다. 그러한 것은 그의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것마저도 '무리'가 되며, '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지나간 시간일 뿐, 후회한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사진 속에서는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 같이 / 시계의 열두 시 같이' 고정된 듯하다. 어쩌면 그는 그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가 말하는 비참은 아버지의 생전에 둘 사이의 관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죄송스러운 마음과 본인의 뜻대로 하지 못하게 반대하신 것에 대한 원망이 공존했을 것이다.


김수영은 기울어 가는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받았으나 본인이 연극과 문학에 빠지게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 이는 심지어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성격도 원인이 된다. 어릴 때부터 과도한 애정 속에서 자란 김수영은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면이 많았다. 또한 직업도 자존심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형제, 가족에게 시기와 원망도 많이 들었다.


이렇듯 이 시에서는 김수영이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느낀 삶의 비참함과 고통, 그리고 죄책감과 불안감이 표현되어 있다. 위안을 얻기 위해 사진을 보지만 사진을 보면 도리어 자신의 비참함을 더욱 각성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


이경수는 김수영의 시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표상과 목소리에 주목하여 아버지를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세상을 바라보는 성찰의 주체이자 대상”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시에 나타나는 남성성이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김수영의 시에서 초기에는 무능력한 모습에서 정치적, 사회적 활동이 증가하며 소극적 저항의 모습, 그리고 나아가 아버지의 모습을 극복하고 “아들로 표상되는 미래 주체에게 사랑과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김수영의 의지가 가장 잘 표현된 시로 「사랑의 변주곡」을 예로 들었다.




이어 「생활」이라는 시를 살펴본다. 이 시는 1959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는 김수영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낸 일상의 단면이 그려져 있다.



시장 거리의 먼지나는 길 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였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 간다

조용히 조용히......



김수영은 아내 및 아들과 함께 시장 거리를 걷고 있다. 그런데 좌판에 호콩, 마마콩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 콩들 사이에 솟아오른 콩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인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 많은 콩이 아마도 자기 가족들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중에 솟아오른 것이 자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콩은 '애정처럼 솟아' 올랐다. 김수영은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많은 관심과 애정 속에서 자랐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이다. 본인 자신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 시기가 그에게는 '유년의 기적'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집안이 넉넉했기 때문에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점점 가세가 기울면서 그도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년이 되어 또 다른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시장에서 콩들을 보고 자신의 현실을 다시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내와 아들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고 김수영은 뒤따라 가면서 계속 웃고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그러한 것을 김수영의 아내나 아들은 모른 채 그냥 갈 길을 가고 있다. 김수영은 '낙오자처럼 걸어'간다. 가족에게서도 멀어진 낙오자 같지만 인생에서도 낙오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았지만, 또다시 '생활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 골목을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비록 자기 삶이 비참하더라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자기 집이 있는 그 골목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울 것일 수도 있다.


그의 힘든 일상은 반복되고 계속된다. 그의 생활은 '고절'이었으며 '비애'였다. 그런데 '고절(孤絶)'이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시인이 만들어 낸 단어인 것으로 보인다. '홀로 떨어지다' 혹은 '홀로 막아내다'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이 시기 생활은 주로 아내인 김현경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김수영은 본인이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김수영은 일상의 한 단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며 현재의 힘겨움과 고통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그는 '조용히 미쳐'가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김수영의 삶은 대체로 그러했지만, 그는 그것을 안고 살았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한용국은 “김수영은 우리 근대 문학에서 근대적 생활의 의미를 시에 생생하게 형상화 해낸 선구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란의 복구와 도시화, 자본주의의 심화를 동시에 겪어나가야만 했던 1950년대의 삶 속에서 “생활”과 “시”의 사이에서 양자를 모두 껴안고 나아가는 생생한 근대적 주체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는 “생활”과의 부단한 저항이고 극복이었으며, 시와 생활 사이의 갈등 속에서 시와 생활의 길항을 고민하는 시적주체의 모습을 첨단의 시로서 보여준 하나의 증거였다 “라고 하였다.


한용국은 또한 김수영의 1950년대 시 세계를 1955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였으며, 전기를 ”생활과의 괴리 속에서 숭고를 지향했던 시기“로, 후기를 ”생활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생활 자체가 아니라 시에 반하는 생활을 문제 삼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고 하였다. 또한 김수영의 시 「생활」을 통해 ”새로운 생활은 그에게 삶과 세계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제공“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시야가 김수영에게 ‘이웃-타자’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으며, 4.19 이후 김수영이 혁명의 좌절과 자기부정을 극복하고 사랑의 완성과 세계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이미 이 시기에 정초 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김수영은 아내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특징을 보이는 시들이 구분된다.


정치훈은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금기와 위반 구조 연구 - ‘아내’와 ‘여편네’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할아버지-아버지-김수영의 삼대 관계로부터 형성된 주체의 분열과 그로부터 ‘아내’와 ‘여편네’를 바라보는 두 관점을 통해 ‘사랑’과 ‘자유’의 기저를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수영의 시에서 ‘아내’와 ‘여편네’는 동시에 사용되지 않으며 각각 구분된다고 하였다. 즉, 김수영의 ‘아내’는 김수영에게는 사랑의 대상이자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지만, 반면 ‘여편네’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과 아내의 금기의 충돌, 그리고 그로보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김수영 시의 핵심이며 아내와의 관계가 그 기저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렇듯 김수영과 아내와의 관계는 김수영의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 자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정민구는 “김수영의 시에서 가족은 ‘정상적인’ 방식에서 어긋나 도립(倒立)되고 위악(僞惡)적인 방식 안에서 형상화된다. 이러한 가족 형상화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家長)으로 간주되는 시적 화자의 태도이다. 그는 ‘정상성’에서 일탈한 방식으로 영위되는 가족생활에 대해 섬뜩하리만큼 정직한 시적 고백을 수행한다”라고 하였으며, “가족생활에 대한 문제적 형상화는 비단 가족에 대한 특별한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존재하는 가족에 대한 관념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김수영이 자신의 시에서 계속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정민구는 “가족을 바로 보는 행위가 국가(사회)를 바로 보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김수영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적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가 가족에 대한 시적 사유를 수행하고자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시대적인 문제의 상정(上程)이 긴요해진다. 그럴 때 김수영의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가족생활이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정상적인’ 가족생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고려를 필요로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즉 김수영이 가족의 이야기를 시에 담은 것은 단순히 가족사를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가족 역시 작은 사회이며 그 안에서의 갈등과 해결 방법이 큰 사회인 국가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수영은 사회의 부조리와 정치적 문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하기 위한 대상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상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민구도 또한 “김수영에게 있어서 현상을 바로 보려는 싸움은 가족의 안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바깥 모두에 걸쳐서 끊임없이 수행되는 ‘온몸’의 싸움이기 때문이다”라는 견해를 보였다.


김수영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무력함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점차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고, 그 가운데는 아내가 있었다. 김수영과 아내 김현경과의 관계는 동반자로서의 ‘아내’와 벗어나고자 하는 ‘여편네’ 간의 갈등이 있었으나 아내와의 관계 또한 김수영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김수영이 그러한 가족사는 이후 그가 사회 참여와 저항성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자신의 가족사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사회와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가족사에 대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의 도발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시들이 단지 개인적인 서사나 가족사의 극복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비록 그의 문제 인식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했더라도 그것은 인간 본연의 문제, 즉 존재의 이유로 확장되었을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삶의 문제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풀어낼 것인가 고민하면서도, 소시민적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승만 독재, 4.19 혁명과 5.16 군사반란, 그리고 이후 군사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김일성 만세」와 같은 도발적인 시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애초 연극을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연극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 시로, 글로 바뀐 것일 뿐,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렇게 글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개인적으로도 가난과 어려운 환경에 직면했으며, 민주주의의 열망은 군사반란과 독재에 의해 금세 꺾였다. 그 분노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로 향했다. 좌절과 본노가 함께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여, 침을 뱉어라"라며, 시인들에게 세상에 대고 침을 뱉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바람에 의해 누울지언정 쓰러지지 않는 민중들의 의지를 「풀」에서 표현한 것이다.


sub_poet_img02.jpg 김수영 시비. 이미지 출처: http://kimsuyoung.dobong.go.kr/company/index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대표작인 이 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완성한 것이며, 사후에 『현대문학』에 유고작으로 발표되었다. 그의 생전에 이 시에 대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 이후까지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대중들의 반응은 가히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할 정도였다. 이는 그의 시선집과 산문집이 연달아 출간되고, 이어 전집이 출간된 영향이 컸다. 50년 가까이 그러한 활동을 해온 민음사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거기에 동료, 후배 시인들과 평론가들 역시 김수영의 시들을 재해석하며 그의 작품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지하의 경우에는 김수영에 대해 "자신과 이웃의 소시민성을 풍자하는데 치중한 시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는 그의 생활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들이 많다. 이는 마치 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수영은 자신의 생활을 시로 표현하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을 함께 담고자 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그가 연극 연출을 공부하면서 터득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자유를 위해 싸우던 참여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당대보다는 후대에 정립된 그에 대한 이미지이다. 만약 그라면 그러한 정형화된 평가마저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앞으로도 그의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수영, 『김수영 전집1 시』, 민음사, 2018.

김수영, 『김수영 전집2 산문』, 민음사, 2018.

최하림,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 2001

홍기원, 『길 위의 김수영』, 삼인, 2021

홍기원,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 어나더북스, 2024

이경수. (2017). 김수영 시에 나타난 남성성과 ‘아버지’. 돈암어문학, 32, 31-74.

한용국. (2011-04-23). 김수영 시의 생활인식과 시적 대응. 한국시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서울.

정치훈. (2018).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금기와 위반 구조 연구 - ‘아내’와 ‘여편네’를 중심으로. 기호학 연구, 55(0), 251-279.

정민구. (2019).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가족 사유의 한 양상. 어문논총,(35),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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