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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존재와 무의미의 절정에서

김춘수 (1922-2004)

by 칼란드리아
김춘수.jpg 대여 김춘수 (1922-2004)


이 연재의 프롤로그에서 "한국 10대 시인"과 대표작을 이야기했었는데, 이 연재에서는 박목월 시인은 제외하였고, 그동안 그에 속하는 8명의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중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시인으로 김춘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김춘수를 한국의 10대 시인으로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고, 그의 대표작 두세 편 정도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비록 한두 구절 외우고 있는 시의 제목이 「꽃」인지, 「꽃을 위한 서시」인지 헷갈릴 수는 있어도.


이번 화에서는 '존재론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춘수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김춘수는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에서 부친 김영팔, 모친 허명하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대여(大餘)'인데, 후에 미당 서정주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SE-d2bf081f-f5bf-4708-9f72-6a603b56b6aa.jpg 김춘수의 생가 인근의 벽화.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tongyeongsi/221523046856


그의 집안은 유교를 엄격하게 따르고 있었으며, 유복하여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별 어려움이 없이 자랐다. 1929년에 통영 인근인 안정에 있던 간이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간다. 전학을 가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통학 거리가 너무 멀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935년에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으로 올라와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1939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자퇴한 후 도쿄로 향한다. 1940년 4월에 도쿄의 니혼대학교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하였지만 1942년 12월에 일왕과 총독에 대한 비방 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와 경찰서에서 6개월 간 구금되었다가 경성으로 송치되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도 퇴학당했다.


그가 실제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그랬던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항일의지가 별로 강한 편이 아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환경이어서 일제에 대한 불만은 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지인들과 사담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들이 헌병대에 알려지면서 그는 그러한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와 철학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퇴학 후 조선으로 돌아와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에서 요양하였으며, 1944년에는 명숙경과 결혼하였다. 1945년에는 통영 출신 예술가인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정윤주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연극과 음악, 문학, 미술, 무용 등의 예술 운동을 펼쳤다. 또한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museum-jeon5-bomnalbam.jpg 통영문화협회 회원들.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bomnalbam/60024493704?photoView=2


1946년에는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하였으며, 1949년에는 마산중학교로 전근하여 1951년까지 근무하였다.


1946년 9월에는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 『날개』에 시 「애가」를 발표하였고, 조향, 김수돈과 함께 사화집 『노만파』를 발간하였지만 3집까지 발간한 후 폐간하였다. 하지만 그의 첫 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019.jpg 『구름과 장미』 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yetnal.co.kr/shop/item.php?it_id=1318215042


1948년 8월에는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행문사에서 자비로 간행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꾸준히 시집을 발표하였는데, 2004년에 타계할 때까지 약 60년 간 문단에 있었기 때문에 펴낸 시집도 많았다. 그가 발간한 시집, 시선집, 시론집, 수상집 등은 다음과 같다.



제1시집 『구름과 장미』, 1948.8. 행문사

제2시집 『늪』, 1950.3. 문예사

제3시집 『기(旗)』, 1951.7. 문예사

제4시집 『인인(隣人)』, 1953.4. 문예사

제5시집 『꽃의소묘』, 1959.6. 백자사

제6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9.11. 춘조사

제7시집 『타령조.기타』, 1969.11. 문화출판사

제8시집 『남천』, 1977.10. 근역서재

제9시집 『비에 젖은 달』, 1980.11. 근역서재

제10시집 『라틴점묘 기타』, 1988.4. 탑출판사

제11시집 『처용단장』, 1991.10. 미학사

제12시집 『서서 잠자는 숲』, 1993.4. 민음사

제13시집 『호(壺)』, 1996.2. 한밭미디어

제14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1997.1. 민음사

제15시집 『의자와 계단』, 1999.2. 문학세계사

제16시집 『거울 속의 천사』, 2001.4. 민음사

제17시집 『쉰한 편의 비가』, 2002.10. 현대문학


시선집 『제1시집』, 1954.3. 문예사

시선집 『처용』, 1974.9. 민음사

시선집 『김춘수 시선』, 1976.11. 정음사

시선집 『꽃의 소묘』, 1977.4. 삼중당

시선집 『처용이후』, 1982.4. 민음사

시선집 『김춘수』, 1983. 지식산업사

시선집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1984. 열음사

시선집 『꽃을 위한 서시』, 1987. 자유문학사

시선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1990.1. 신원문화사

시선집 『돌의 볼에 볼을 대고』, 1992.3. 탑출판사

시선집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1983. 문학세계사

시선집 『김춘수 시선집』, 1994.11. 민음사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 1958.10. 해동문화사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 1961.6. 문호당

시론집 『시론』, 1972. 송원문화사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 1976.8. 문학과지성사

시론집 『시의 이해와 작법』, 1989.10. 고려원

시론집 『시의 위상』, 1991.3. 둥지

시론집 『김춘수 사색사화집』, 2002.4. 현대문학


장편소설 『꽃과 여우』, 1997.1. 민음사


수상집 『빛속의 그늘』, 1976.5. 예문관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 1979.4. 근역서재

수상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1980.1. 문장사

수상집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1985.12. 현대문학

수상집 『예술가의 삶』, 1993.7. 혜화당

수상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 1993.11. 제일미디어

수상집 『사마천을 기다리며』, 1995.2. 월간에세이


『김춘수 전집』, 1982.8. 문장사 (전 3권)

『김춘수 시전집』, 1986.7. 서문당




이 외에도 단편소설, 동화 등의 작품과 더 많은 출판물이 있지만, 이상만 해도 매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에는 대구에서 설창수,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함께 시 비평지 『시와 시론』을 창간하고, 여기에 그의 시 「꽃」과 산문 「시 스타일론」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6년에는 유치환, 김현승. 송욱, 고석규 등과 함께 시 동인지 『시연구』창간하였으나, 고석규의 타계로 인해 창간호만 낸 채 종간하였다.


1959년 4월에는 문교부의 교수자격 심사규정에 따라 국어국문학과 교수 자격을 인정받아 1960년에 마산 해인대학(현 경남대) 조교수로 발령받게 된다. 이후 1961년 4월에는 경북대 국문과 전임강사로 이직하였다. 경북대는 1978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82년 2월에 경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79년 9월부터 1981년 4월까지는 영남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후 그의 행보는 정치계로 이어진다. 1981년 4월에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국회 문공위원이 되었으며, 1981년 8월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국회의원 활동과 특히 1988년에 전두환 퇴임 시 송축시를 발표한 것은 그의 이력에 오점이 되었다. 그는 후일에 국회의원을 한 것이나 송축시를 쓴 것은 자의가 아니라고 했으나, 그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송공사 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정권에 부합하며 문학 활동과는 별개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정계에서 은퇴한 뒤로는 시인과 평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1958년 12월 제2회 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12월에 제7회 자유아세아문학상 수상, 1992년 10월에 은관문화훈장 수훈, 1997년 11월 제5회 대산문학상, 1998년 9월 제12회 인촌상 수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9년 4월 5일에 부인과 사별하였으며, 그는 2004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82세였다. 장례는 시인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성남시 광주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통영시는 옛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건물 4층을 리모델링해 2008년 3월 28일에 "김춘수 유품전시관"을 개관하였다.


SE-0af3d9d8-f4a1-47d7-a163-d9def47193ba.jpg 경남 통영시에 조성된 김춘수 유품전시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tongyeongsi/221628629489




김춘수의 작품 활동 기간이 길었던 만큼 그의 작품 세계 역시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는데, 명확한 구분은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초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관념시 시기

중기: '무의미시'로 불리는 실험적 시기

후기: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종합 시기

말년: 예술과 종교에 대한 성찰 시기


이 중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초기~중기의 시들이다. 그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존재론적 탐구'에 몰두했으며, 특히 '시적 언어에 대한 본질적 물음과 답변'의 과정을 이어나갔다. 또한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시학적 모색'을 통해 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나갔다. 이를 어느 정도 이룬 후에는 예술과 종교에 대한 성찰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은 「꽃」이다. 그의 작품에서 꽃은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1952년에 발표된 이 시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그만큼 해석이 난해한 시이기도 하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짧은 시에 그는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존재론적 고민'이다. 하지만 이 시가 많은 이들에게 애송되면서 이 시는 시인의 의도를 넘어서는 해석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어떤 이는 이를 '사랑'의 관점에서 보기도 하고, '관계'의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이름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부르는 행위, 즉 호명이 존재의 의미를 생성한다. 호명은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는 "언어는 인간의 존재 인식의 수단"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상통한다. 하지만 현재 학계는 김춘수에게 하이데거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는 문장은 존재론적 소망의 표현으로 보기도 하며, '릴케의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해석한 연구들도 있다. 김춘수가 릴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며, 이는 그의 시론이나 산문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릴케의 영향이 그의 초기작부터 이후 시 창작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존재론과 의미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의미'였다. 그가 의미의 시에서 무의미의 시로 나아가게 된 것은 1976년에 나온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는 "무의미 시론이라는 것은 기존의 의미를 부정하고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소멸의 시론인 동시에 생성의 시론"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기존의 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요소들을 모두 해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썼다. 대표작으로는 「처용단장」을 들 수 있다. 제목의 의미는 '처용이 부른 짧은 노래'이다. 하지만 시 속에 처용은 등장하지 않고, 마치 시인 자신이 처용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그가 25년에 걸쳐 완성한 총 4부의 연작시이며, 1,2부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발표되었고, 3,4부는 1990년대 초에 발표되었다. 그렇다 보니 각각의 시간차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서 "이것이 '무의미시'이다"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 전체가 그러한 무의미로 채워지기는 어려우며, 무의미시뿐만 아니라 기존의 존재론적 고민, 서정시의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시에서 서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가 서정주의에 빠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다음은 이 시의 1부 중 4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초현실적인 요소들도 보이며, 의식의 흐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열되는 문장들은 하나의 의미로 통합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합쳐지지 못한 파편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눈보다도 먼저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가 단순히 무의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맸음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존에 시를 속박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도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한 관념의 시공간을 초월하자 비로소 그의 시에서 그를 얽매던 의미들이 사라졌다.




무의미시의 실험적인 창작을 거친 이후에 그는 기존의 관념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시와 무의미시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의 대표작이 가장 마지막에 발표된 「쉰한 편의 비가」이다. 이 시기가 그의 후기이기도 하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도 그러한 시도를 했다. 또한 '비가'라는 단어로부터, 이 작품 역시 릴케의 「비가」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중 22번 비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특히 이 시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잃고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

사랑은 동아줄을 타고 너를 찾아

하늘로 간다.

하늘 위에는 가도 가도 하늘이 있고

억만 개의 별이 있고

너는 없다. 네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다.

이제야 알겠구나

그것이 사랑인 것을,



이처럼 이 시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예술과 종교에 대한 그의 성찰들도 함께 담겨 있어서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발표된 그의 작품들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했던 것이 릴케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이미 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그는 자신과 인간들의 고통(실존적 고통을 포함해서)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적 세계관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584849.jpg 마지막 시집인 『쉰한 편의 비가』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11618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러한 시들만 발표했던 것은 아니다. 가령 1957년에 발표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은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투쟁과 자신의 과거 경험,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의 상황 등을 연결하여 비극과 애통한 마음을 담았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製)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기야서 감방에 불령 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또한 1969년에 발표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샤갈의 작품인 「나와 마을」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이다. 이 시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모더니즘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편이며, 심상(이미지)만으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Screenshot 2025-01-16 at 13.26.26.JPG 마르셀 샤갈. 「나와 마을」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는 어려운 시인이다. 그의 시가 어렵기도 하지만, 평생 그가 추구했던 것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그는 교육자로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고,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우리나라의 시문학사에 남긴 족적도 명확하다. 비록 그의 이력에 오점이 있었다고 해도 그는 분명 위대한 시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그의 시집 한 권은 커녕 겨우 몇 편의 시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논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의 대표작 몇 편으로 그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대체로 협소한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 그에 대해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후학들에게 많은 숙제를 안기고 떠났다. 그러니 이 짧은 글로 그에 대해 논하는 것도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썼다는 시 「강우」로 글을 마친다. 이 시 역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 지짐이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김춘수, 『김춘수 시전집』, 2004. 현대문학

김춘수, 『김춘수 시론전집』, 2004. 현대문학

김성리, 『김춘수 시를 읽는 방법』, 2012. 산지니

최라영, 『김춘수 시 연구』, 2014. 푸른사상

양왕용, 『김춘수 평전, 2022』. 문화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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