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인환, 페시미스트 혹은 현실주의자

박인환 (1926-1956)

by 칼란드리아
박인환.jpg 박인환 (1926-1956)


박인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즘의 계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1920년대~1930년대의 도입기에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김광균 등의 시인이 서구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작품(사물시 등)을 썼고, 여기에 주지주의, 초현실주의적 기법도 표현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하에서 근대화, 도시화를 거친 문인들의 도시 감각과 현대 문명 의식을 드러내며, 당시 시대상과는 떨어져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0년대 들어서는 전쟁과 일제의 폭압, 해방과 혼란으로 인해 모더니즘은 갈 길을 잃게 되었다.


이후 1950년대에 한국전쟁과 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모더니즘도 그러한 감성을 표현하게 되었다. 특히 전쟁 경험은 실존주의적 경향도 강조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도시적, 비관적 감수성도 결합되었다. 그러한 대표적인 시인이 박인환이었으며, 이외에도 김경린, 김규동, 조향 등의 시인도 이 시기의 모더니즘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앞서 소개했던 김수영, 김춘수와 황동규가 기존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각 시인에 따라 수단과 지향점은 달랐지만 실험적인 작품들을 쓰거나 현실 인식에 기반한 모더니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현실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모더니즘 시가 아니라 현실에 더 다가가는 한국적 모더니즘 시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면서 모더니즘은 좀 더 과감해지고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파격성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모더니즘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더니즘을 계승해서 시를 쓰고 있다.




박인환은 모더니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기에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했다. 하지만 그의 생이 짧았던 만큼 그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도 10년 남짓으로 매우 짧다. 그가 남긴 시들도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시 상당수가 국민들에게 애송되며, 가요로 만들어지거나 낭송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광선은 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박광선은 1936년에 면사무소 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 이때 그의 가족도 모두 경성으로 이사하였다.


IMG_E6072.jpeg 강원도 인제군에 조성관 박인환문학관.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hyun76lee/222650164907


이로 인해 박인환은 1933년부터 인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경성덕수공립소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고, 이어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학업 대신 시, 그림, 영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칙을 어기고 영화를 보러 다니자 이는 아버지와 갈등을 야기하였다. 결국 1941년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퇴시키고, 1942년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944년에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평양의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종로에 '마리서사'라는 헌책방을 개업하였다. 이 마리서사는 선배 시인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며, 이후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마리서사.jpg 1945년 당시 마리서사와 박인환(우측). 이미지 출처: https://cafe.naver.com/poetjd/42


그런데 그는 다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나이를 더 많게 속인 데다가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반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언행은 다른 이들에게 무례하게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낸 편이었다.


다만 김수영과는 가까운 사이면서도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1940년대 후반에는 친하게 지냈지만 1950년대 초반부터는 점차 사이가 멀어져 김수영은 박인환을 비판하는 글을 여러 차례 쓰기도 했다. 특히, 박인환이 죽은 후 그가 나이를 속였다는 것을 알고는 더 분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도록 한다.


마리서사는 그의 아내 이정숙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정숙은 그보다 한 살 연하의 문학소녀였으며, 두 사람은 1948년에 결혼하였다.


1946년 12월, 박인환은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이 시는 외래어의 의도적인 사용과 이국적 이미지, 감각적 표현 등 모더니즘의 요소들을 드러낸다.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少年)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갔다

베링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戰庭)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千萬)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그가 운영하던 마리서사는 얼마 가지 못해 1948년에 폐업하였다. 이후 그는 자유신문사에서 일하는 한편, 김규동, 김수영, 김병욱, 임호권, 양병식, 김경린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1949년에는 동일들과 함께 합동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기도 했다.


1949년 7월 16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바로 석방되었는데, 그의 혐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조선문학가동맹에 잠깐 가입했던 것과, 신문사 기자 활동이 정부의 의심을 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일 이후, 그는 경향신문사로 옮겨서 일하게 되었고, '후반기'라는 동인을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지하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월에는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하였다. 1951년 5월에는 육군 종군 작가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0월에는 부산으로 내려가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55년 3월부터 5월까지는 대한해운공사 사무장 자격으로 공사 소속의 상선인 '남해호'를 타고 미국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의 여행기는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53년 3월에 동인 '후반기'가 해체되자 그는 김규동, 이봉래 등과 함께 '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하였다. 사실 그는 시인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영화평론가로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학창 시절부터 영화에 심취했던 것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영화 평론을 썼으며, 실제로 그의 수입은 시를 써서 버는 것보다 영화 평론을 써서 버는 것이 더 많았다고도 한다. 특히 국내 영화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들을 국내에 소개하는데 기여했다.


사진3._박인환_선시집._1955._국립중앙도서관.jpg 『박인환 선시집』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https://blog.naver.com/tournoteblog/223278118911


1955년에는 『박인환 선시집』이 산호사에서 발간되었다. 이는 그의 생전의 유일한 시집이며, 총 5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1976년에 박인환의 사후 20주기를 맞아 『목마와 숙녀』라는 제목으로 그의 아들에 의해 근역서재에서 재간행되었으며, 이전 시집에서 「자본가에게」, 「문제되는 것」등 두 편을 빼고, 미발표작 7편을 추가하여 총 61편을 수록하였다. 이는 그의 아들의 뜻이었다.


이후 1986년에 문학세계사에서 『박인환전집』을, 2009년에 실천문학사에서 『박인환전집』을 출간하였는데 아직 그의 미발표작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작품들에 대한 원전/정본 작업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박인환은 1956년 3월 17일부터 시인 이상의 기일을 기린다고 3일간 과음을 하다가 3월 20일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나의 서른이었다. 여담이지만, 이상의 기일은 4월 17일인데 그가 왜 3월 17일을 이상의 기일로 착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그가 3월 17일을 이상의 기일로 생각한 것은 그 이전부터였기에(동인 '후반기'가 해체한 것이 1953년 3월에 '이상 추모의 밤'을 개최할 때였다), 그가 단순히 착각한 것은 아니라 의도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0002151873_006_20170530102710535.jpeg 망우산 박인환 묘소 근처의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151873


그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해 9월, 지인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의 시비를 건립하였다. 2012년에는 그의 고향에 박인환문학관이 개관하였는데, 그 내부에는 그가 운영하던 마리서사를 비롯해서 명동거리, 특히 그가 주로 이용했던 '유명옥', '은성', '동방싸롱' 등을 재현해 놓았다. 또한 그의 유품들과 육필원고도 전시되어 있다.


KakaoTalk_20230718_121106263_21.jpg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당시 명동 거리.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skyinjegun/223174814859




박인환은 키가 큰 데다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명동백작'으로 불리며, 당시에도 상당히 댄디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역시 자연스럽게 모던함이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도시적 감수성과 전후 시대의 우울과 고독을 표현한 모더니즘이 그의 작품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작품들만 썼던 것은 아니다. 1945년에 등단 후 그가 쓴 작품들에는 민족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작품들도 있는데, 특히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을 응원하는 시들도 썼다.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래는「남풍」의 전문인데, 이 시는 그의 생전에 출간된 선시집에는 수록되지 못했다.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土民)

태양 없는 날에

너의 사랑이 백인(白人)의 고무원(園)에서

소형(素馨)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꾸멜신(神)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안콜왓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緯度)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슴팍으로 숨어든다



또한 현실 비판과 저항을 다음 시들도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자본가에게」, 「문제되는 것」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특히 「문제되는 것」은 '허무의 작가 김광주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김광주는 「백치 아다다」를 쓴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왜 김광주를 언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에 대한 존경과 공감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평범한 풍경 속으로

손을 뻗치면

거기서 길게 설레이는

문제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죽는 즐거움보다도

나는 살아나가는 괴로움에

그 문제 되는 것이

틀림없이 실재 되어 있고 또한 그것은

나와 내 그림자 속에

넘쳐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 암흑의 세상에 허다한 그것들이

산재되어 있고

나는 또한 어두움을 찾아 걸어갔다.


아침이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이

내 피곤한 발걸음을 최촉(催促)하였고


세계의 낙원이었던

대학의 정문은

지금 총칼로 무장되었다.


목수꾼 정치가여

너의 얼굴은 황혼처럼 고웁다

옛날 그 이름 모르는 토지에 태어나

굴욕과 권태로운 영상에 속아가며

네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더냐


문제 되는 것

평범한 죽음 옆에서

한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나는 내 젊음의 절망과

이 처참이 이어주는 생명과 함께

문제 되는 것만이

군집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현실 비판적인 시들은 이후에 걸러지고, 시집이 재간행되면서 감각적인 시들 위주로 재편되었는데 이는 그의 작품 세계를 그러한 틀에 가두어 두는 셈이 되었다. 그래서 박인환에 대해서는 굳어진 이미지가 있는 셈이다.




박인환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이다. 두 작품은 모두 노래로 만들어져서 사람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갔다. 특히 「세월이 가면」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술집 '은성'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며, 그 자리에서 극작가인 이진섭이 바로 작곡을 했고, 나애심이 바로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가 죽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 시에서도 그의 작품 세계를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의 대표작은 역시 「목마와 숙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 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 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ㅡ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 등 두 시는 모두 전후의 불안과 절망, 허무를 담고 있다. 전쟁의 비극을 체험하였으며, 전쟁이 갓 끝난 1950년대 중반이니 그러한 감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어두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모더니즘으로 포장을 하려고 해도 그 포장에서 담긴 것들, 그리고 그 포장에서 삐져나오는 것들이 그러한 억제를 통해 감정적으로 더 고조됨을 느끼게 한다.


그는 작품들에서 감정의 절제 수준을 다르게 하였다. 그래서 감정이 다소 강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감정이 최대한 절제된 작품도 있다.


아울러 토머스 스턴 앨리엇, 스티븐 스펜더, 위스턴 휴 오돈 등의 시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한 영향들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것이 그의 작품이며, 대표작에서도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그의 작품이 이러하다'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그의 선시집이나 시전집을 읽어 보아야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김수영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김수영은 박인환을 "경박한 감상주의자", "겉멋만 부리는 모더니스트"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목마와 숙녀」를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했고, 박인환을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도 하였다. 무엇보다 박인환의 시어가 '낡은 것'이라고 했다.


1149072_575821_2109.jpg 김수영(좌)과 박인환(우).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mimescope/220706545102


김수영의 비난에도 그는 별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아있었던 동안에도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김수영도 그 정도로 대놓고 비난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김수영은 박인환의 사후에 비난의 수위를 더 높여갔었다. 박인환이 이를 알았더라면 억울해했을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해서는 김수영이 박인환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느꼈거나 혹은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더욱이 박인환이 사후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참여시'를 강조했던 김수영으로서는 박인환의 시가 시대의 요구에 맞지 않는, 하찮은 시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의 경우에도 1960년의 3.15 부정선거와 4.19 민주화 운동을 통해 참여시로 나아갔던 점을 생각해 보면, 박인환의 경우에도 그 이후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러한 시를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는 실패했다"라는 평가를 내렸으며, 그의 시어, 모더니즘 성향, 작품의 완성도나 구조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재능이 부족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마와 숙녀」에 나타난 표현들은 그러한 비판에 대한 박인환의 응답이기도 하다. 자신의 시가 유행이나 좇으며 통속적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도 '인생은 원래 통속적'이라고 맞받아친다. 오히려 통속성이 사람들에게 잘 어필하여 더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가볍거나 깊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1950년대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이었다. 이는 당시 시문학에 다른 한 축이었던 서정주의와 구분되며,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즘과 결합함으로써 단순히 도시적 감각과 우울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작품 속에 반영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한 모더니스트, 염세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1950년을 기준으로 비록 그의 후기 시들이 그 이전의 시들에 비해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에서는 여전히 현실을 반영하려고 한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연구들 역시 초반에는 대체로 '현실 인식이 부족한 모더니스트'라는 평가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결합'이라는 측면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나 아직 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박인환, 『박인환 선시집』, 더플래닛, 2016

박인환, 『박인환 시집』, 유페이퍼, 2019

윤석산, 『박인환 평전』, 도훈, 2022

박인환문학관 홈페이지 http://parkinhwan.or.kr/



keyword
이전 16화김춘수, 존재와 무의미의 절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