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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변절인가 어긋난 생명관인가

김지하 (1941-2022)

by 칼란드리아
김지하.jpg 김지하 (1941-2022)


그동안 살펴본 시인들의 삶과 작품은 여러 면에서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시인들은 일제에 부역 여부 혹은 친일 여부가 쟁점이었다. 반면 해방 이후에는 독재를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활동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자의였든 강압에 의한 것이었든 기록으로 남은 그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김지하 시인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그는 과거 민주투사로 평가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변절자로 낙인 되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김지하는 1941년 2월 4일 (음력) 전라남도 목포에서 부 김맹모와 모 정금성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영일이며 '지하(地下)'는 그가 나중에 지은 필명이다. 한자를 다르게 '之夏', '芝河'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1947년 목포 산정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3년에 졸업하여 목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52년 말, 그의 가족은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그는 1954년에 원주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다. 1956년에는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학년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재학 중 늑막염으로 휴학하여 원주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그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으며, 국내외 시인들의 작품들을 읽는 한편 습작시를 쓰기도 했다.


1959년에 중동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미대 미학과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인 김지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미대에 속한 미학과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1년에 미학과가 문리대 문학부로 바뀌면서 그 역시 문리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문리대 연극회에서 활동했던 이력이 있다.


1960년에 4.19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 역시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은 이때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1961년에 그는 '민족자주통일연맹'이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조동일과 함께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회담'의 남측 학생대표로 선발되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이 행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3년 3월, 그는 『목포문학』2호에 「저녁 이야기」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지하(金之夏)'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한자는 나중에 '地下'로 바뀌었는데,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는 지하 외에도 노겸, 노헌, 우형, 묘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규탄대회'에서 그는 「곡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조사(弔詞)를 썼으며, 「최루탄가」라는 노래를 작사했다. 또한 6월 3일에 서울대생들의 주도로 '한일회담 즉각 중지' 요구 시위에 참여했다가 넉 달간 투옥되었다. 이는 그의 첫 번째 투옥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65년, 그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에 의해 1급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한다. 하지만 1966년에 수배가 해제되어 재입학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30일에 졸업하였다.


1967년에 그는 '코리아 마케팅'이라는 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취업하여 4개월 정도 근무하였는데, 11월에 『시인』에 「황톳길」등 네 편을 '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이 그의 공식적인 등단작으로 인정받는다.


다음은 「황톳길」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고문과 핍박으로 죽은 '애비'를 부르며, 현재의 고난을 상기시켰다. 그렇듯 망자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투쟁 의지를 강화하며, 향후 그의 투사적 활동에 대하여 예고하였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은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이후 그는 1970년 『사상계』5월호에 「오적」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다시 게재되었다. 또한 풍자극 「나폴레옹 꼬냑」의 연출을 맡아 공연을 준비했는데, 공연을 시작하기 하루 전인 6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사상계』는 폐간되었고, 『민주전선』또한 「오적」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압수당했다.


20220511-08052998.jpg 『사상계』5월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koreatimes.net/ArticleViewer/Article/146538


「오적」은 당시 권력층과 재벌의 비리와 부패상을 풍자한 작품으로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을사오적에 비유하였다. 특히 가사, 판소리, 타령의 어조를 활용하였으며, 화자는 '구전된 이야기'라고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는 오적을 지칭하는 한자를 개, 돼지, 원숭이 등을 비유하는 변으로 바꾸는 언어유희를 보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한자들이다. 이 작품은 매우 길기 때문에 이 글의 말미에서 전문을 따로 소개하겠다.


이 밖에도 그는 「비어」등 비판적인 시를 꾸준히 발표하였으며, 연극 무대에 올리려던 「나폴레옹 꼬냑」을 희곡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희곡에서도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1970년 12월에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하였다.


1971년, 그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체스코였다. 그러다가 10월에 학생들의 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지명 수배를 받아 피신을 했는데, 1972년 4월에 그의 하숙방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폐결핵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73년 4월 7일, 김지하는 소설가 박경리의 외동딸인 김영주와 결혼하였는데, 주례는 김수환 추기경이 맡았다. 이어 9월에는 일본의 경제침량을 비판한 장편풍자시 「분씨물어」를 집필하였는데, 이는 후에 「똥바다」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되었다.


1974년 4월, 긴급조치 1, 2호에 의해 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명 수배를 받았으며, 대흑산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 1심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7월 20일에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 해외에서는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1975년 2월 15일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3월 13일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29일에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로터스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는 옥중에 있었기에 이 상은 1981년에 받게 되었다. 또한 노벨문학상,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선 그의 형집행정지 결정이 취소됨으로써 그는 다시 무기수가 되었다. 또한 1975년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썼다. 이 시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당시에 바로 발표하지는 못했고, 1982년에 동명의 시집으로 발표하였으나 바로 판매금지되어 1987년에야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수감 생활을 하던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점차 불교와 생명사상에 몰입하게 되었으며, 작품 세계 또한 변화하였다. 그는 책을 통해 독학으로 이러한 사상을 깨우쳤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아래에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국내외에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자 그는 1980년 12월 12일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원주에서 수양을 하였다. 1981년에는 앞서 받지 못했던 로터스 특별상을 수상하였고,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세계시인대회가 수여하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국내외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1982년 5월에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하였다. 이후 대설『남(南) 1』과 『남(南) 2』, 『남(南) 3』을 각각 1982년 12월과 1984년 8월, 1985년 3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하였으며, 1984년 7월에는 첫 시집이었던 『황토』를 재출간하기도 했다. 1984년 8월에는 산문집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를 동광에서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사면복권되었다.


51155.jpg 『타는 목마름으로』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61517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점차 동학과 화엄사상, 생명사상을 체계화해 나갔으며,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난 것이 1986년 3월에 발표된 『애린』연작이다. 『애린』1권은 1986년 3월에, 2권은 9월에 각각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또한 1986년 5월에는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을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1987년에는 그동안 금서였던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이 해금되어 다시 출간되었다.


0002361353_001_20220728161701191.jpg 전남 해남군 땅끝전망대에 건립된 김지하 애린 시비. 이미지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361353




이때까지의 그의 행보는 점차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투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1991년 5월 5일,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조선일보>에 발표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기고글 때문이었다. 이는 1991년 4월, 강경대 열사의 사망 이후 전국에서 이어진 분신투쟁에 대한 비판이었다.


IE001676612_STD.jpg 1991년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아카이브


그가 왜 그런 글을 썼는지를 두고 이견이 많지만, 대체로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벗어나 '변절'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로 인해 분신정국이 공안정국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제2의 6월항쟁'은 주저앉게 되었다.


물론 당시 그의 입장에서는 '생명존중'이 가장 중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그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그와 함께 했던 문인들, 민주화인사들, 재야인사들도 그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이후 1993년에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을 총 다섯 권으로 솔에서 출간하였으며, 간간히 시집, 산문집, 회고록 등을 출간하였으나 결국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또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영남대 교육학과 석좌교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활동이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관은 아직 없으며, 시비 조차도 전국에 거의 없는 편이다.


그가 다시 언급된 것은 2022년 5월 8일에 강원도 원주의 자택에서 사망했을 때였다. 향년 81세였다. 그의 아내였던 김영주는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었으며, 김지하보다 3년 앞서 2019년에 먼저 별세한 바 있다. 토지문화재단은 그의 차남이 이어받았다.


김지하 시인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선영에 있으며, 2022년 10월 21일에는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이렇듯 김지하의 시 세계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저항과 대결의 시기로, 억압적 지배 세력에 맞서는 남성적이고 직선적인 대결 의지가 강렬하게 드러났다.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이 시기의 작품에 해당한다. 이후 그의 시는 내적 성찰과 조화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생명 중심적이고 화합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인 「애린」, 「중심의 괴로움」 등을 선보이게 되었다.


이 전환의 밑바탕에는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불교적 사상인 화엄적 상상이 있다. 초기의 저항적 시 세계는 농경공동체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항거의 에너지였으며, 이후 생명의 포용과 조화를 탐구하는 화엄적 상상으로 진화한 것이다. 홍영희는 이렇듯 김지하의 시적 변화는 농경공동체의 생명 의식, 불교의 화엄적 자아 발견, 그리고 법계 연기론을 통한 생태적 상상력으로 연결되며,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홍영희에 의하면 김지하의 문학은 농경공동체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의 시 세계에서 농경공동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명과 순환의 중심 원리로 작용한다. 농경공동체의 대지는 생명의 뿌리이며, 이는 억압적 현실에 대항하는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 예를 들어, 그의 초기 시에서는 죽임의 현실 속에서 생명의 강렬한 의지가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김지하의 생명관은 농경공동체의 생명 순환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 대지는 생명의 근원이며, 김지하의 시에서도 대지의 생명력은 억압과 죽임의 세력을 이겨내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들녘」에서는 들판에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명력이 죽임의 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 긴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라는 표현에서는 죽임의 세력(총소리)과 대지의 생명력(산딸기, 꽃들의 외침)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생명관은 이는 「황톳길」에서도 나타나는데, 척박한 현실을 돌파하려는 민중의 저항적 생명력으로 표현된다.


김지하의 시는 불교의 화엄적 세계관을 통해 우주적 생명과 연결된다. 화엄 사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론을 중심으로 한다. 김지하는 이를 자신의 생명론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모든 생명이 상호 연결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이 1980년대 「애린」 연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억압적 세력과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화엄적 자아의 발견과 생명 본질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는 것이다. 「애린」 연작은 불교의 「심우도」(소를 찾아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을 그린 선화)와 병치되며, 김지하가 자아를 찾고 우주적 생명의 실체를 깨닫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애린, 50」에서 그는 자신이 찾던 "애린"이 곧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깨닫는다.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 애린, 나.” 여기서 애린은 그가 우주적 생명과 연결된 화엄적 자아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농경공동체 의식과 화엄적 상상은 상호 보완적이다. 농경공동체는 생명의 토대를 제공하고, 화엄적 상상은 이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조합은 그의 시 세계를 단순한 저항 문학에서 벗어나,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생명 문학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김지하 시인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참여 시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다. 그의 시는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였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엄밀하게는 1980년대 이후) 달라진 그의 모습은 그에 대한 평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대체로 1990년대 이후의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1980년대 이후 그는 동서양의 철학과 한국의 전통 사상을 연구하며 '생명사상'을 제창했다. 그는 옥중 생활 동안 다양한 종교 서적을 탐독하며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천주교, 선불교, 원불교, 도교 등 생명 존중과 관련된 각종 종교들을 섭렵해 나갔다. 그는 옥중 생활 동안 겪었던 극한의 고통 속에서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이를 '개벽통(開闢痛)'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너무 나아가 사이비 종교 혹은 비현실적인 영역까지 미치는 바람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작품과 삶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의 변절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문학적 업적과 사회적 영향력을 재조명하며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그의 후기 행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더불어, 그가 남긴 사회적 메시지와 문학적 유산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억압적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찬양하고, 생명의 연결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며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형성하였다. 이는 한국 문학에서 농경적 전통과 불교적 사유를 통합한 중요한 성과로 평가되며, 농경공동체와 불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생명의식을 통해 현대 생태문학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현대시인론>, <한국현대문학사> 강의

김동근, 정민구, 김청우, 『한국현대시인탐방』, 심미안, 2018

이경철, 『나는 김지하다』, 일송북, 2024

허문명, 『김지하와 그의 시대』, 동아일보사, 2013

홍용희. (2017). 김지하의 문학과 민중성의 변이 양상 고찰. 비평문학,(66), 249-273


* 김지하 시인의 시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시 전문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았으며, 이로 인해 원문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다음은 「오적」전문이다. 이 작품은 김지하가 의도적으로 한자를 바꾸어 썼는데, 여기에는 인터넷상으로 표기되지 않는 한자들이 있어 한자는 참고만 하기 바란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고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죽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제별(狾䋢), 국회의원(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矔)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이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 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듯, 구름은 둥실
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쌌는다.


첫째 도둑 나온다 제별(狾䋢)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찌, 금단추, 금 넥타이핀, 금 카후스 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이,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봐라 저 제별(狾䋢)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 치고 간장 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 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 과 마늘 곁들여 낼름
세금 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 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뺨치겄다.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獪狋猿)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염사(兵不厭詐), 치자즉(治者卽) 도자(盜者)요 공약 즉(公約卽) 공약(空約)이니
우매(愚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 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어허 저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 보고 히뜩히뜩 저쪽 보고 헤끗헤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 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 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탈 없다더냐.


넷째놈이 나온다 장성(長猩)놈이 나온다
키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에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 차고 저기 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쉬엇 열중열중열중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어수(雲雨魚水) 공방전(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瞕矔)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 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 고여 삐져나와
추접무화(無化)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 팔려도 증산이닷, 아사(餓死)한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 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껌 씹으며
켄트를 피워 물고 외래품 철저 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 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듣고 뒤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 추리것다
똥줄 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 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것다.
이리 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하늘에 날벼락 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 내려 쏟아져 퍼부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 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 사돈네 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 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벌리고 멧돌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 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 뜯고 물어뜯고 업어메치고 뒤집어 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 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작신 조지고 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된민증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이놈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 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 합쳐서
우범 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밥 못 먹어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넨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 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없이 쏙쏙 기어나오는건
아니랑께롱
한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어 꾀수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 있나 말만 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놈 이 말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 국회의원(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矔)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오.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됐다 내 새끼야 그 말을 진작하지
포도대장 하도 좋아 제 무릎을 탁 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버렸것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死)는 사(私)요, 공(功)은 공(公)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 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서라
안 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 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뢰 같은 저 함성 범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같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 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손상, 백성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렷다.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 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 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 푸른 용트림이 기둥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십 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 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 원짜리 외국(外國) 개
천만 원짜리 수석비석(瘦石肥石), 천만 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 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 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門)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 두고 경제학박사 회계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두고 경영학박사 집사두고
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박사 박사박사박사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 속에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 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 속에 냉장고 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얹어 기둥은 코린트식(式) 대들보는 이오니아
선자추녀 쇠로 치고 굽도리 삿슈 박고 내외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벽에 갈포 발라
앞뒷퇴 널찍 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 매달아 부연 얹고
기와위에 이층 올려 이층 위에 옥상 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風), 본따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風), 돼지우리 왜풍(倭風)당당
집 밑에다 연못파고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층층 모아놓고
열어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 듯 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함롱, 봉그린 용장, 용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층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한 옥쟁반, 삘딩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밥그릇, 전자주전자, 전자젓가락, 전자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가방,
쇠유리병, 흙나무그릇, 이조청자, 고려백자, 꺼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 점 걸어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토기, 당화기, 왜화기, 미국화기, 불란서화기, 애태리화기, 호피담뇨 씨운 테레비, 화류문갑 속의 쏘니 녹음기, 대모책상 위의 밋첼 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 만년필, 촛불 켠 샨들리에, 피마주 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직접 직사곡사 천장바닥 벽조명이 휘황캄캄 호화율율.
여편네들 치장 보니 청옥 머리핀, 백옥 구두장식,
황금 부로취, 백금 이빨, 밀화 귓구멍마게, 호박 밑구멍마게, 산호 똥구멍마게,
루비배꼽마게, 금파 단추, 진주 귀걸이, 야광주 코걸이, 자수정 목걸이, 싸파이어 팔지
에어랄드 발찌, 다이야몬드 허리띠, 터키석 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 원짜리 납반지가 번쩍번쩍 칠흑암야에 횃불처럼 도도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구이, 돼지콧구멍볶음, 염소수염튀김, 노루뿔삶음, 닭네발산적, 꿩지느라미말림,
도미날개지짐, 조기바톱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무침,
낙지해삼비늘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안 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워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식혜, 파인애플화채, 무화과 꽃닢 설탕 버무림,
롱가리트 유과, 메사돈 약과, 사카린 잡과, 개구리알 수란탕, 청포우무, 한천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빼주, 보드카람주(酒)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
놀랠 놀짜로다
저게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 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맛보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잔 두잔 헐레벌떡 석잔 넉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던지 이빨이 확 닳아 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내 부딪쳐가면서 씹어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所信)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 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노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꺼나
콩알 같은 꾀수묶 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꾀수 어쩔꺼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 와 돈 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잡나
잘 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 가거라.


꾀수는 그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 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 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 하매, 포도대장 이 말 듣고 얼시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 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 속에서 내내 잘 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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