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1908-1967)
청마 유치환과 동랑 유치진은 자주 혼동된다. 둘은 형제이니 누가 시인이었고, 누가 소설가/극작가였는지 헷갈릴만하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시인인 청마 유치환이다.
청마는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진남군 (현재 통영시)에서 8남매 중 형 유치진에 이은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논란이 있는데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한다.
그는 1918년까지 외가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학년까지 마친 19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다. 중학교 당시 그는 형인 동랑이 주도한 『토성』지에 고향의 문우들과 함께 시를 발표했다.
1925년에는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192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중퇴한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사진학원에 다니며 사진술을 배웠고, 다시 귀국한 뒤로는 사진관을 경영하며 시를 쓰기도 했다. 1929년, 그는 권재순과 결혼하였다.
1930년에 형과 함께 『소제부』라는 회람지를 간행한 그는 여기에 「축복」 등 26편의 시를 발표한다. 이어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다음은 「정적」의 전문이다. 이 시는 다소 감상적이면서도 고요함 속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생명력에 대한 탐구는 훗날 그를 '생명파' 시인이라는 칭호를 갖게 해 주었다.
불타는 듯한 정력에 넘치는 칠월달 한낮에
가만히 흐르는 이 정적이여
마당가에 굴러 있는 한 적다란 존재 -
내려쪼이는 단양 아래 점점이 쪼그린 적은 돌멩이여
끝내 말 없는 내 넋의 말과 또 그의 하이함을
나는 너게서 보노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림자 알풋이 자라나서
아아 드디어 온 누리를 둘러싸고
내 넋의 그림자만의 밤이 되리라
그러나 지금은 한낮, 그림자도 없이
불타는 단양 아래 쪼그려
하이한 하이한 꿈에 싸였나니
적은 돌멩이여, 오오 나의 넋이여
하지만 그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7년에 그가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였다. 또한 이 시기 그는 장응두, 최상규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생리』를 발간하였다. 이후 1939년에는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그는 1940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한 그는 농장 관리 및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1945년 6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는 한편, 통영문화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46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동인지 『죽순』 창간호에 시 「6년 후」, 「동정」을 발표하였고, 1947년에는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어 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이 되는 한편, 시집 『생명의 서』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그는 해방 이후 한국 전쟁 전까지 경남권의 학교 교사와 교장을 맡는 한편, 『울릉도』(1948), 『청령일기』 (1949) 등의 시집도 간행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부산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에서 문인구국대를 조직하고 국군 3사단 소속으로 종군하였다. 이때 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를 펴내기도 했다. 1953년 4월에는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으며,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등을 간행하였다.
더불어 1957년에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에 당선되었으며, 1958년에는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교직과 시인협회 활동 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수상록 『동방의 느티』(1959), 자작시 해설총서 『구름에 그린다』(1959),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1964),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을 출간하였다.
이렇듯 그는 다수의 학교에서 근무하였고,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1967년 2월 13일에 부산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병원 이송 도중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부산의 에덴공원에 있었으나 진주 유 씨의 집성촌인 경남 거제시 방하리로 이장하였다.
현재 거제시에는 청마기념관과 청마거리가 있고, 통영시에는 청마문학관이 있는데 각각의 지역에 청마의 생가를 복원해 두었다. 거제시(유족 측)와 통영시는 청마의 출생지가 어디인가를 두고 싸우다가 현재는 통영으로 정리가 된 셈이다. 하지만 거제시와 유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반발하고 있어 향후에도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행정구역이 현재의 통영시와 거제시로 분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청마는 일생동안 열네 권의 시집을 펴냈으니 다른 시인들의 평균에 비하면 꽤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그의 대다수의 시집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조차 찾을 수 없다. 2008년에 부경대 남송우 교수가 청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청마 유치환 전집』을 전 여섯 권으로 낸 적이 있으나 이 역시 금세 절판되었는데 그 이유는 불명이다.
그래서 청마의 모든 시를 다 찾아 읽기는 어려우며, 그의 시중 일부를 선별한 시선집이나 초기 시집 등을 통해서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기에 그가 어떤 시들을 썼는지 경향성은 파악이 가능하다.
그의 대표작들은 교과서에 수록되거나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기 때문에 익숙한 편이며, 그의 대표작인 「깃발」의 첫 부분은 아마 누구나 알 것이다. 여기에서는 김윤식, 김현 공저 『한국문학사』에서 청마에 대하여 언급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김윤식 등은 청마의 자기 학대의 대립항으로 "이념의 푯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깃발」에서 가장 명료하게 전개된 그의 푯대는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그 이념의 푯대가 어떤가를 그는 직재 하게 표현하지는 않으며, 그것을 다만 애련에 빠지지 않는 생명에의 열애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또한 아래에 인용된 「바위」에는 그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 역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에 김윤식 등은 청마에 대해 "신채호적 지사의 기질을 끝까지 밀고 나간 독특한 시인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자학과 분노와 저주라는 예언자적 지식인의 역할을 끝까지 담당하려 한 몇 명 되지 않는 시인들 중에서, 그는 조지훈처럼 음풍영월을 하지도 않고, 이육사처럼 상징적 수사법을 도입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그의 감정의 무게를 그대로 표현한다"라고 한 것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나무」라는 시 역시 마찬가지다. 한 줄의 짧은 이 시에도 청마의 신념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으며, 김윤식 등에 따르면 "선비의 고고함을 표상하는 데 흔히 쓰이던 나무의 정정함"을 직접 드러냈다고 한다. 그러나 김윤식 등은 청마에 대해 "생명에의 열의는 세계와 개인에게로 자신을 개방시키는 힘이 되지 못하고, 자신이 내부로 그를 축소시키고, 재래적인 상투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래서 다시 그의 자기 학대와 분노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의 분노와 자기 학대는 그의 생명력이 밖으로 크게 확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이다. 그의 생명력이 긍정적으로 표출된 때는 대개 감각적인 소품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에 항시 정정할 수 있는 나무
김윤식 등은 "그의 범신론적 자연애에서 연유하는 섭리로서의 신은 "동양의 천의 개념에 유사한 그러한 의지"이다. 그것은 "인간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허무 의지“라고 하였으며, ”생명에의 열애라는 점에서 생의 철학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생명 시학은 그러나 생의 약동을 노래하지 않고 지사적인 고고함이나 예언자적 분노를 표출한다. 그의 시의 상당수는 허무 의지의 극치인 바위와 고고함의 상징인 전통적인 나무를 노래한다 “라고 하였다.
그의 다른 대표작인「생명의 서」에서는 생명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자아와 역사에 대한 인식까지 드러낸다. 이에 김윤식 등은 이 시에서 "사구에 백골을 쪼이리라" 같은 자기 학대의 표현을 한 것은 "본래의 자아를 위해 온몸을 던질 수 없는 유치환의 절규이다. 그 절규는 상황이 가열해지면 가열해질수록 더욱 치열해진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절규라는 것이다. 다음은 「생명의 서」의 전문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청마가 위와 같은 시들만 쓴 것은 아니다. 평생 수백 편의 시를 썼으니 그중에는 그의 기존 시풍과는 다른 작품들도 꽤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행복」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에서 그는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이 시만으로는 그가 순수한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청마의 삶을 논할 때 시조시인인 정운 이영도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청마는 1947년부터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이영도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청마가 통영여중 재직 당시 정운을 만나게 되었고, 그 뒤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인데 정운은 청마의 사후에 그 편지 중 200여 통을 추려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라는 서간집으로 펴냈다. 이 제목은 청마의 시에서 따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는 않고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은 '플라토닉 러브'였다고는 하나 청마가 아내와 가족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윤리적인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윤식 등은 이렇듯 청마를 '지사의 기품을 유지한 시인'으로 보았다. 그는 "유치환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대개가 자기 학대와 예언자적인 분노로 얼룩져 있다. 그의 세계는 미래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재정립하는 회귀적 세계이다. 유교적 선비의 세계인 것이다. 그의 조사법의 거의 대부분이 한시적인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는 신채호적인 선비 기질의 한 극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청마에 대하여 다른 시각에서 보는 연구도 있다. 이지원은 "수치심은 유치환의 "치열한 존재론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감정이다. 유치환은 ‘낙인’을 시적 방편으로 특유의 지향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중략) 유치환은 스스로를 낙인찍음으로써 자아를 성찰하거나 존재의 전환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시인의 수치심은 그저 타인을 의식함으로써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치부를 강화하여 궁극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고양하는 낙인의 방식은 유치환 시의 특수성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이는 유치환이 자기 처벌의 이유를 밝힌 것이다.
이지원은 이어 "이처럼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 하지 않고 자기비판을 통해 맹목적인 나르시시즘을 넘어서는 것, 궁극적으로 자기 성찰을 꾀하는 시적 실천은 누스바움이 역설하는 ‘생산적 수치심’의 조건과 맞물리는 지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유치환의 낙인의 텍스트는 수치심의 긍정적 윤리를 보여주는 모범적 예라 할 만하다. 특히 낙인을 시적 방편으로 수치심의 시적 지향을 보여주는 과정은 유치환 고유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30~1940년대 시적 관습에서 유치환의 독특한 시세계를 선취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유치환이 고고한 기품을 가져서가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워서 그러한 태도를 보였고, 자기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했다는 주장이다.
연구자들은 식민치하에서의 좌절감, 만주 이주로 인한 수치심과 고독감이 그를 더욱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윤은경은 "엄혹한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생명과 정신의 가장 깊은 영역마저도 강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예민하게 감각했던 유치환은 그가 처한 현실과 내면적 황폐함을 자아 내부에서 분출하는 가열한 생명애로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점점 강화되어 가는 식민지 현실에서 체감되는 무력감과 환멸은 그에게 현실의 모순관계를 관념적으로 지양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청마의 ‘만주 이주’는 고통의 근원인 현실적 역학을 관념적으로 사유하고 시화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생명애에 대한 그의 사유는 ‘만주’라는 광활하고 막막한 절대고독의 공간에서 또 다른 허무와 환멸의 실체에 직면하고, 이를 통해 생명성의 문제로 더욱 깊숙이 침잠해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청마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자학과 분노, 그리고 생명 존중의 관점에서 본 연구들이 주를 이루며 대체로 일치된 결과를 보인다. 내적인 자기 성찰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이 겉으로는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그를 지사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패배주의자로 볼 것인지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는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또한 청마의 친일 경력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그의 형인 동랑 유치진은 이미 「친일반민족행위자명단」에도 올라와 있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청마에 대해서는 아직 그러한 판단이 유보적이다. 그의 시 중 일부는 친일 성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특히 1942년 2월 6일에 <만선일보>에 기고한 산문은 친일성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보고도 있었다. 하지만 청마는 일생동안 자신의 친일 경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대체로는 그의 작품들에 가려 있었다.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향후에도 계속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청마는 대부분의 삶을 교직자와 시인으로서 살았는데 그의 삶에 대해서는 평전으로 나와 있는 것이 없었다. 또한 다수의 현대시인론 등에서도 그를 누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의 작품들이 많이 알려진 것에 비하면 의아한 점이다. 아마도 그의 친일경력 논란에 대한 부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청마는 자신의 시에서 생명과 자아, 시대상황으로 인한 무력감과 허무주의를 드러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그의 시 작품 세계는 시대에 따라 변해갔지만 전반적으로는 주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자신을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라고 했었다. 그가 생각한 시인이란 무엇일까? 시인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을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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