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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전읽기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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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며, 우리가 쓰는 글은 가장 불확실한 미학적 관조의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완전하니,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석양이나 더이상 고요한 졸음을 가져다줄 수 없는 산들바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각상과 산을 똑같이 관조하는 자로서 지나가는 날들을 독서하듯 즐기며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본질로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꿈꾸는 우리는, 한번 완성되고 나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예전에 있었던 일인 양 즐길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리는 분석과 묘사를 늘어놓을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평론가다. 그는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주로 리스본에서 살다가 1935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생전에 그가 남긴 작품은 많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는 편이라 그리 존재감은 없는 편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그의 사후에 발견된 원고 더미 때문이다. 수십만 장에 이르는 미발간 원고가 수십 명에 이르는 다른 이름(異名)으로 작성돼 있었던 것이다.


<불안의 책> 역시 그중의 한 작품인데, 원래는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저자는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직업은 회계사무소에서 일하는 회계사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며 책의 내용 역시 허구의 것이다. 머리말에서는 작중의 화자인 소아르스 역시 글쓰기를 좋아하며, 책을 내려고 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페소아가 소아르스라는 사람이 쓴 글의 출판을 도와주며 머리말을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작품이 페소아가 쓴 것이라는 것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가 워낙 많은 이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페소아의 모습을 가장 많이 반영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소아르스를 페소아의 '반이명(半異名)'이라고도 한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정신 상태이기에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길 때 가치 있는 것이고, 가치 평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몽상가는 지폐를 발행하는 사람이고, 그 지폐는 현실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그의 정신세계에 있는 도시에서 통용된다. 인생의 인위적인 연금술로 만들 수 있는 금은 없다. 그러니 내 영혼이 발행한 지폐를 금과 교환할 수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우리 이후에 대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끝장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나간 다음의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문학은 인생을 무시하는 가장 유쾌한 방식이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고, 미술은 기운을 북돋고, 연극이나 무용 같은 행위 예술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문학은 잠에 빠지듯 인생에서 멀어지게 한다. 다른 예술의 경우, 어떤 것은 눈에 보이는데다 살아 있는 형식을 사용하고 또 어떤 것은 인간의 삶 자체를 살아가기에 인생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은 그렇지 않다. 문학은 인생을 모방한다. 소설은 일어난 적 없는 이야기이고, 희곡은 내레이션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하는 생각과 느낌이다. 운율을 맞춰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책은 페소아의 사후 47년 후인 1982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작성된 시기는 1910년대 초반부터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라고 추정한다.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거의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앞부분과 뒷부분의 시간차가 약간 느껴지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동질성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보였다.


이는 이 책이 시간의 흐름, 혹은 사건에 따라 나열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하는 대로 쓴 것들의 모음이기 때문이다. 총 481개에 달하는 그의 단상, 혹은 아포리즘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제목이 <불안의 책>이라고 해서 꼭 불안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나 '불안'이기에, 그러한 정서를 배경으로 놓고 읽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이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악명이 높아서 (분량도 많고, 난해하다고 해서)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했다. 갖고 있는 책이니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북클럽문학동네 7기에 가입하면서, 연속 가입 혜택으로 받은 것이었다. 전자책으로 된 문학동네세계문학 몇 권 중에서 골라 신청할 수 있었는데, 이미 갖고 있거나 읽은 책을 제외하니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관심이 있었던 책이라 다행이었다.


이 책은 포르투갈어 원본을 완역한 것이라서 기존에 나온 영문판 번역본 보다는 좀 더 원문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번역의 질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번역이란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간혹 애매하거나 의아한 문장이 있기는 했지만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공허함이 깊어진 끝에 꽉 찬 긍정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흔히 성인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인물들은 행동하는 사람으로, 감정의 일부만이 아닌 모든 감정을 품은 채로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감정은 그들을 무한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들은 밤과 별빛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침묵과 고독의 성유聖油를 스스로에게 붓는다. 한편 초라하게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인물들은 위대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정은 우리를 무한소無限小로 데려간다. 감정이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나서 그 속의 느슨한 가짜 지속성이 모공을 드러낸다.




분량이 종이책 기준 616페이지라 좀 많은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 정도면 그렇게 부담이 되는 분량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용도 우려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제목이 <불안의 책>이라서, 우울하고 염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예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글들도 많았다. 그래서인가 공감을 많이 했고, 하이라이트도 많이 그었다.


무엇보다, 작중 주인공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그랬을까, 작가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되었으며, 생각도 많아졌다. 영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위안은 되었다.


이는 아마 작가 스스로 가졌던 고민과 걱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감 - 현실과 미래에 대한 - 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때론 너무 솔직한 글에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그러한 솔직함이 이 책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해 준다.


시간을 낭비하는 방식에도 미학이 있다. 감각이 예리한 이들을 위한 무력화 안내서가 있으니, 여기에는 온갖 형식의 명석함을 무력화하는 처방전도 있다. 사회 관습에 대항하고, 본능의 충동에 맞서고, 감정의 요구에 대적해 싸우는 전략은 보통 미학자들로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연구를 필요로 한다. 양심의 가책에 대한 면밀한 병인학病因學이 필요하고, 정상적인 것을 추종하는 성향에 대한 역설적인 진단을 내려야 한다. 또한 삶의 개입에 대처하는 기민함을 키워야 한다. 다른 이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스스로 무장하는 신중함이 필요하고, 다른 이들과 공존할 경우 들이닥칠 소리 없는 기습에 대비해 말랑한 무관심으로 영혼을 둘러싸야 한다.




사실 나는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터라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그래서 머리말 및 책의 앞부분을 볼 때까지도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계속 그런 식으로 이어지길래 그제야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에세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에세이로 보기에도 애매하다. 수상록(隨想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수상록'이 'Essay'로 번역되지만) 뭔가 그러기엔 깊이가 부족한 것 같다. 철학적 사색, 이성적 고찰이 있다고 해도 박식함보다는 사춘기 소년의 허세가 더 느껴질 수도 있다.


그가 20여 년에 걸쳐 쓴 이 글은 그의 일기 같기도 하고, 낙서 같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거창한 철학적 논의 보다는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 단상들이 주를 이룬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과정은 거창하진 않지만 독창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선물했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해줬다. 인간은 강물이나 호수에만 자기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었다. 게다가 취하는 자세 역시 상징적이다. 자신의 얼굴을 본다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했다. 거울을 발명한 자는 인간의 영혼에게 독약을 준 것이다.


100여 년 전에도 SNS가 있었다면, 혹은 블로그나 브런치스토리와 같은 글쓰기 플랫폼이 있었다면, 이 책에 나온 글들은 딱 그 정도 수준의 것들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인상은 장단점이 있었는데, 장점은 생각보다는 읽기가 용이했으며 공감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상(雜想)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이 읽었으니 작가의 유명세에 의한 후광효과도 없었다. 즉,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 없이 단지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나는 공감을 많이 했으며 그의 진솔함에 매력을 느꼈다. 가끔은 엉뚱하거나 헛웃음이 날 정도로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진지한 그의 글에 빠져든 것이다. 그의 내면세계에서 계속 터져 나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따라가며, 그의 심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스토리나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도 아니며, 주제별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가? 골라서 읽기도 애매하니 그냥 순서대로 읽을 수밖에. 각각의 글들은 흩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모여 하나의 책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그 생각의 연결이 생각보다 단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고독하다. 그러나 고독을 인정하고 고독을 즐긴다. 그는 불안을 느끼지만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불확실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작가로서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안, 존재의 의미에 대한 끝없는 의심, 그리고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회의와 비관, 냉소로 가득한 책이고, 때론 독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억지스럽거나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글 속에 담긴 아름다움 때문이다. 역설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완전한 어둠은 아니다. 그는 그 속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 때문이다. 또한 독자에게도 위안을 준다. 그 불안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여느 잡문과 차별성을 가질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모습은 정형화되지 않고 계속 바뀐다. 앞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뒤에서는 부정하고 다시 만들어 낸다. 페소아가 자신의 여러 모습을 만들어 냈고, 그것을 여러 이명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이 작품 내에서도 그의 여러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의미처럼. 여러 유령들이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의 내용은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그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이 결국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밑바닥에는 존재, 실존의 문제가 있다.


우리의 활동 중 우월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모두 죽음의 일부이거나 죽음 자체다.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고백을 빼고 나면 이상理想은 대체 무엇일까? 예술이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던가? 조각상은 부패하지 않는 재료로 죽음을 고정하기 위해 깎아놓은 죽은 육체다. 쾌락이라는 것은 얼핏 보기에 삶 속으로 깊이 몰두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 안으로 몰두하는 것이고, 우리와 삶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며, 죽음의 흥분해서 들뜬 그림자다.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 삶을 하루 더 사는 것은 바로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속에 서식한다. 우리는 집과 관습, 관념과 사상, 철학이라는 나무들이 우거진 불가능한 숲 사이를 배회하는 그림자다.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나는 어제 살았던 것, 어제 살았던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이다. 같은 신문에 실었던 어제의 오보를 정정하는 오늘의 뉴스야말로 인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룬 무엇인가를 원했던 사람은 그럴 능력을 가지기 전에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욕망으로 인해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이루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기본 원리다.




그런데 왜 출판되는데 그의 사후 거의 반 세기가 걸렸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대두되어 한창 꽃 피울 시기에 이 책이 나왔더라면 더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의 미발표 원고 정리가 미처 다 못된 탓일까.


아직도 그의 미발표 원고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러한 연구와 평가가 과연 언제쯤 다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해가 그의 사후 90년이 되는 해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신기한 작가의 신기한 작품이었다. 다른 이에게 추천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추천한다'라고 답하겠다. 평가는 각자가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단 읽어봐야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는 삶에 대한 정답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의문으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다. 그는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독자 스스로 찾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했던 방법이니까. 그러한 과정을 견딜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즐겁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괴로운 독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리 겁낼 필요는 없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재밌을 테니까.


그리움! 심지어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에까지 그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시간이 도망가버려 고통스럽고, 삶의 불가사의가 아프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찾는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던 사람들, 그들을 못 보게 된다면 나는 슬플 것이다. 그들은 그저 모든 삶의 상징이었을 뿐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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