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고전읽기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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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었다. <싯다르타>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번에는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예전에 구매해 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전자책 50권 세트 중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에 대한 평이 좋아서 추천하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아주 오래전에 읽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이후였으니 아마도 중2에서 고1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아마 부처의 삶을 다룬 책이라 생각하고 집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아니라는 건 읽자마자 알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다시 읽으며 ‘아니, 이런 장면도 있었나?’ 싶은 순간이 많았다. 애초에 내가 내용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원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 신자인 부모님 덕에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매주 절에 다녔기에 불교 교리에 익숙하다. 석가모니의 생애나 전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기독교에 심취해 열심히 교회에 나가며 교리를 파고들었고(성경도 통독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여자친구가 성당에 다녀서 1년 정도 함께 성당을 다녔다. 헤어지고 나선 군대에서 다시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지금은 무교다. 종교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의 원래 이름이 ‘싯다르타 고타마’인 것은 다들 알 것이다. 헤세는 이를 ‘싯다르타’와 ‘고타마’라는 두 인물로 분리했다. 고타마는 이미 완성된 세존으로, 싯다르타는 방황하는 구도자로 그려졌지만 사실 두 사람이 별개의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삶을 반대로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설은 '브라만-고행-쾌락-깨달음' 순이지만, 실제 부처는 '왕자-풍요-고행-깨달음' 순이다.)


그런데 2부부터의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읽으면서 다소 당황스러웠다. 싯다르타가 갑자기 타락했다가 또 갑자기 마음을 다잡는 전개가 개연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반전을 주기 위한 과한 설정 같았달까. 갑작스러운 아들의 등장도 싯다르타의 번뇌를 부각하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였다.


물론, 살면서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싯다르타의 경우에는 카말라도 늙을 것이라는 자각과, 꿈속에서 본 새의 죽음이 그런 계기였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고집멸도’라는 핵심적인 사상(사성제)으로 표현하는데, 이후 싯다르타의 행보와 깨달음은 그러한 사성제와 달라지면서 기존 불교 사상과의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3부에서 ‘강으로부터 듣고 배운다’는 건 도교 사상의 반영으로 보이고, 고빈다와 대화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기독교적이다. 또한, 고타마(부처)의 말이 성경의 구약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싯다르타의 말은 성경의 신약과 비슷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액면 그대로의 비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빈다는 유대교 율법주의자 또는 바리새인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교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르다. (불교가 힌두교에서 갈라져 나왔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힌두교가 구약의 율법적 위치, 불교가 신약적 위치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엄밀하게는 힌두교에 대한 부정일 테지만.) 그러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힌두교 브라만 출신인 싯다르타가 두 단계(힌두교-불교)를 넘어서는 것은, 훗날 불교가 초기불교(부처의 말씀과 주어진 수행을 따름)가 아닌 대승불교, 즉 참선을 통한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고빈다에게 싯다르타의 말이 선문답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을까?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마지막 고빈다와의 대화를 통해(그리고 중간중간 몇 개의 장에서) 드러난다. 돌멩이의 비유, 시간의 환상, 그리고 마지막 싯다르타의 미소 등은 헤세가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리라. 어려서부터 다양한 종교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것들도 불교 교리와는 좀 다르다. 윤회를 벗어나고 업(카르마)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점에서는 상통하지만,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단순한 열반(니르바나)과는 또 다르다. 불교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온전히 불교적인 내용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싯다르타가 강조한 사랑은 ‘범신론적 사랑’이었다.


책 자체가 여러 종교(불교, 힌두교, 기독교, 도교, 범신론 등)가 뒤섞여 나오다 보니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삶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덧붙여, 내가 불교, 기독교(개신교), 천주교를 접하고 나서 현재 아무 종교도 없는 까닭은 그들 종교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그 종교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나는 각 종교를 인정한다. 지금도 가끔 절에 가고,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에도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종교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것, 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라 정답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종교를 보험과 같다고 본다. 실손보험이든 보장보험이든 생명보험이든, 보험에 가입하면 뭔가 든든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는 것처럼, 종교도 무언가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 믿음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범신론에 가까운 편이다. 천지를 창조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세상과 우주의 작은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의미가 곧 ‘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 그리고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절대자를 상정하는 것이 아닌, 관계에 의미를 두며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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