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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를 쓰고 싶을 때까지

그때 나는 왜 시를 쓰고 싶었나

by 칼란드리아

시를 마지막으로 써 본 것이 언제였더라? 고1 때부터 대학교 4학년때까지는 썼던 것 같은데 대학원 가서는 썼었나?


대학원 때나 일 시작했을 무렵까지 습작 소설 몇 편을 썼던 것 같지만 시를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시를 계속 썼던 시기는 약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구나. 그래도 대략 300편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 시들은 따로 정리해 두기는 했는데, 공식적으로 어디에 출품한 적은 없었다. 다만,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일부를 온/오프라인으로 공개했었고, 개인 소장용으로 꾸준히 '시모음집'을 수작업으로 만들었었다.


당시 쓴 시를 보면, 마치 일기처럼 나의 생각과 감성을 많이 담고 있다. 또한 미숙하나마 나의 '시론'도 몇 번 정리했었는데, 지금 그 시들을 읽어보아도 '그때의 나는 참 순수했었구나'라고 느껴진다.


공교롭게도 시를 집중적으로 썼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나의 1990년대가 크게 네 시기(고등학생-대학 초반-군대-대학 후반)로 구분되는 것처럼, 각 시기에 쓴 시들도 차이가 난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도 수양록에 시를 썼다.


시는 나의 방황의 흔적이자 고민의 결과물이었고, 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투쟁의 수단이기도 했다. 나의 도피처였고, 인간과 사랑에 회의적이면서도 때론 사랑을 노래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 혼란했던 시기의 침전물 같은 것.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마치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시는 무엇일까? 나는 왜 시에 대한 미련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일까? 시인들이란 어떤 사람인가?


작년과 올해, 약 100여 권의 시집에서 수 천 편의 시를 읽었고, 여러 시인들의 평전을 읽었다. 또한 관련된 논문도 수십 편은 본 것 같다. 시인들의 삶과 그들이 추구했던 것을 보며,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내가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또한 문예창작을 공부하며, <시론>과 <시창작 이론>을 배웠는데, 시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예전에 썼던 것은 시였나, 낙서였나.


나는 정식으로 (등단하는) 시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시인이라고 불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차오를 때, 나는 나의 안에서 밖으로 그 시어들을 밀어낼 것이다.


메마른 우물을 억지로 퍼내기보다는 차오르기를 기다린다고 변명을 해 보지만, 그런 때가 올까? 예전만큼의 열정과 간절함이 부족하지만, 고목에 싹이 돋듯, 내게도 그런 날이 다시 올까.




* 30여 년 전에 내가 썼던 글. 미숙하나마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볼 수 있기에 그대로 옮겨와 본다.


지금은 시의 범람으로 인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시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시대이다. 사람들도 많이 배웠고, 시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서 모방 심리에서, 아니면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에 의해 몇 자 글을 적는 것만으로도 시라고 우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출판사에서 개인이 만든 시들을 책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시가 활자화 되어 나오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시를 무척 쓰기 쉬운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시는 쓰기 쉬운 장르일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시는 압축을 그 최대의 특징으로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내는, 상당히 제약이 많은 장르이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시들을 보면 대부분 유행가 가사 같이 직접적이어서 가슴에 와닿는 시를 찾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하여 몇십 년 전의 시인들의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은 유행가를 부르고 싶은데, 성악을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마치 방송국에서 쏘아 보내는 전파와 같다. 음성을 전파에 실어 보내면 우리는 그 전파를 받아 음성 만을 뽑게 된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음성이다. 전파는 음성을 우리에게 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파에 너무 얽매여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그 전파 만을 배우는 것이다. 즉 음성이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음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음성 없이, 아무런 목적 없이 쓰인 시는 정말 무의미하다. 왜 시를 쓰는가 하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런 것이 있을 때 정말 시는 시 다뤄질 것이다.


억지로 무슨 메시지나 전달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가 목적시가 되면 사람들은 잘 읽지 않으려 할 것이고, 비평가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 시를 쓰고 싶었다면, 그것도 시집을 내고 싶었다면 왜 자신이 시집을 내어야만 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시에서 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이 시집을 내어야 했는지, 그 시집을 선택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 시집을 구입하였을 수도 있고, 단순히 백개 남짓의 시 중에서 몇 개가 맘에 들어 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여 수많은 시집이 꽂혀 있는 서가에 자신의 시집을 얹는다면 그것은 책장의 무게나 더 나가게 할 밖에 다른 의미는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시집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지만 요즘의 시집 몇 권을 읽어보았다. 그러한 시집의 저자 중 다수는 스무 살 안팎의 감성에 민감한 남학생들 또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진을 멋있게 찍어 소감과 함께 자신의 시집을 펼치도록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시집 머리말은 대부분 "내가 낙서처럼 적어 오던 시들이 이렇게 번듯하게 한 권의 시가 되어 나올 줄은 몰랐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낙서처럼 적어 오던 시들. 그럼 그런 시집을 읽을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아 남의 낙서나 보고 있는다는 소린가? 그런 시들은 대부분 대동소위 하고, 소재도 한정이 되어있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그러한 학생들(학생일지는 모르지만)이 비슷한 시를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지금은 시는 시간 남는 사람의, 그리고 튀고 싶어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듯하다. 시의 대중화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문화 대중화 현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대부분의 분야에 있어 문화 대중화는, 대중에게는 환영을 받지만 전문가들이나 좀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원래 그 부분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상당히 거부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시의 범람도 그러한 문화 대중화 현상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시를 썼는가? 사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도 시 답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가를 계속 써나가면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 역시 문화 대중화 현상의 하나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시들도 앞의 예와 같은 무리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들에 대해 한마디 변명을 던지고자 한다.


나의 시들은 사람들이 주로 다루는 보이기 식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단어의 나열을 지양하고, 좀 더 진실된 시들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보는 사람은 나의 시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쉬운 시들에 익숙해져 온 탓도 크겠지만, 내가 시를 너무 못 쓴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도 계속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인가 내가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쓴 시들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지금 보면 아주 억지로 쓴 시들, 정말 말 그대로 쉽게 쓰인 시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뭐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을 계속 지양하려 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있어 시는 단순히 머리 식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였을 수도, 어설픈 사랑에 위안을 찾는 숙맥들에게 몇 자 와닿는 그런 식의 시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 오늘날 시의 범람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시는 유행가 가사와는 다르다. 시는 시이고, 유행가는 유행가이다. 시에 곡을 붙이면 노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에 곡을 붙여서 유행가가 되고 마는 것은 유행가 가사를 적어 파는 것보다도 못할 것이다.


시는 현대인들에게 위안도, 고민에 대한 해답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들도 주어야 하며, 시 만의 특징을 가져야 한다. 만일 시가 시로서의 특징을 잃는다면 시라는 장르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앞으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시들을 쓸 계획이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들을 쓸 계획이다. 나만의 목소리가 있듯이, 나만의 시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시인이 되겠다거나 나의 시들이 책으로 만들어져 팔리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 또 내가 어떠한 목소리를 담으려고 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몇 권의 시모음집 만을 기회가 된다면 계속 만들 것이다.


199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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