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7

7장 권리 혁명

by 칼란드리아
XL.jpg


7장 권리 혁명

시민권, 그리고 린치와 인종적 포그롬의 감소
여성의 권리, 그리고 강간과 구타의 감소
아동의 권리, 그리고 영아 살해, 체벌, 아동 학대, 집단 괴롭힘의 감소
동성애자의 권리, 그리고 동성애자 박해와 동성애의 탈범죄화
동물권, 그리고 동물에 대한 잔인한 행위의 감소
권리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역사에서 심리로


7장의 제목은 '권리 혁명'입니다. 6장까지는 전쟁, 테러, 집단 살해 등 극단적이고 거시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았는데요, 7장에서는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명백하게 보였지만) 우리의 생활에 숨어 있는, 은밀한 폭력의 양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시민권의 맥락에서 인종, 성별, 아동, 그리고 소수자들의 권리가 어떻게 달라져 왔고 그들에 대한 폭력도 어떻게 감소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그랬듯이 각 장의 서두는 그 장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이번장은 핑커가 어렸을 때의 'dodgeball (피구?)' 얘기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육시간에 피구를 많이 했는데요, 미국에서는 이제 피구를 금지시키고 있나 봅니다. 이러한 모의 폭력이 인간의 폭력성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폭력을 제한하고 감소시키려는 공동의 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등 다양한 권리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를 '권리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세기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운동은 개인의 권리 개념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권 운동은 다양한 인종 집단의 권리를 확대하고 주류 문화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린치나 포그롬 등 극단적인 형태의 인종 폭력이 감소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폭력은 한때 흔한 일이었지만, 특히 서구권에서 현저히 감소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종 간 결혼, 학교 통합 등 인종 문제에 대한 대중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는 인종 차별적 신념이 감소하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이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강간과 인종 폭력을 재산 범죄나 경범죄로 보는 시각에서 개인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인식하는 법적, 사회적 시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폭력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고 인권에 대한 강조가 높아진 데 기인합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에 영향을 받은 서구 문화는 종교적 편협성이 감소하고 비인간적인 신념에 대한 낙인이 찍히는 등 크게 변화했습니다.


그럼 각 소제목별로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게요~




시민권, 그리고 린치와 인종적 포그롬의 감소


소제목에서 '린치'와 '포그롬'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요, 린치는 많이 들어본 단어라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는데 단순히 폭력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행하는 처벌'을 의미한다는군요. 특히나 '사사롭게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네요. '포그롬'은 러시아어로 '집단 살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특히 특정 인종, 집단을 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제목으로부터 예전에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시절에는 재산으로 취급해서 주인 마음대로 처벌했던 것과 이후에 흑인들에 대한 살해, 테러 등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함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이 글에서는 미국과 다른 서방 국가에서 시민권의 진화, 인종에 의한 폭력의 감소, 인종과 민족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핑커는 먼저 미국 역사에서 벌어진 끔찍한 린치,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젠 흑인이라는 단어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런 표현을 쓰고 있긴 하죠. 여기서는 그냥 흑인이라고 할게요)에 대한 린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린치는 일종의 인종적 테러였으며, 종종 미디어를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서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러한 공포가 부활했지만, 린치가 줄어든 반면 좀 더 일반적인 형태의 폭력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의 이른바 인종 폭동은 이전의 폭동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폭동의 표적이 아니라 폭동의 주동자가 된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것은 마틴 루터 킹 등의 주도로 평화적인 운동도 있었지만 폭력을 동반한 운동도 있었죠. 그 모두가 흑인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요, 그러한 노력의 결과 흑인들의 권리도 더 많아졌습니다. 또한 흑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도 감소했습니다. 이는 인종 차별에 대한 내러티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거버넌스 개선과 폭력에 대한 혐오감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흑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에 대해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이나 유럽 등 백인들이 주류인 사회에서는 흑인, 동양인 등 소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많았었죠.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인종에 따른 정치적 차별이 감소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그러한 차별이 감소한 통계를 제시하였고, 역사적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차별 철폐 정책 및 기타 정책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인종 간 결혼과 학교 내 통합에 대한 수용이 증가하면서 수십 년 동안 인종과 민족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백인 미국인들의 편견이 현저히 감소하고 종교적 관용이 눈에 띄게 증가했음을 얘기합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서구 문화를 변화시켰으며, 여론조사 수치를 넘어 정부, 스포츠,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 유색인종들도 많이 있다는 것도 상징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종차별이 지속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인종적 적대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회과학에서 환경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타고난 인간 특성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빈 서판> 얘기를 다시 인용했네요)




여성의 권리, 그리고 강간과 구타의 감소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이 부분에서는 심적 불편함을 느끼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성분들과 여성분들은 아마 다른 이유로 그러한 불편함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핑커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강간과 가정 폭력의 감소에 초점을 맞춰 여성 인권의 역사적 맥락, 진화, 현재 상태에 대해 설명합니다.


강간은 고통과 수치심,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인류 역사상 흔한 잔혹 행위로 묘사됩니다. 역사적으로 법 체계는 강간을 여성 자신보다는 남성 보호자나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하여 피해자의 관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간이 인간 진화에 따른 유전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진화론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강간범, 여성의 가족, 여성 자신과 관련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기 다른 진화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납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여겨지게 했으니까요. 대부분의 분들이 동의하시겠지만,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이죠.


역사적으로 강간은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하기보다는 재산 범죄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의 고통과 번영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가 부상하면서 비로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와 20세기의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성 권리가 강조됩니다. 19세기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과 1970년대의 두 번째 물결은 강간에 관한 법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대중문화와 법률 체계에서 강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 됩니다. 피해자의 관점이 부각되면서 강간은 이제 개인에 대한 범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가정 폭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 그 양상과 법적 처리, 사회적 태도의 변화에 대해 논의합니다. 가정 폭력 역시 감소하는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특히 서구 국가들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많은 국가들이 여전히 여성 폭력에 대한 법적 개혁과 사회적 태도가 뒤처져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민주주의나 경제력과는 관련이 없기도 한데 특히 우리나라나 동양권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도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용인되어 왔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딱히 부연설명을 안 해도 알 수 있겠지만요.


그는 수십 년 동안 강간과 가정 폭력의 비율이 크게 감소했다는 통계적 증거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감소가 페미니즘 운동과 사회적 태도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하였는데요, 또한 여성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남녀평등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태도 변화가 이러한 감소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국제적 합의와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폭력의 감소에 초점을 맞춰서인지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다른 형태의 폭력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즉,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감소해 왔다는 것만 보여주려 한 것 같아요.


여러 노력에 의해 그러한 폭력들이 감소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걸림돌들이 많으며 사회적, 법률적 문제들은 남아 있습니다. 더 은밀하고, 더 잔혹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요. 물론 그러한 것들도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도 불과 수십 년, 길어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일어난 것들이니까요.


그러한 변화들은 서로 맞물려 있고, 그 시기동안에 같이 나타난 것은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계몽주의, 인본주의 등 사상적 바탕이 있었고 그러한 것들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왔으며 사람들의 인식도 변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예전에는 당연시됐던 것들이 지금은 금지되었거나 경악할만하게 된 것들도 많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마음 한편에는 뭔가 씁쓸함도 남습니다.




아동의 권리, 그리고 영아 살해, 체벌, 아동 학대, 집단 괴롭힘의 감소


사실 저 소제목에 내용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영아 살해, 매질, 아동 학대, 집단 따돌림의 감소에 초점을 맞춰 아동 권리의 진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역시나 내용이 꽤 많고 역사적인 서사 그리고 통계 데이터들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한 것들도 결국엔 다 감소해 왔다는 것이죠.


하지만 읽기에 꽤 불편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영아 살해나 아동 학대, 체벌에 대한 묘사에서는 더 그랬는데요, 중세시대의 경우에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것들이 많았네요. 대체 중세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요?


여담으로, 저는 이번 주 분량을 읽으면서 필립 아리에스가 쓴 <아동의 탄생>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아동'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발명(!)된 것이며, 아동을 대하는 인식도 많이 변해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사회에서 아동에 대한 대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이고, 또 아이들에 대한 교육제도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를 프랑스(더 정확하게는 앙시엥 레짐 시대)를 중심으로 보여주었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지만 사실 제목에 좀 낚인 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아요. ^^;;


그리고 제니퍼 시니어의 <부모로 산다는 것>에서 언급된 내용도 생각나는데요, 이 책의 초반부에서는 어린이가 어떻게 현재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거든요. 저는 그 부분의 내용도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네요.


사실 저도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서 및 관련된 책들을 많이 보았지만 국내와 외국의 정서와 문화, 가치관이 많이 다르기에 좀 혼란스럽긴 했습니다. 그리고 실용서와 학술서의 지향점도 많이 다르고요. 어쨌거나 확실한 건 육아와 교육은 정말 힘들다는 점이었어요.


인류학자 라일라 윌리엄슨의 조사에 따르면 영아 살해는 전 세계적으로 흔한 관행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상당수의 아기가 출생 후 살해되었는데, 이는 진화 생물학과 생명사 이론의 영향을 받은 생존 전략의 일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분류 이론'은 신생아의 생존 가능성이 낮으면 산모가 신생아를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의 연구는 이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영아 살해는 성 편견과 같은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특히 여성 영아 살해가 만연한 아시아에서 전 세계적인 여성 부족 현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아살해의 편재성과 진화론적 명료성은 영아살해가 명백히 비인간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무자비한 살인의 한 형태가 아니라 특별한 폭력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과거 고단한 삶에 적용되었던 가혹한 진화 논리를 인정하더라도, 영아 살해 중 상당수는 우리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구에서는 점차 영아 살해를 범죄 화하였으며, 인간 생명에 대한 금기, 도덕적 문제 등으로 인해 확연하게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영아 살해에 대한 수용에서 혐오로 전환되었죠.


임신 중지 (혹은 임신 중절, 낙태)의 경우에는 이것을 폭력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미 사회적인 논란이기도 하고요. 도덕적인 측면을 떠나 임신 중지에 대한 인식 또한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임신 중지가 널리 허용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아동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더 상상했으며, 다른 종류의 폭력 발생률도 감소했다고 하는군요.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동학대 측면에서는 가혹한 체벌과 심리적 고문을 포함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처벌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트리버스는 '부모-자식 갈등 이론'으로 그러한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동학대와 체벌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체벌의 경우에는 효과도 없지만 아이를 폭력적으로 만들어 사회적 폭력성을 야기할 거라는 얘기도 있고요.


계몽주의 시대에는 존 로크와 루소 같은 사상가들이 자녀 양육에 대한 보다 온화한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최근 아동 학대가 감소하는 것은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법이 바뀌면서 아동의 권리가 보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크나 루소는 정작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죠. 남들에게 말하기는 쉬워도 자기 자식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게 부모들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신뢰가 안 가는 측면도 있어요.


현재는 여러 가지 공공기관 혹은 사설기관을 통해 아동 학대를 감시하고 있으며 예방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도적, 사회적으로 관리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고요.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의 체벌도 점차 감소하고 있기는 한데요, 교사들에 의한 체벌이 어느 정도 허용이 돼야 하는 가도 역시 사회적 이슈죠. 작년에 공교육 및 교사들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요, 이는 그동안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터져 나온 듯해요. 물론 이 책에서는 폭력의 감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과연 아이들에겐 어느 정도의 훈육과 체벌이 필요한가라는 고민은 끝이 나질 않네요.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도,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러한 영아 살해와 아동학대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 이외에도 아동에 대한 폭력은 여러 가지가 더 있는데요 그것은 폭력을 행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구분해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아동들 간의 폭력을 보면 우선 왕따 또는 집단 따돌림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어린 시절의 정상적인 일부로 치부되던 아동 간 괴롭힘은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괴롭힘에 대한 심리적, 도덕적 논쟁이 활발해지면서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죠. 또래들 사이에서도 위계를 형성하고 지배-피지배 구조를 고착화하려는 것이 과연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요, 이러한 것은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개성의 탄성>과 <양육 가설>에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이 두 책은 자주 추천하긴 했었는데 이번 주에 '양육 가설'에 대한 내용이 나와서 반갑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와 스티븐 핑커는 서로 동료지간이라 (핑커가 해리스의 지원군이지만, 해리스의 지병으로 인해 거동이 쉽지 않아 실제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온라인상으로만 얘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핑커가 해리스의 이론을 소개한 것 같기도 합니다. 더불어 '빈 서판' 이론에 대한 비판도 자주 나오는 것 같네요.


전반적으로는 어린이를 소유물로 보는 시각에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태도가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동에 대한 폭력의 현저한 감소로 이어졌지만, 현대 사회에서 낙태와 아동 과보호에 대한 논란과 같은 논쟁과 도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동의 생명과 권리에 대한 관심과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도덕적 진전이지만, 안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부조리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저 어릴 때 생각하면 완전 구시대 사람 취급 당하기도 하니까요.


특히 요즘 부모들의 아동에 대한 과보호와 이기주의는 극단적인 결과도 야기하고 있네요. 그러한 것이 사회적인 변화 혹은 트렌드의 변화라고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엔 그 모든 것이 인과관계를 낳고 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될 텐데요.


마지막으로 유괴에 대한 것도 잠깐 언급이 되었는데 유괴는 통계를 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감소했는지 어땠는지는 명확하게는 모르겠네요. 지금도 뉴스에서는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과장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이렇게 이번 주 분량도 살펴보았습니다. 읽으면서, 예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도 떠올랐고 이번에도 그랬는데요, 계속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이 더 기억에 남게 되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핑커도 꽤나 가학적인 것 같아요...


이후의 대부분의 내용은 동성애자에 대한 것과 동물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고, 이어 7장 전체에 대한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동성애자의 권리, 그리고 동성애자 박해와 동성애의 탈범죄화


이 파트에서는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역사적, 현대적 관점, 동성애자 혐오의 쇠퇴, 동성애의 비범죄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동성애는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인 이유로 불법 또는 금기였지만 그럼에도 성행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레즈비언의 어원이 된 사포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리스 신화에서도 상당 부분 나오니까요.


그러한 동성애에 대해서는 성경의 레위기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며, 그러한 종교적, 법률적 범죄화로 인해 동성애자는 투옥, 고문, 사형, 살해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근현대에서도 앨런 튜링이나 오스카 와일드 등이 동성애로 사형을 선고받았죠. 다양한 사회에서 동성애는 종종 적대감에 직면하며, 특히 전통 사회에서는 지금도 대체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담으로 앨런 튜링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발각된 과정이 참 안타깝습니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모르는 상대와 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집에서 관계를 가졌던 한 남성이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시계를 훔쳐 달아났어요. 그래서 튜링은 그걸 경찰에 신고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는 결국 사형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튜링은 천재 수학자이자 업적도 많았기에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듭니다.


그런데 진화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합니다. 생식과 무관하기에 동성애를 발현하는 유전자는 모두 소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것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타고난 본성(선천적)이라는 것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간 동성애보다 남성간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더 많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갖는 이유는 성교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여성간 보다 남성 간에서 그러한 방식에 대한 혐오감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관습이나 종교에 기반한 도덕적 개념을 재평가했습니다. 제레미 벤담은 동성애 행위가 누구도 더 나쁘게 만들지 않으므로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죠. 또한 프랑스혁명 이후로 프랑스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동성애가 합법화되었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은 1970년대와 1990년대에 인권이라는 이상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현재 동성애는 약 120개국에서 합법화되었지만, 아프리카, 카리브해, 오세아니아,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약 80개국에서 여전히 불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권 단체들은 보편적으로 동성애를 범죄 화하는 것을 인권 침해로 간주합니다.


미국에서는 1970~80년대에 동성애에 대한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는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의 성과, 유명인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동성애가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가시화되면서 비밀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커밍 아웃이라는 말도 일반화되었죠. 다양한 통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관용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성향에 따라 차이가 보이기는 합니다.


또한 많은 미국의 여러 주와 국가에서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증오 범죄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관용이 증가하고 반동성애 폭력에 대한 관용이 감소하고 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했으나 아직 사회적으로 많은 반대에 부딪혀 (반대 이유가 더 끔찍하게 생각되지만) 법제화되지는 못했네요.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친숙도는 수용성과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젊은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더 수용적이며, 저자는 이러한 경향이 진정한 세대 변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계층이 나이가 들면 현재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도 많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도와 법률이 변화했지만 이것이 동성애 혐오 폭력의 감소로 이어졌는지는 불분명합니다. 1996년 이후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주요 증오 범죄의 발생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니까요. 사실 사회적인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동성애를 종교적, 문화적인 이유로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은 있죠.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 대해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인데 아직은 그러한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도 동성애자를 박해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진전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기에서는 주로 미국과 서구 국가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아시아권,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얘기는 없는데요,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마 잘 아실 듯합니다. 20여 년 전에 홍석천 씨가 방송에서 의도치 않게 커밍 아웃을 할 때만 해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훨씬 더 심했는데 지금은 그러한 것들도 많이 받아들여진 것 같고, 이후로 커밍 아웃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죠. 그리고 동성애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 미디어 작품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현재 국내외 문학 작품 중에는 동성애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들이 꽤 많고, 심지어 하나의 장르 문학을 이루고 있기도 하니까요.


다만 개개인별로 그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이자 권리이므로 뭐가 됐든 다른 이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물권, 그리고 동물에 대한 잔인한 행위의 감소


이 파트에서는 동물 권리의 발전과 동물 학대의 감소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핑커는 자신의 대학원 시절 쥐 실험의 끔찍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동물 학대가 과거에 흔히 행해졌던 관행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그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동물 복지에 대한 과학계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동물실험을 위해선 기관 내 동물실험윤리위원회(IACUC)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건 현재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이제 실험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동물 복지에 대한 무관심은 이제 동료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죠. 실험동물 처우에 대한 변화는 또 다른 인권 혁명의 일환이며, 동물에게 부당한 고통과 부상, 죽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커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이익에 대한 인식은 공감과 이성, 그리고 다른 권리 혁명의 영감에 감동한 인간 옹호자들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을 죽였습니다. 진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으로도 육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동물의 복지는 인간의 우선순위에서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고대에서부터 동물 처우에 대한 도적적 규범은 있었다고 하네요. 그것이 현재의 기준에서 보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싶지만요. 그래도 동물에 대한 인식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개선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나 계몽주의 시대의 데카르트의 인식의 한계도 명확해 보입니다. 여기서도 대차게 까이는 데카르트네요. ㅋ 현재의 신경과학과 진화론에서는 보다 인도적인 관점으로 동물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어 공장식 축산과 거세, 낙인찍기, 피어싱, 귀와 꼬리 자르기 등 수 세기 동안 농장에서 흔히 행해진진 비인도적인 관행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은 20세기의 현상이 아니라고 하는군요.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었다는 것이 뜻밖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려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 동기가 동물의 내면에 대한 공감적 관심에서 비롯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그것을 금기시하거나 금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요. 참고로 여기에서도 언급된 마빈 해리스 이야기는 그의 저서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나온 내용인데요, 제가 이 책을 몇 번 추천한 적이 있는데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어요.


르네상스 이후로 도덕적, 건강, 환경적 이유 등 채식주의와 동물권 운동들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다빈치가 채식주의자라는 건 얼핏 알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채식주의가 점차 퍼져나갔나 봅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물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계몽주의의 영향이 있었고, 제레미 벤담의 이야기도 언급되었네요. 또한 그 원동력의 일부는 과학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스 해리슨의 <동물 기계>,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등이 출간되면서 동물 복지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법적으로는 피 스포츠(닭싸움이나 투우)의 불법화, 사냥과 낚시 관행의 변화 등 동물권 보호를 위해 문화적 인식과 법적 제도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집니다. 동물실험도 점차 안 하는 쪽으로 가는 듯하고, 이에 대한 인증제도도 있죠.


최근에 국내에서도 개를 식용 목적으로 사육 및 도축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나네요. 이러한 법안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왔고, 정부가 개입하게 된 사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권리, 혹은 복지의 향상이 인종, 여성, 아동, 동성애자 등과 같은 선상에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동물들이 스스로 그러한 권리를 쟁취한 것이 아닌 인간에 의해 상대적으로 부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권리 혁명의 정점에서 동물들의 권리를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타당하며 또 보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며 그러한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것이죠.




권리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이제 7장의 내용을 정리하며 지난 50년 동안 비폭력과 권리 존중을 향한 일련의 움직임인 권리 혁명에 대해 그 원인과 성격,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공통적으로 비인간화, 아웃사이더에 대한 악마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 아브라함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의해 강화된 문제적 측면 등 인간 본성에 내재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종교는 율법과 신념으로 수천 년 동안 차별과 폭력을 조장해 왔으며,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인권 혁명은 본능, 문화, 종교, 표준 관행을 거부해야 하는 도덕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인종, 민족, 성별, 나이, 성적 취향, 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 동물들의 이익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강조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수적인 태도도 변화하여 인종 간 결혼, 여성의 권한 부여, 동성애에 대한 관용, 아동 처벌, 동물 대우 등에서 인권 혁명의 영향으로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혁명의 원인을 한 가지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후의 번영, 민주적 정부, 재화 기반 경제에서 정보 기반 경제로의 전환과 같은 요인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제도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외적 원인은 아이디어의 확산과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입니다. 또한 고등교육의 성장, 과학 연구, 도서 출판의 붐은 사상의 확산을 촉진하여 무지와 미신에 도전하고 공감과 도덕적 성장을 촉진했습니다.


토머스 소웰이나 재레드 다이아몬드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정보의 흐름은 도덕적 성장을 가능하게 합니다.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은 지속 가능한 도덕적 노하우를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여기에서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예를 들어 그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술을 어떻게 적용하여 폭력보다 전략에 중점을 두었는지, 그리고 그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최소한의 폭력으로 중요한 성과를 이끌어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과거에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비폭력으로도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7장까지 마쳤습니다. 2장~7장까지 여섯 장에 걸쳐서 폭력의 역사적 감소에 대해 보여주었는데요, 수긍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고 억지스럽게 여겨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최근 수십 년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도 과거에 비하면 많은 것들이 나아졌으니까요.


미래는 어떨까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황에 대해서만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죠. 다만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심리학을 기반으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8장과 9장에서는 우리 본성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살펴볼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