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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8

8장 내면의 악마들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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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내면의 악마들

어두운 면
도덕화 간극과 순수한 악의 신화
폭력의 기관들
포식성
우세 경쟁
복수
가학성
이데올로기
순수한 악, 내면의 악마들, 그리고 폭력의 감소


7장까지, 역사적으로 폭력이 어떻게 감소해왔는가를 봤고 이제는 좀 더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8장 "내면의 악마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8장에 나온 내용들은 이미 앞에서 나왔던 내용이 반복되는 측면도 있었고, 또 다른 책들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은 본문 내용을 보면서 다시 얘기해 볼게요.




어두운 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류의 역사는 유혈 사태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복잡하고 다면적이라는 것을 시사하며, 다원적 사고를 요구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약탈, 지배, 복수 등)과 평화를 지향하는 마음(연민, 공정성 등)이 모두 있으니까요.


우리가 앞서 읽었던 <휴먼카인드>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인간의 선한 측면을 더 강조하는 듯했고, 인간이 보노보에 더 가까운 종이라고 했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 평가하기는 어려우나 본능적으로 폭력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보는 차이점이 있네요. 사실 인간이 침팬지에 가까운가 보노보에 가까운가 논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대부분의 인간은 표현하지 않더라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두 살 아기 (예전 우리 나이로 하면 '미운 네 살' 쯤 되겠죠)는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폭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기라고 했죠. 다소 억지스러운 비유일 수는 있겠지만 폭력이 인간의 본성임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얘기한 것 같네요.


그러나 인간이 그러한 폭력성을 갖고 있고, 종종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가 들지만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상 속 폭력과 실제 폭력 사이의 차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금기도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복잡한 면이 있는 것이죠.


폭력은 인류의 진화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으며,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분노 회로'를 포함하여 다른 포유류와 많은 유사점을 공유합니다. 이는 공격성의 신경학적 근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휴먼카인드>에서도 나왔던 내용인데요, 전쟁에서 총을 쏘지 않았던 군인들이 폭력 사용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기저에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것들이 있었네요. 핑커는 그러한 이유를 자세히 밝혔지만, <휴먼카인드>는 이 책 보다 더 늦게 나왔음에도 그것을 단순히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고 하고 단편적으로만 보여줬네요. 하긴, 브레흐만은 <... 천사>를 단지 벽돌책으로 치부하고 아무도 안 읽을 책이라고 폄하했었으니까요. 본인은 제대로 읽었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그런데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공격자가 자신에게 가해질 위험성을 고려한 계산된 행동이라고 하는군요. 인간의 폭력은 대부분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하며, 보복의 위험이 낮은 상황을 악용하기도 하고요. 특히 대량 학살이나 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폭력의 사례는 침팬지의 행동과 유사하게 위협을 단호하게 제거하기 위한 적응으로 간주됩니다.


어쨌든 우리 내면의 폭력성을 인정해야 그것을 억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화 간극과 순수한 악의 신화


이제 우리 내면의 폭력성을 고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심리학 및 사회학 연구에서 탐구된 악에 대한 인식, 이기적인 편견, 인간 본성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특히 악에 대한 인식과 자기 정당화가 우리의 심리에 깊이 내재되어 갈등, 피해, 도덕성에 대한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평화롭다'는 '고귀한 야만인 신화'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신화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침략과 투쟁의 낭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겨지며, 반폭력 운동의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핑커의 <빈 서판>에서도 나왔던 내용인데요, 그러한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하죠. 사실 인간을, 인류의 조상을 그렇게 볼만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책의 초반에서 봤듯이 원시시대가 더 폭력적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악에 대해 부정하는 본성이 있다고 했는데요, 핑커는 그러한 내용도 잘못된 것으로 보는 듯합니다.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그의 저서 <악>에서 '순수한 악의 신화'를 언급하며 해로운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분석하였고, '악한 사람은 적은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악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보면 가해자는 종종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 반면, 피해자는 그러한 폭력이 부당하며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인간의 당연한 속성 중 하나인 것 같은데요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지만요) 인간의 심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입장에 따라 해석과 기억을 왜곡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자신을 상황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이러한 합리화는 바우마이스터의 '순수한 악의 신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해로운 행위는 평범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응하는 산물로 간주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하며 해로운 행위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의 평범함과 동기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그것 역시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네요.


이 부분에서 다소 혼란이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악은 본질적으로 악의적인 사람이 저지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평범한 사람이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요? 전자의 '순수한 악의 신화'가 좀 더 보편적인 인식인 것 같지만 또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으니까요.


이러한 편향은 20세기 사회 심리학의 주요 발견으로, 인지 부조화 및 워비곤 호수 효과와 같은 현상을 포함합니다. 이는는 사회적 동물의 진화적 부산물로 간주되지만, 개인이 착취당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기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핑커는 자기기만에 대해서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기업에 비유하여 자기기만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방식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 (보통 '이중잣대'라고 하죠) 아마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며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은 그러한 것을 포함합니다.




폭력의 기관들


여기에서는 해부학 및 생리학적 내용들이 나와서 다소 어렵게 느끼셨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는 공격적인 행동에 기여하는 뇌의 다양한 시스템과 동기에 초점을 맞춰 폭력의 생물학적, 심리적 측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것인데요, 동물계, 특히 포유류의 공격성은 하나의 충동이 아니라 뇌에 있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회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포함시켰을 것 같네요.


여기에서는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천천히 읽어보시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합니다. (여기 기재된 용어는 정확한 의학용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공격성과 관련된 주요 뇌 구조로는 후 뇌, 중뇌, 전뇌, 그리고 하뇌의 주요 부위를 연결하는 분노 회로가 있으며 이 회로는 공격성의 신체적, 정서적 측면을 모두 제어합니다. 편도체는 뇌의 공격성 회로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감정 반응, 특히 공포를 담당하며 위협에 대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대뇌 피질도 공격성에 영향을 미치네요. 안와 피질도 편도체 및 시상하부와 연결되어 있어 감정 조절과 분노, 두려움과 같은 본능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충동적 살인범은 자제력과 공격성 조절에 중요한 안와피질에 이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측두두정 접합부와 배 측 전전두피질과 같은 뇌 영역은 타인의 신념을 이해하고 공리주의적 결정을 내리는 등 도덕적 심의에 관여합니다.


포유류의 포식성과 분노는 서로 다른 형태의 공격성이며, 뇌의 다른 부위에서 촉발됩니다. 포식은 도파민에 의해 주도되는 탐색 시스템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포와 분노의 상호 작용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공격성은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을 받으며 이는 수컷에게 공격성이 더 크게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포식성


핑커는 폭력을 실제적 또는 약탈적 폭력, 지배, 복수, 가학, 이데올로기적 폭력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그중 약탈 또는 도구적 폭력의 개념, 그 심리적 토대, 인간 행동과 갈등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네요.


약탈적 또는 도구적 폭력은 증오나 분노와 같은 파괴적인 동기가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이는 로마의 반란 진압과 같은 역사적 사례부터 방어적, 선제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약탈적 폭력이 있었으며, 그러한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차이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다시 또 나왔는데요, 가해자의 비도덕적이고 실용적인 관점과 피해자의 경험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며, 특히 인간의 동물 포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포식자는 먹잇감(혹은 적)이 반격하면 냉정한 분석에서 혐오, 증오,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전환하여 도덕적인 분노와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편도체와 안와 피질의 활동이 저조하거나 크기가 작으며, 사회적 감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대규모의 협력자 집단 내에서 하나의 전략으로 진화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소설 <아몬드>가 생각났어요. 제목의 '아몬드'는 편도체를 일컫는 말인데요 (종종 그렇게 불리기도 하고요), 주인공의 편도체에 문제가 있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지만 다행히(?) 사이코패스는 아니었죠.


약탈적 폭력은 수단-목적 추론과 자동적 도덕적 자제력의 부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추상적 추론에 집착하기보다는 감정적 범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과신에 대한 얘기도 나왔습니다. 이것도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이죠.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약탈적 폭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신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협상 전략이 될 수 있지만, 실제 성공 확률에 맞지 않는 공격성과 저항을 조장함으로써 약탈적 폭력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학자 도미닉 존슨의 연구는 상호 간의 과신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지도자들은 종종 비현실적으로 낙관적이며, 모순된 정보를 무시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과신 전쟁에 덜 취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이 이러한 경향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처럼 미확인 정보에 의거해서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도 있었죠. 이런 경우가 아마 알게 모르게 많았을 것 같아요.




우세 경쟁


마지막으로 '우세 경쟁'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이는 폭력의 한 형태인 지배와 그 심리적 토대, 개인적 및 사회적 맥락에서 지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것입니다.


우세, 혹은 우위는 가시적인 이해관계를 수반하지 않지만 인간 다툼의 가장 치명적인 형태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힘보다는 정보와 평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살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소위 '기싸움' 혹은 '주도권 싸움'이라고 하죠. 사람이 두 명만 있어도 그러한 것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안정된 커뮤니티에서는 개인 간의 실력 차이가 알려지고 인정되면서 서열이 형성됩니다. 폐쇄적인 그룹 내에서 우위경쟁은 제로섬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위가 확립되면 더 이상의 폭력은 종종 중단되며, 끝없는 복수의 순환을 피할 수 있죠. 이러한 위계질서는 불필요한 갈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지배력 경쟁은 정보 교환과도 얽혀 있는데, 특히 평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우세 경쟁은 동물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이며,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러한 경쟁을 하는 듯해요.


남성은 여성보다 직업적 지위를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폭력 성향이 높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도 언급됐듯이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공격성에서 연령과 관련된 패턴과 관련이 있는데요, 테스토스테론은 개인이 지배권 도전에 대비하도록 준비시키지만 직접적으로 폭력을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여성이 지도자가 되거나 여성이 더 우세할 경우 좀 더 평화적인 시대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핑커는 그렇다는 쪽으로 얘기했지만 사실 저는 별로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물론 남성과 여성간 성향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집단적으로 봤을 때, 어떠한 욕구와 갈등의 해결 방식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날까, 그리고 폭력의 사용은 결국 소수의 결정권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데 여성의 경우 폭력성을 가진 비율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결정을 하기 위한 절대적인 수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건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지배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인 사회적 지배 또는 부족주의는 어릴 때부터 나타나며 인간에게 널리 퍼져 있는 동기입니다. 이는 집단 정체성에서 비롯되는데요, 집단 정체성은 집단 간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종종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 욕구로 이어집니다.


이에 대한 내용도 <휴먼카인드>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언급됐던 부분이죠. 공동체 내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지만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높아진다고요. 그러한 것이 갈등을 초래하고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 지도자의 지배 중심적 성격 특성은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나 무아마르 카다피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 그러한 지도자의 예입니다. 김정일도 동급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김정일은 죽었고 지금은 김정은이 문제죠. 최근에 자꾸 불안감을 조성하는 걸로 봐선 북한도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체제가 계속 존속되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핑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는 폭력성의 본성이 있으며 , 이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포유류들과 공유되는 속성이며, 진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죠. 물론 다른 포유류보다는 뇌의 작용이 좀 더 복잡하지만, 그것은 원시적인 뇌의 영역에 존재했던 것이라 기능적으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뇌의 다른 영역과 상호작용에 의해 발현되고 또 통제되기에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폭력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러한 목적이 어쨌든지 간에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그 행위를 정당화할 만큼은 못되겠죠.


심리학적, 생물학적으로 폭력의 이유와 동기를 분석해 보고자 해도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발생 가능성은 늘 있죠. 원인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앞서 핑커는 폭력을 포식성, 우세 경쟁, 복수, 가학성, 이데올로기로 구분해서 보겠다고 했었고 이 중 포식성과 우세 경쟁에 대해서 보았는데요,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모두 동일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핑커는 각각을 다른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지만요. 일단은 하나씩 따라가면서 보도록 할게요.




복수


복수에 대한 충동은 폭력의 주요 원인입니다. 전 세계 문화의 95%에서 피의 복수를 명시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부족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복수가 주요 동기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복수는 전 세계 살인 사건의 10~20%, 학교 총기 난사 및 민간 폭탄 테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동기가 됩니다. 이는 어쩌면 본능적일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는 복수는 충동이며, 우리 뇌 속의 분노 회로를 통해 야기된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가장 가까운 가해자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죠. 실제로 동물이 인간처럼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작용-반작용처럼 어떤 것에 대해 반사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복수를 유도하면서 동시에 공감을 무력화시키는데요, 이는 스스로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의도한 바가 아니어도 뇌의 작용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이 과연 그것이 더 이득이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한 것인지, 아니면 동물적인 면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인간이라면 복수보다는 공영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집단 간 경쟁을 위해선 복수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겠고요. 그러나 진화는 협력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복수는 쾌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우리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미디어 등을 통해 그러한 복수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복수를 억제하기 위해서 법적인 규제도 있긴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 이론이나 'Tit for Tat' 등 여러 가지 수학적, 심리학적 모델등을 통해 복수를 억제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Tit for Tat 전략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어서 실용적으로 적용할 만합니다. 다만, 이는 모두가 동일하게 그 규칙에 동의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이코패스처럼 어긋나는 경우에는 이 전략이 무력화되겠죠.


또한 복수는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충동을 억지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계속되고 있죠. 이는 사람들의 불합리한 주관적 판단 (이중 잣대)과 도덕적 감각의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이를 수크윈더 셔길, 폴 베이즈, 크리스 프리스, 다니엘 울퍼트의 '손가락 누르는 실험'에서 보여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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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저울, 눈가리개, 칼을 통해 정의의 논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아마 많이들 보셨을 거예요. (눈은 가리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 이름에서 영어 단어인 'justice'가 나왔는데요, 사실 정의는 참 어려운 개념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존 롤즈의 <정의론> 등에서도 정의에 대해서 논의했지만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죠. 이는 정의가 진화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정의가 복수의 정당화 수단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just deserts'는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의의 사막'이라고 할 것 같은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쓰인 걸까요? 그의 저서 <빈 서판>에서도 이 얘기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어쨌든 현재의 사법 시스템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고, 사적인 복수 대신 공권력에 의한 합법적인 처벌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얘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보복으로 인한 범죄 발생을 억제할 수 있겠죠.


그리고 여전히 사적인 복수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눈가림하는 국가, 문화권도 많은데요, 이는 단순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복수가 조절되는 (무마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자연스러운 공감의의 범위 내에 들어올 때, 복수를 행하기 어려운 대상일 때 (공생을 위해), 가해자가 무해해졌을 때 등입니다. 그리고 사과와 용서도 그러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건 좀 이상적인 면도 있죠. 사과를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도 많은데 개인 간에도 그렇지만 조직 간, 국가 간에도 그런 듯해요. 핑커가 예시로 든, 예전에 일왕이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는 내용은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요.


아무튼 그러한 것들도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고, 진정한 사과와 용서, 화해가 이루어져야겠죠. 쉽지는 않겠지만 롱과 브레케가 그 성공의 조건을 제시했던 것처럼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더 이상의 복수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말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 얘기를 보며 현재 진행형인 그 현실이 참 씁쓸하게 느껴졌어요.




가학성


가학성, 즉 'sadism'은 질적인 면에서 최악인 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피해자의 고통을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끔찍할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당황스러운데, 그 이유는 고문을 가하는 사람은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대가로 명백한 개인적 또는 진화적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류 역사에서의 폭력성을 살펴보았었는데요, 특히 고문은 인류의 역사와 현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습으로, 적어도 다섯 가지 상황에서 나타났었습니다.


1. 도구적 폭력 - 정치적, 군사적 목적 등으로 정보를 빼내거나 반대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2. 형사 및 종교적 처벌 - 도구적 폭력+범죄(또는 종교적 반대)를 저지하기 위해

3. 유흥 -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

4. 끔찍한 고문과 신체 훼손 - 군인, 폭도, 민병대의 난동을 동반하거나 공황 상태에 의한 것

5. 연쇄 살인, 스토킹, 납치, 고문, 신체 훼손 등


특히 마지막의 연쇄 살인과 범죄는 역사적으로 지속되었었는데요, 이는 인간의 가학성에 대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것들을 보면 인간의 가학성이란 더 보편적이고 본성일 수도 있을 듯하네요. 특히나 인간의 본성에는 타인의 고통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동기가 있다고 하니까요.


이러한 가학성은 타인의 고통을 즐기려는 동기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구속을 제거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또한 그러한 가학성이 나타나는 동기는 생명의 최약성에 대한 매혹, 다른 이들에 대한 지배력, 복수, 그리고 성적 쾌락을 위한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의 성적 쾌락은 소위 'S-M'이라고 얘기되며, 좁은 의미의 가학성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죠. 실제로 'sadism'의 유래가 된 사드 백작(Marquis de Sade)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고요.


이러한 가학성은 보편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 가학성이 나타나는 경우는 적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에 대한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감, 동정, 죄책감, 혐오감 때문이며,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우마이스터는 죄책감이 가학성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알려진 가학성 실험인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이 제시되었는데요, <휴먼카인드>에서는 이 실험이 조작된 것이라고 했지만 핑커는 이 실험 결과가 현실 세계의 결과와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가학성은 후천적이지만 중독성이 있어서 더 강해집니다. 그러면서 앞서 얘기했던 억제력들이 작용하지 못하게 되죠. (의도적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작용을 못하게 되는 듯합니다) 특히나 스트레스 요인이 많을 경우에는 그러한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그러나 가학성이 후천적이라는 측면은 두렵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


앞서 보았던 폭력성들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는 해도 그 규모가 크지는 않은데 비해 역사상 큰 규모의 희생자들은 많은 이들이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동기를 가지고 행동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이상주의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악의 것들을 끄집어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진실성을 방해했으며 집단적으로 불행한 사건들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심리적 요소는 역학적이지 않고 좀 모호합니다. 그러한 독성을 가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그렇게 확산될 수 있었을까요? 저자는 그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많은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사악할 뿐만 아니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결코 믿지 않을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얘기하면 정신병자 같은 소리도 집단이 믿게 되면 그들만의 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중 하나가 양극화인데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모습은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이기도 할 텐데 결국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고, 다른 집단과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변하게 되죠.


평범한 사람들이 대중적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고 해도 어떻게 자신의 양심을 극복하고 그러한 잔학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도덕화 격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지 부조화 감소라고 할 수도 있겠죠.


더 큰 문제는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게 되고, 집단의 위상과 개인의 위상 역시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에서도 보였든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인해 개인은 무력화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기까지 하고요. 이러한 것들이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거나 학살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됩니다.


또한 이 파트에서는 우리가 <휴먼카인드>에서 봤던 여러 가지 실험과 사례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실험이라든가 키티 제노베재의 살인 사건으로 인한 '방관자 효과' 등)이 제시되었는데요, 이 사례들의 진위성은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도 이 사례들이 조작 또는 거짓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의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한 순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그것이 미덕이 될 수 있고, 집단 전체에 이득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군중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고, 이는 광신적 이데올로기로 번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광신적 이데올로기는 군중을 더 쉽게 장악하게 되고요.


이는 다원적 무지, 침묵의 나선, 애빌린 역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 역학 현상으로 설명되는데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그러한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고, 오히려 집단은 그러한 이단자를 처벌하죠.


또한 밀그램, 짐바르도, 바우마이스터, 레온 페스팅거, 알버트 반두라, 허버트 켈만과 같은 사회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때때로 후회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과 도덕적 주체로서의 이상 사이의 부조화를 줄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완곡어법, 점진주의, 단계적 결정, 책임의 이동 또는 확산, 거리두기, 피해자 비 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인지 부조화 감소 방법과 도덕적 해이의 속임수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인지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치료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상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반대 의견을 표출해도 처벌받지 않는 열린 사회가 하나의 백신이 될 수 있습니다. 대량 학살과 이념적 내전에 대한 국제 사회의 노력도 어느 정도 면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악, 내면의 악마들, 그리고 폭력의 감소


세상에는 가학적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즘적 독재자 같은 악인도 분명히 존재하고, 영웅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폭력의 감소는 대부분 시대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순수한 악의 신화에 대한 대안은 악의 보편성인데요,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대부분의 폭력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의 보편성도 틀렸다는 얘기가 있었죠. 어쨌든 폭력의 감소는 사람들이 이러한 동기를 덜 자주, 덜 완전하게, 또는 더 적은 상황에서 행사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심리학과 뇌신경과학의 발달로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관점에서 우리의 일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이나 일반적인 통념 모두 우리를 움직이는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악마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성의 다른 면, 즉 선한 본성이 그러한 것들을 능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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