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선한 천사들
9장 선한 천사들
감정 이입
자기 통제
최근의 생물학적 진화?
도덕성과 터부
이성
이제 9장입니다. 그런데 소제목인 '감정 이입'과 '자기 통제'가 원문에서는 'Empathy'와 'Self-control'인데요, 이것들은 주로 '공감' 그리고 '자제력'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고, 그게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에서 쓸 때는 그냥 '공감', '자제력'으로 쓰되, 소제목에서만 번역본대로 '감정 이입'과 '자기 통제'라고 하겠습니다. (번역본의 본문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네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9장에서 나온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네 가지 덕목은 공감, 자제력, 도덕성과 터부, 이성인데요, 이들은 폭력 감소에 기여할 수 있는 심리적인 능력들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나온 '내면의 악마들'이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비해 그에 대응하는 천사적인 덕목들이 뭔가 불분명하거나 약하다는 듯한 생각도 듭니다. 핑커도 독자들이 너무 기대가 클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너무 행복한 결말로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은 뿌리치겠다'라고 했군요.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하나 봅니다.
우리는 공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들의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공감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와 사회 현상들을 보려 하고 있죠. 그런데 영어권에서도 empathy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시간이 좀 더 지나서 100년은 넘은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이 1940년대 중반부터라고 하니 일단은 그 정도 되는 걸로요)
우리말의 '공감' 역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아요. 누군가 문헌 상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공감은 역시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일반화된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이러한 공감은 '동정' 또는 '연민'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동물, 사물의 입장이 되어 그 상황에 처했을 때의 느낌을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생각 읽기+마음 읽기)
'거울 뉴런 이론'은 아마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예요. 인간뿐만 아니라 영장류에게는 그러한 본성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이론을 대체로 많이 믿는 편이지만 이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공감은 단순히 그러한 거울 뉴런의 자동 반사가 아니라 그보다는 더 고차원적이라고 하는군요.
뇌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밝혀진 바로는 공감 중추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해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응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복잡하게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기관뿐만 아니라 호르몬도 작용하고요. 옥시토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공감 관련해서는 옥시토신 얘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옥시토신은 친밀감과 모성을 유발하지만 반면 다른 무리를 배척하고 공격성을 높이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즉, 이로 인한 공감력의 증가는 나와 가까운 공동체에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읽었던 책들과 다른 책들에서도 나온 얘기입니다)
그래서 공감의 범위를 더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를 피터 싱어의 '확장하는 공감의 원'이라는 가설로 얘기했네요. 과연 그 공감력을 나와 관계가 없는 낯선 이들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요?
외모 (미모나 귀여움)가 공감력을 증가시키고, 궁핍함이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일반화된 방법이 필요할 것 같고, 크렙스는 '공감-이타주의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다소 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 (공감과 이타주의 둘 다 모호한 개념이니 둘 사이의 관계를 보는 것은 더 모호하겠죠)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 동기를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심리적 이타주의 또는 관점-동정 가설 등의 버전으로 확장되었고, 나중에 뱃슨은 그러한 가설의 타당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 파트에서는 공감과 동정심이 혼용돼서 언급되는 것 같긴 했는데요, 동정심은 사실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또한 동정심은 죄책감과 용서를 수반하는 공동체적 관계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공동체적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그러한 동정, 공감이 기반이 돼야 하며,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도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문학, 예술, 미디어 등의 외생적 공감 유발 요인을 통해서도 확대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견해에 대한 반박도 있지만요.
또한 동정이라는 것도 도덕화에 따라 달라지며, 같은 것도 그 배경을 알게 되면 (거리를 두고 관점을 취하게 되면) 다른 결과를 내게 됩니다. 이를 '수면 효과'라고도 하고, 원치 않은 영향을 인식해서 이를 의식적으로 상쇄하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공감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공정성에 위배될 경우에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요. 뱃슨은 이를 공공재 게임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기도 했죠. 그러므로 공감과 공정성 사이에서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러한 공감의 범위를 낯선 이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하는데요, 공감의 원을 확장하는 대신 권리와 안전을 확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선한 천사'의 두 번째 요소는 자제력입니다. 폭력도 결국은 자제력의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자제력은 폭력을 감소시킨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에는 충동을 억제하고 자제시키는 시스템이 실제로 존재할까요? 자제력도 어느 특정 중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뇌 영역 전반에서 담당하고 있는 듯합니다. 뇌기능의 이상으로 자제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폭력성이 증가할 수 있다는 증거들도 있습니다.
핑커는 먼저 미래의 쾌락과 현재의 쾌락에 대한 선호도 차이부터 얘기하고 있는데요, 현재의 쾌락을 더 선호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의 뇌도 (진화적으로) 그러한 것을 더 선호하는 듯합니다. 미래의 쾌락을 선택함으로써 더 큰 보상을 얻는 것은 복잡한한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이고요. 이는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도 자세하게 나왔던 내용이었죠. 이를 수학적으로 보이고, 심리학 실험들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지만 우리도 경험을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충동적인 폭력은 이러한 자제력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충동적인 가해자, 특히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변연계의 공격적 충동이 더 강하고 전두엽의 자제력이 약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본능에 더 충실하고 이성의 힘은 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자제력이 좋은 사람들이 성취도나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이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가 그렇듯이, 그것일 일반화하기에는 증거가 아직은 부족하죠.
반대로, 자제력이 안 좋은 사람이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아직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제력의 부족이 그러한 폭력성의 전부가 아니니까요.
여기에서는 자제력을 보상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도 했고, 경험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유전과 약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타고나는 본성이기에 그것을 개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자제력을 키우면 폭력의 발생이 줄어들 수 있다는 가설은 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자제력의 여러 속성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줍니다. 바우마이스터의 실험이라든가 다른 심리학자들의 실험 결과는 다소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제력을 최적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했습니다.
이 외에도 자제력을 향상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는데요, 율리시스적 제약, 인지적 재구성, 조절 가능한 내부 할인율, 영양 개선, 운동을 통한 근육 증가에 의해 조절되는 것 외에도 유행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우마이스터는 자제력을 근육에 비유해서 마치 운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제력을 향상과 자아 고갈을 막는 방법을 실험하였습니다. 그 결과 훈련을 통해 자아 고갈을 더 잘 견뎌내며 일상적으로도 더 큰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장될 필요가 있으며, 법 집행과 경제 협력이라는 외생적 요소를 통해 좀 더 용이하게 이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장기적 지향성과 단기적 지향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장기적 지향성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장기적 지향성을 진화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지, 이후에 좀 길게 이어질 것입니다.
공감과 자제력, 둘 다 우리들이 가진 본성이긴 하겠지만 또 그게 단지 본성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키우고 확장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그렇다고 강제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죠. 이것은 개인차가 크고, 공감력과 자제력이 없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대신 사회생활은 좀 힘들어지겠지만요. (공감력과 자제력이 부족한 1인으로서요... ㅋ)
이전에 '자기 통제', 즉 자제력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이를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고 했었죠. 그래서 이 내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제목은 조금 모호한 감이 있었습니다. '최근의 생물학적 진화'라는 것이 인간이 진화를 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러한 진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인지 말이죠.
저는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후자라고 생각했어요. 최근의 진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얘기해 주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읽고 나니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폭력의 감소가 최근의 생물학적 진화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것이죠.
핑커는 진화에 대해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두 가지를 언급했지만 두 가지가 다른 과정이라고 했죠.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폭력의 감소', 즉 문화적 측면이므로 이것이 진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기에 이 두 가지를 엮어서 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일단 윌슨이 주장했던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핑커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 그리고 여러 심리학적 요인들이 해부학적 구조,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에 기인하는가를 연구한 결과가 많이 있었지만 사실은 간접적인 측정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직접적인 것은 그 연관성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경과학 측면에서는 폭력이 어떻게 유발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공격성을 유전자의 변이(분산이라는 관점이 더 적절하겠죠) 측면에서 보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러한 연구방법 및 결과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나왔었고 잘 알려진 것들인데요, 어쨌거나 유전적 요소가 상당 부분 있지만 환경적인 요소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민감한 폭력성 측정 방법, 행동 유전학 연구 등의 결과에서도 폭력의 유전성이 보인다고 하죠. 특히 행동 유전학에서는 그렇게 공격적인 성향이 유전되기는 하지만 자연선택이 집단의 평균적인 폭력 성향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앞서 다른 책들에서 봤었던 '자기 가축화' 얘기도 나왔고, 인간의 뇌의 구조가 자제력을 향상하는 쪽으로 발달해 왔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테스토스테론과 옥시토신, 도파민, 세로토닌 등 호르몬의 영향도 언급되었고요. 이러한 것들은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다른 책들에서 이것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룬 것들이 있으니 아마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MAO-A라는 효소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는 카테콜아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분해하여 뇌에 축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이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경우 폭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죠.
하지만 여전히 진화 유전학적 증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사 유전자 이론'은 그 증거가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된 것 같고, 문명화 이론은 언뜻 생각해도 그리 말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자칫 우생학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요.
따라서 최근의 생물학적 진화가 이론적으로는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우리의 성향을 조정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진화적인 영향으로 우리가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짧죠. 진화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방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는 그러한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을 배제하고, 문화적,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이 도덕성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행위에 대해 금기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도 우리의 본성을 관찰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기능들이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 즉 악한 용도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것들은 원인이자 치료제로 이용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핑커가 "인간의 선함의 원천이라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악의 내면 악마보다 더 사악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일부인 이 미친 천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라고 한 얘기는 너무 적나라해서 웃겼어요. 네, 미친 천사죠. 그는 그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어떤 단일한 기준에 의해서 정의되거나 판단될 수 없으며, 그러한 도덕적 감각은 고통을 줄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고 얘기합니다. 게다가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금기의 역설까지 초래합니다.
도덕적 감각은 단순히 행동을 회피하는 수동적인 형태가 아니라 행동에 대해 독특한 사고방식을 야기합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행동으로 옮겨지고요. 또한 그러한 도덕적 감각이 보편화되거나 혹은 규제가 되면 그것을 위반하게 되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법적인 처벌과는 다르게 규범 혹은 금기로 작용하지만 법적인 처벌보다도 더 무섭기도 하죠. (그것이 종합적으로 형성된 것이 문화일 것이고요)
하지만 조나단 하이트는 그러한 도덕적 규범의 무능력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멍청이'라는 표현을 썼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핑커는 도덕적 규범이 폭력적인 행동에 효과적인 제동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의 천사 중 하나로 내세웠겠지요.
슈웨더는 세계의 도덕적 문제를 세 가지 범주로 정리했습니다. 이는 개인(자율성), 공동체, 신성으로 구분되는 것으로서 각각의 범주에서 작용합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다시 다섯 가지로 나누었고요. 그러한 공동체적인 도덕성은 집단 내 충성심과 권위/존중, 공정성/호혜성, 해악/배려의 측면에서 작동합니다.
앨런 피스케는 도덕화를 네 가지 관계 모델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각각 공동체성, 선형적 계층 구조, 동등성 매칭 (Equality matching은 번역본에서 뭐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장 가격 책정입니다. 그는 진화, 아동 발달, 역사적 출현 순서를 반영하여 이를 그 순서 그대로 정렬할 수 있을 거라 했네요. 그리고 이는 막스 베버의 '합리적-법적' 사회적 정당화 방식에 의해 구현되는 규범체계라고 했죠. 핑커는 이 말을 조금 수정해서 좀 더 일반적인 용어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도덕적 감각에 대해 세밀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거나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대체로 일치성이 보입니다. 즉, 어떤 사회도 황금률이나 범주적 명령으로 일상의 미덕과 잘못 자체를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대신 그것을 존중하거나 위반하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이는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관계형 모델에서는 그러한 위반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도덕화됩니다. 금기로 이어지기도 하죠. 특수한 상황에서는 예외가 될 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피스케의 분류에서 동등성 매칭이나 시장 가격 책정으로 갈수록 더 느슨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금기에 있어서 최상위에 있는 것은 신성에 대한 것, 즉 종교적인 것인데요, 물론 종교도 정치 및 문화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만 떼어내서 얘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금기가 많은 문제와 폭력을 야기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테틀록은 세 가지 종류의 트레이드오프를 얘기했는데요, 일상적인 트레이드오프, 금기적 트레이드오프, 비극적 절충입니다. 특히나 비극적 절충은 신성한 가치와 세속적 가치를 대립시키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선택을 야기합니다. 문제는 금기적 트레이드오프를 비극적 절충으로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것들이죠.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이론들을 바탕으로 핑커는 다른 문화 사이의 인정, 관계 모델 배치의 차이의 인정, 여러 심리학적인 요인들을 얘기하지만 다소 역설적으로는 공동체, 신성함, 권위에 대해 도덕적 자원을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그 영역이 줄어들게 되면 그로 인한 처벌도, 갈등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일까요.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규범 대신 법(리바이어던이라고 언급한)에 맡겨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공동체, 권위, 순결이라는 전통적인 영역에서 도덕적 감각을 철회하는 것의의 폭력의 감소를 수하며, 부족과 권위주의적 강제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타인의 자율성과 복지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선택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공리주의에 대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전통적인 도덕성인 공동체, 권위, 순수성에서 공정성, 자율성, 합리성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우리 사회도, 그리고 우리의 인식도 그만큼 바뀌었기 때문이겠죠. 물론 그에 대한 기준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그래서 우리는 늘 갈등하게 되는 듯합니다.
정리하자면, 도덕성과 금기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싶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좀 혼동이 되기는 하는데 다른 분들께서 이해하시는 것도 참고해 보겠습니다.
9장에서 핑커는 우리의 본성에 있는 선한 천사들에 대해 얘기를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한계를 갖고 있으며 우리의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부작용으로 폭력이 더 늘어난 결과도 있었습니다.
핑커는 이제 이성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성의 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성이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해 오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성 역시 부작용을 낳아 전쟁과 대량학살을 야기하기도 했고요.
우리가 짐작하다시피 핑커는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해 다시 비판을 가하려고 합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집단적으로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세상이 덜 폭력적이게 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현대사회가 집단적으로 더 똑똑해지고 있다는 근거로 '플린 효과'를 들었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평균지능이 계속 상승해 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피터 싱어는 '확장 원'이론과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성의 효과를 점차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한 이성은 우선 부조리함이나 미신 등에 의한 폭력을 감소시킵니다. 또한 단독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다른 본성과 함께 작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제력과 함께 작용하여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도덕적 감각과도 상호작용하여 각각의 상황에서 (비례 등 수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적절한 추론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성은 폭력 자체를 정신적 범주로 추상화하며,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대항하도록 합니다. 이는 전쟁을 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정당화하는 것에서 보다 더 나아간 것이죠.
사실 이성 그 자체가 폭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 행복의 추구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영향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약속과 합의가 중요한데 이 과정에서 이성이 작용하게 됩니다. 더욱이 폭력의 회피는 공동체의 이익이 되니까요.
여기에서는 이성을 우선 지능의 관점에서 보았는데요, 앞서 언급했던 플린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지능이라는 것 자체가 여러 영역이 있는 것이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지속적인 상승이 있었다고 해도) 시대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달랐으며,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체감적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성의 진정효과와 플린 효과가 긴 평화, 새로운 평화, 권리 혁명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핑커는 플린 효과에서 가장 강화된 인지적 기술이 도덕적 고려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발휘되는 기술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폭력의 사용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비례의 사고방식이 이에 적용되죠. 이러한 시각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인지적 도약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플린 효과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폭력의 감소에 기여했다는 근거는 여전히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정교한 추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협조적이고 도덕적 범위가 더 넓으며 폭력에 덜 동조한다는 중간 연결고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며,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폭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채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는 추론 능력과 평화적 가치 사이의 직접성은 다르지만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연결 고리를 제시합니다.
1. 지능과 폭력 범죄: 사회경제적 지위와 기타 변수를 일정하게 유지했을 때 똑똑한 사람이 폭력 범죄를 덜 저지르고 폭력 범죄의 피해자가 더 적음.
2. 지능과 협력: 추상적 추론이 폭력의 유혹을 약화시키며, 상호 간 합리성을 확신하는 초이성의 경우 상호 협력이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게 됨.
3. 지능과 자유주의: 더 똑똑한 사람이 더 자유주의적임. 이는 지능이 고전적 자유주의의 원인으로 볼 수 있음.
4. 지능과 경제적 이해력: 지능은 경제적 이해력을 높이며, 발전된 경제와 교역은 칸트적 평화에 기여함.
5. 교육, 지적 능력, 민주주의: 칸트적 평화론, 즉, 삼각대의 민주주의 다리도 추론에 의해 강화될 수 있으며 이는 교육의 효과임. 교육 수준과 지적 능력은 상관관계가 있음.
6. 교육과 내전: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도 평균 지능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 이는 내전이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
7. 정치적 담론의 정교함: 정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정치적 담론의 통합적 복잡성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낮춤.
이렇게 핑커는 지능이 발달하게 되면 평화가 올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문명을 갖추게 되면 폭력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이성이기 때문에 이성을 우리 본성의 마지막 선한 천사로 제시했습니다. 공감, 자제력, 도덕적 감각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십 년, 수백 년 동안의 발전을 설명하기에는 자유도가 너무 낮고 적용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고 하면서요.
이성은 우리에게 공감을 확장하는 요령을 가르쳐주고, 불쌍한 타인에 대한 연민을 언제 어떻게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자제력은 강화할 수 있는 근육이지만, 우리 자신이 내면의 유혹을 품고 있는 해악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성은 자제력을 발휘하여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도덕적 감각은 사회적 역할과 자원에 할당할 수 있는 윤리를 제공하지만 도덕적 감각의 대부분의 적용은 특별히 도덕적이라기보다는 부족적, 권위주의적, 청교도적 적용이며, 우리가 다른 적용 중 어떤 것을 규범으로 확고히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이성입니다. 또한 이성은 이전 추론의 단점을 항상 주목하고 이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업데이트하고 개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언급된 내용을 들어 개인적인 불행보다 낯선 사람에 대한 공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요) 여기에서 우리 본성의 천사들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9장까지 마쳤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결론에서는 이성에 기반하여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