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방식

말을 다시 배우기로 한 자리에서

by 슬로하라


물러서는 태도를 택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관계 앞에서는 결국 어떤 감정은 언어를 통해서만 남는다. 유창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말이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만은 남기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말을 붙잡아 보려 했다. 더 잘해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더 답답해졌기 때문이다.


요약당하지 않기 위해 지켜 온 이 시간은, 분명 나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시간 안에서, 관계 속의 나 역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한 발 물러선 채로 서 있지만, 그렇다고 관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말하지 않으려 애쓰던 시간만큼이나,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점점 더 곤란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를 남겨 둔다.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채, 손만 내미는 정도의 움직임.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기보다, 답답함 속에 있는 나에게 또 다른 내가 내민 손에 가까웠다.


그렇게 나는 슬로베니아인에게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굳이 원어민이 아닌 사람에게, 그것도 면대면으로 배우기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 역시 모국어가 아닌 언어 안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 선택을 조금 덜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사람의 리듬과 결 안에서, 내가 머물 수 있는 지점을 알고 싶었다. 정확한 문장보다 망설임이 먼저 오는 순간들, 말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그 틈에서도 대화가 계속되는 방식이 궁금했다. 그것이 공감에 가까운지, 혹은 이해에 가까운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그 언어적 경로 위에 잠시라도 함께 서 보고 싶었다.


온라인 수업의 한계는 이미 한 차례 겪었다. 화면 너머에서는 말이 더 쉽게 끊어졌고, 이해하지 못한 순간을 그대로 넘기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유창함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도, 말이 오가는 자리 안에 실제로 몸을 두는 쪽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과 망설임이 먼저 나오는 리듬 속에서도 대화가 이어지는 방식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보고 싶었다.


영어를 배우는 첫 수업은 문법의 아주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는, 콩글리시처럼 굳어 있던 발음을 하나씩 짚어 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가르쳐주는 말을 듣고, 내가 이해했는지를 말로 건네야 했고, 궁금해지는 질문을 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시간들은 내내 의미를 잃지 않았다.


슬로베니아어 A1 시험 준비 역시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단계라기보다, 이곳에서 체류해 온 시간의 한 페이지에 가깝다.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기보다, 여기까지 머물렀다는 표시. 잘했고 못했고를 가르기 위한 칸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기록에 가깝다.


유창함과는 거리가 멀고, 여전히 더듬거리고, 한정된 단어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 알파벳을 읽게 된 순간부터, 수업에 앉아 있던 시간들, 미처 문장으로는 이어지지 않은 단어들, 발음을 망설이다가 삼킨 말들까지도 모두 이 페이지 안에 포함된다.


A1 시험은 내게 그 시간을 한 번 접어 두는 방식에 가깝다.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기보다, 이 체류가 헛되지도 허투로도 보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남기는 작은 표시처럼.


나는 오늘도 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다만 접어 두고, 행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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