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감정이 먼저 걷기 시작한 오후
유럽에서 여행이 아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 풍경이 있다.
고속도로를 스치듯 달리다 보면 산과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엔 무덤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산마다 봉긋한 무덤들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눈에 익었기에, 이곳의 산과 들이 그저 고요하게, 아무것도 없는 듯한 얼굴로 펼쳐진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 동네의 산책길을 익히게 되었는데, 그제야 알았다. 이곳의 무덤은 산속에 흩어져 있지 않았다. 대신, 동네의 시작점이나 끝자락에 작은 공원처럼, 정원처럼 단정하게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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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문턱을 넘어서서 활짝 열린 정원 안. 묘비들이 사이프러스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겁지도, 무섭지도 않은 풍경. 오히려 그 말 없는 풍경이 내 안의 어떤 감정과 닿아 있었다.
그 정원 안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몸가짐을 단정히 하게 된다. 산책 중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들고, 발걸음은 조금 더 천천히 낮아진다.
이곳을 찾는 가족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낯선 얼굴이 불편을 주지 않기를 바랐다. 이국의 풍경 속 낯선 동양인의 모습이, 그리움을 나누러 온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이질감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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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묘비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며 마음속으로 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곳에 잠시 들렀다 갑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존재의 자세를 배우고 있었다.
묘비에는 이름과 사진이 함께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엔 삶의 시작과 끝을 나란히 놓은 두 개의 숫자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숫자들은 누군가의 생애였고, 그 아래 놓인 촛불과 꽃들은 그 생애를 기억하는 마음의 흔적이었다.
묘비 앞에는 크고 작은 꽃다발, 촛불이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붉은 플라스틱 등 같은 것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처음엔 그게 낯설었다.
사실 나는 이곳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트의 어느 코너에서 그 물건들을 처음 봤었다. 큼직한 초가 들어 있는 빨간 플라스틱 병.
‘아, 이 나라는 집에서 이렇게 큰 초를 켜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렇게 묘비 앞에 놓인 모습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집이 아닌, 누군가의 이름 앞에 켜는 초였다. 그 불빛은 생활 속 애도의 방식이었다.
생을 다녀간 이들을 위한 꺼짐 없는 빛.
조용하지만 분명한 기억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 의미를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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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용히 묘지 옆을 걷던 어느 오후, 나는 마치 슬픈 꿈의 풍경 속을 천천히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슬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쁘다고도 할 수 없는 마음.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디선가 감정이 따라 흘러나오는 느낌.
그저 말로 전하지 않아도 충분한, 그리움의 마음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