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선동자 Feb 15. 2020

나중에 철들면 고맙다고 할 걸?

일찍 어른의 옷을 입혀놓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날 이해하게 될 거야"

살면서 어른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나중에 철들면 고맙다고 할 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너한테 해 주는 것들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다 너한테 필요해서 해 주는 것들이니, 나중에 커서 철이 들면 내가 너한테 해 줬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고마워할 거라는 의도로 하는 말 같다. 그래... 철들고 난 지금은 그러한 어른들의 차가운(?) 배려심에 고마워하고, 그땐 왜 그러한 어른들의 차가운 배려를 그토록 싫어했을까 하는 후회 섞인 생각도 많이 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그 상황에 처한다고 하면, 지금처럼 어른들의 행동의 속 뜻을 이해하며 고마워할 수 있을까?


사람은 아무리 이성이 발달한 동물이라고 해도, 자신이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다고 하면, 다른 야생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격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어린아이는 이성의 뇌가 덜 발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가 불쾌한 상태라고 하면 앞뒤 안 가리고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게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이야 이성의 뇌가 충분히 발달한 어른이고, 내가 당장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 게 아니기에, 그때를 여유로운 마음으로 되돌아보며 어른들의 그 행동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내가 당장 맞닥뜨린 그 상황은 지옥과도 같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당장 마주한 상황이 불쾌하고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그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이 나올 수 있을까? 지금 당장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른들이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했던 행동들은 여전히 불쾌하게 느껴지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철들면 다 이해하고 고맙다고 할 거야."라고 하는 말은, 아이의 몸에 맞지도 않는 무겁고 큰 옷을 입혀놓고, 나중에 옷이 몸에 맞을 만큼 성장하면 왜 내가 그 옷을 입혔는지 이해하게 될 거라고 하는 말과 같다.

아이한테는 성장의 단계에 따른 옷이 필요하듯,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성장의 단계에 맞춰줘야 한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다고, 당장 아이한테 맞지도 않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이에 대한 폭력이다. 아이는 어른처럼 이성적인 판단으로 사람의 속 마음을 이해할 수 있거나, 목욕탕 뜨거운 물에 오래 있고 온 몸의 때를 기면 개운함을 느낄 수 있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거나, 1분이라는 시간을 잠깐으로 느낄 수 있거나,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한 가지 일에만 매진해서 뭔가 과시할 수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아이한테 어른과 동일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아이한테는 몸에서부터 거부하는 불쾌감을 유발한다. 유년 시절을 그러한 어른의 요구에 맞추어 살아가길 강요받으며 보냈기에, 내게 유년 시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들로만 가득 차 있다.


나를 위한다고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어른들의 모든 행동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 된 건 사실이고, 그걸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 덕에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어른들과의 관계는, 철 들어서 그분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지금조차도 서먹서먹하고 그분들과 마주하면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잘 되게 하려고,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 나에게 인생의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내 안에 쑤셔 넣으려 했던 모든 분들... 그 덕에 지금의 통찰력 깊은 나도 있지만, 그분들과 친하지 못하고, 서로 마주하면 불쾌한 감정이 싹트는 나의 모습도 있다.


지금은 그 어른들한테 묻고 싶다. 좀만 더 기다려 줄 순 없었냐고. 때가 되면 그 행동들을 이해하고 잘 따랐을 텐데. 그렇게 자연이 부여해 준 나의 성장 시간표에 따라 나를 대해 줬으면, 지금처럼 그 어른들과의 관계가 멀어지진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등학생 아들이 게임하다가 100만원을 결제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