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엄마가 편해서 그런 거예요"
예전에 동호회 모임에서 몇 어머님이 내게 육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었다.
"제 딸이 엄마 말은 안 듣는데 유치원 선생님 말씀은 잘 듣더라고요. 제가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또 다른 어머님도 맞장구를 치시며 이런 질문을 하셨다.
"맞아요. 저도 제 아들이 제 말은 지지리도 안 들으면서 태권도 사범님 말씀은 잘 듣더라고요. 남자 어른이라서 말을 잘 듣는 걸까요?"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드렸다.
"아직 남처럼 느껴져서 그래요. 아이가 그분들하고 3년 이상을 매일 24시간 동안 지지고 볶고 지내면 아이가 선생님이랑 사범님 말씀도 안 들을 걸요?"
각 가정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아이가 부모 말을 안 듣는데 다른 어른의 말씀은 잘 듣는 케이스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로 아이가 엄마나 아빠 말을 안 듣는 건 그만큼 너무나도 잘 알고 편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언제 말을 들어야 하는지, 언제는 말을 안 들어도 되는지 알기 때문이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해도 자기한테 큰 피해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을 안 들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서로 너무 잘 알고 편하기 때문에 아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도 하고, 때때로 부모의 말을 흘겨 들으면서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반대로 선생님이나 할머니 이모 삼촌 같이 다른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경우는 아직 부모만큼 편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알아가는 관계고 상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다소 긴장감을 가지고 관계를 하게 된다. 그래서 배운 대로, 예의를 갖추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무지 애를 쓰면서 관계를 하게 된다. 부모는 너무나 편한 관계니까 긴장할 필요가 별로 없다. 그래서 다른 어른들한테는 예쁜 모습만 보이면서, 부모한테는 투정 부리는 모습, 떼쓰는 모습, 장난치는 모습, 안기는 모습을 모두 서슴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성인들도 새로운 사람이랑 만남을 가질 때 자기의 본모습을 숨기고 자기를 좋은 모습만으로 포장해서 관계를 하려고 노력을 하는 반면, 절친이나 가족과 같이 편한 관계의 사람들한테는 욕설도 하고 잔소리도 하고 온갖 투정을 다 부리는 등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가? 아이도 마찬가지다. 친하고 편한 부모한테는 말도 잘 안 듣고 본색을 드러내다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계하는 선생님이나 이모 삼촌과 같은 어른들 앞에서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를 쓰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 말을 안 듣고 다른 어른의 말은 잘 듣는 두 번째 케이스는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가 애초부터 틀어진 경우다. 이미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어긋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더 믿고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아이가 다 엄마 말을 안 듣진 않는다. 부모 말도 잘 듣는 아이들의 가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부모와 아이와의 애착관계가 상당히 잘 다져져 있다는 점, 둘째는 부모가 아이의 의견과 행동에 대해 믿고 존중해준다는 점, 셋째는 부모가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부모와 아이 간의 강력한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이는 부모를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근데 바쁜 현대인의 삶 속에서 부모들이 그런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기는 상당히 어렵다. 맞벌이도 해야 되지, 육아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 없지, 부부를 제외하고 아이를 함께 돌봐줄 사람도 없지, 어린이집에는 믿고 맡기기 어렵지, 직장생활이나 육아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음의 평정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기도 어렵지...... 그래서 실제로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와의 관계를 잘 형성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대개 저 세 가지 특징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다. 생후 3년 이내에 아이와 충분한 애착관계를 다지지 못했거나, 아이의 의견과 행동을 존중하지 않고 부모의 의도대로 하길 종용한다거나, 아이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해주지 않고 어른의 시각에서 재단하려 하기만 한다면 아이는 부모에게 마음의 문을 일찍이 닫아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부모와 아이 사이에 믿음의 끈이 단단히 형성되지 못했다면, 아이는 부모의 말에 그다지 믿음이 안 가고, 부모의 말을 안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가 극도로 좋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온 사람이라면, 아마 부모님 말씀은 귓등으로도 안 들릴 것이다. 아 또 시작이구나, 아빤 맨날 저래, 또 날 못살게 굴려고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득할 것이고, 그걸 밖에 나가서 친구한테, 애인한테 하소연을 하고 털어놓을 것이다. 부부관계도 비슷하다. 부부간에 신뢰가 깨진 관계라면 남편 혹은 아내의 말은 신뢰가 안 가서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교회나 절에 가서 은사님이나 스님 말씀은 또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부모와의 관계가 신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면 아이는 부모의 말을 흘겨들으면서 '아 또 시작이구나' 하고 반응할 것이고, 다른 어른들의 말씀은 잘 들으면서 잘 보이려고 할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마냥 아이가 그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는 않는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이 어른도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마찬가지로 말을 안 듣는다. 선생님이, 사범님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존중, 공감하지 않는 태도로 수년 동안 아이와 관계한다고 하면 아이는 부모 말 안 듣듯이 똑같이 말을 안 들을 것이다.
결론은 아이가 부모 말을 너무나도 안 듣는데 밖에 나가서 다른 어른들의 말은 잘 듣는다(비슷한 고민으로 "집 안에서 하는 행동과 밖에 나가서 하는 행동이 다르다"도 있다.)는 게 고민이라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이에게 부모님은 편한 존재기 때문에 아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 좋은 모습 미운 모습 모두 보일 수밖에 없다, 말도 안 듣고 떼쓸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아이가 내게 마음의 문을 닫은 건 아닐까? 내가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고 너무 내가 하자는 대로 했나? 아니면 너무 어른의 생각으로 재단하려들었나?'
하며 부모로서의 행동에 대해 되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