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진화 이경희의 수필 DJ
두 명의 천재를 완성하고 자신의 삶을 재건축한 뮤즈
두 명의 천재를 완성하고 자신의 삶을 재건축한 뮤즈
-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진화 이경희
문단과 예술계, 학계에는 천재성을 가진 이들의 뮤즈가 되어 큰 영감을 주고 그들의 세계를 완성시킨 여인들이 있다. 자신도 재능이 풍부하고 역량이 뛰어나지만 독립적인 존재로 우뚝 서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김향안은 첫 번째 생에서 변동림이란 이름으로 살았고 천재 이상의 아내였다. 두 번째 생에서는 화가 김환기의 아내로 생을 완전연소 했고, 두 천재와 자신의 삶까지 완벽하게 재건축했다. 일부종사를 강요하는 시대에 금기시 되었던 일들을 과감하게 해낸 그녀의 삶에 대해 세상은 새로운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삶의 벼랑을 만났을 때 힘차게 날갯짓을 하여 접혔던 젖은 날개를 당당하게 펼친 그녀의 삶이 눈부시다.
1930년대 우리나라의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문단에서 단연 천재성을 발휘한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과 만난 20대 초반의 영문학도 변동림, 그녀는 1916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기고녀와 이화여전에서 수학한 인텔리 여성이다. 대학시절에 이미 수필가로 등단했고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어에 능했으며, 불어도 가능한 재원 변동림은 오빠 변동욱의 소개로 이상을 만나자마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가난한 천재와 동거하기에 이른다. 그는 영민한 그녀와 진지하게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변동림은 1936년 6월 성북동 신흥사에서 동경 유학을 전제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이상에게 먼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권했다. 올케 변동림을 ‘임이 언니’로 불렀던 이상의 여동생 옥희는 평소에 오빠가 입버릇처럼 말하길 ‘랭보(1885~1891)가 1876년에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습득하기 위해 세상을 주유했듯 다섯 나라쯤의 외국어를 할 수 있어야 되겠다’며 동경으로 떠났다고 했다.(정철훈 지음 《오빠 이상, 누이 옥희》 중에서) 그 즈음의 이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건강한 청년 이상(李箱)과 결혼했다
나의 오빠의 소개로 처음 이상을 만났을 때 이상은 밤색 두루마기의 한복 차림이었고 쭉 한복을 입었다. 후리한 키에 곱슬머리가 나부끼고 수염은 언제나 파랗게 깎았다. 우뚝 솟은 코와 세 커플 진 크고 검은 눈이 이글거리듯 타오르고 유난히 광채를 발산했다. 수줍은 듯 홍조(紅潮)를 짓는 미소가 없으면 좀 무서운 얼굴이었을 거다. 그러나 언제나 수줍은 듯 사람을 그리는 듯 쓸쓸한 웃음을 짓는 모습과 칼칼한 음성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상이 폐를 앓았다고 했지만 기침하거나 각혈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나는 건강한 청년 이상하고 결혼했다.
<오감도(烏瞰圖)>와 <날개>를 발표한 후다.
이상의 문학은 작가가 발표한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와 수필 <산촌여정(山村旅情)> 외 몇 편을 들어서 평가되어야 할 거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83P)
변동림이 신혼생활 4개월 정도 만에 헤어진 신랑 이상(김해경)을 곧 뒤따라가겠다는 약속은 이상이 1936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느라 건강이 악화된 후에야 실현되었다.
식어가는 이상의 손을 잡다
나는 12시간 기차를 타고 8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24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이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에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방금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千匹屋)의 멜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서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담당 의사가 운명은 내일 아침 열 한 시 쯤 될 것이니까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오라고 했다. 나는 상의 숙소에 가서 잤을 거다. 거기가 어디였는지 지금 생각이 안 난다. 다음날 아침 입원실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그의 운명을 지키려고 그 옆에 다시 앉았다.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7P)
이상과의 별리를 위해 동경에 다녀온 후에도 변동림은 당분간 빚을 갚기 위해 바에 나가서 일을 계속했다. 조선 최고의 인텔리 여성이 바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남달라서 본인의 자존감을 지키며 순수한 젊은이들의 이면과 사회현상에 대해 관조하는 자세를 가졌다. 그녀의 남편 이상은 그런 아내에게 차원 높은 인간의 꿈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 존재였다.
차원 높은 인간의 꿈을 갖추었던 이상
이상은 천재다. 천재는 천재로 탄생하는 거다, 천재는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생각을 창조하기 때문에 속인들의 눈에는 말없는 아이, 우울한 소년으로 보이는 거다.
탁월한 재주, 통찰력, 투시력과 차원 높은 인간의 꿈을 갖추었던 이상은 물론 반일사상을 의식적으로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 공기를 호흡하면서 자라난 청년의 피 속에 자연현상으로 발로된 것이 아닐까.(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4P)
이상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인간이 팔구십 년 걸려서 깨닫는 진리를 사 분의 일의 시간에 깨달아버릴 수 있는 경우,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천재라 한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사람들은 더 기대하기 때문에.(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5p)
이상 사후 완벽한 실종 상태에 들어간 그녀는 지난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상의 아내였다’고 고백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재혼한 김환기 화백 1974년도에 사망)
이듬해 나는 다시 동경에 갔다.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에 응모하려고 열심히 일본말로 시 같은, 소설 같은 산문을 썼다. 일본은 전쟁이 패전으로 기울면서 동경에는 식량 기분으로 하루 한 번씩 고구마 배급을 타던 때다. 방공 휘장을 친 거의 마지막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89p)
자신의 문학세계를 완성하고 자아실현을 꿈꾸던 변동림은 1944년 무명화가 김환기와의 만남을 통해 성을 김으로 바꾸고 김환기의 호였던 향안을 자기의 새로운 이름으로 선택한다.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데다 딸을 셋이나 둔 김환기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하고 편지로 서신을 교환하며 마음을 표현했다. 김향안의 부모는 자식이 있는 남자와 개가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사랑은 믿음이고,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라며 김환기와 재혼을 했다. 김환기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제목을 차용한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기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저자 이충렬)를 보면 3부에 변동림이 김향안이 되는 과정이 들어있다. ‘변동림_1942~1943년, 김향안_1944~1945년’
김향안은 이상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본인이라는 오해 속에서도 긴 세월 침묵을 지키며 온전한 김환기의 아내로 살았다. 김환기 화백은 김향안과 동행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일찍이 부암동에 환기 미술관을 만들고 그의 작품을 완벽하게 정리하여 후대에 남긴 김향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향안 여사는 김환기 선생의 인생과 예술에 있어서 절대적인 동반자이자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문필가이자 화가였습니다. <월하의 마음>은 1952년 부산 피난지에서 씌여진 여사의 수필 제목 입니다. 김향안 여사의 개성과 매력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이 글은 평소에 보여주던 여사의 단호하고 직설을 서슴지 않는 강인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여유 있고 성숙한 내면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또한 김향안 여사의 회화 작품에서 보여주는 섬세함의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의 글은 가능한 짧지만 그 속에 실로 함축적이고 밀도 있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합니다. 그 선명함과 세련된 날카로움은 일면 가볍고 황홀한 그의 회화 작품에 빛깔과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개성적인 문체로 쓰여진 사십년대부터 이천년에 이르는 육십년 세월의 기록은 그 자체로서 김향안 여사 자신의 일생에 대한 내면의 고백이며 김환기 예술 세계 이해를 돕는 바탕이고 환기미술관의 역사입니다. -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에 부쳐, 2005년 9월 1일 환기미술관 관장 박미정
19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김향안은 파리 소르본느와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이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김환기도 아내를 따라 파리에 갔고, 두 사람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서양의 미술세계를 만난 것은 김환기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4년 2월 29일,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만에 김향안 여사도 뉴욕에서 별세한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트체스터 공동묘지, 남편의 묘지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웠다. 예술가의 아내로서만이 아니라 수필집 《파리와 뉴욕에 살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등을 발간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스스로도 탁월한 예술가였던 그녀는 한국 예술사에서 두 천재의 아내, 수필가이며 평론가 김향안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월간 <한국수필> 11월호
-------------------------------------------------------------------------------------------------------------------------
월하(月下)의 마음
김향안
그러저러한 볼 일로 내가 허물없이 드나드는 어느 다방에 최근 웬일인지 난데없는 노년 손들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다방에 커피 맛이 싫지는 않으나 나오곤 한다. 가다가 낯선 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 쓸데 거기 하나 가득 청년 장정들이 어깨를 버티고 앉아 담소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후끈해지고 미소가 절로 부풀어 오르며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자신이 만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다 방문을 도로 닫고 되돌아 나올 때가 있다. 그런 날 나는 퍽 유쾌하다.
설혹 그들의 담소가 유치하고 가다가는 지나치게 건방 질 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탓할 바 없는 무관한 일이다. 정의와 용맹과 이상에 불타는 그들의 젊음은 오늘날 비록 그들의 조국이 낡고 병들었어도 내일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조국을 세울 수 있는 건전한 반석 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 청년을 사랑하고 아낀다 이렇게 오늘 느끼는 나는 어려서 몹시도 노년을 부러워했다 좀 오의 백발과 이마에 주름살이 어찌 도 그리 신기하였던지!
거울을 들여다보고 이마에 주름을 잡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성공하지 못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오늘 우산살이삼년에 이마에 무수한 잔주름을 발견하고 놀란다 갑자기 세월 들이 와 부딪히는 소리에 초조하다 지금은 분명 이 노년이 아니고 청년이 불어온 것이다 정리보다는 타협이 앞서고 용맹 보다는 아내를 먼저 꾀하고 이상 보다는 달걀을 주장 아 려드는 이런 자신이 나는 아직도 싫다 그러나 허세가 끝나는 날이 왔다 방을 빌려야겠는데 과년한 딸이 있어 세대를 들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였다.
나는 내가 이미 새댁이 아니라 사위를 볼 수 있는 연령의 가까운 딸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다, 문득 나는 나의 모든 허세가 절로 홈으로 지면서 순서로 돌아가는 자신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감미로운 새댁은 아니다. 내 앞에는 무수한 딸들과 무수한 사위들이 있다. 그들 또한 청년들인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자신이 있다. 동시에 내 자신의 인생에도 자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떤 경우를 당해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세월이란 아무렇게 맞춰도 들어맞는 것, 들어맞게 마련된 것이 인생이요, 자연이요, 또한 순수인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를 잃고도 자란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잃고도 산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도 어머니는 오래 산다. 서울 기후가 부산에 와서도 썩 잘 들어맞는다. 우리집 주인 진주댁은 내가 새댁이 아닌 것을 인정한 후 남양 따뜻한 6조 다다밋방을 빌려 주었다.
한월(寒月)이 영창으로 하나 가득 비치는 밤, 나는 누가 내게 일러준 것도 아닌데, 고향이란 다른 게 아니라 가족이 있는 곳이라고 누가 은근히 들려준 듣도 싶은 그런 생각에 공명하면서 내일 아침 거울에 또 하나 주름살이 는다 해도 싫지 않을 것이고 어려서 본 조모의 백발이 내 머리에 왔을 때 심경은 부처의 미소와도 통하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여 보는 것이다. - 195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