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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Dec 31. 2018

수필가 진화 이경희의 수필 DJ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다

수필 DJ                              마광수의 인생론 《멘토를 읽다》 


                                                       진화 이경희 

                                                      


 2018년 가을, 후쿠오카에서 윤동주와 마광수를 만나다

 2018년 10월 12일~15일 일본 큐슈지방의 나가사키, 후쿠오카 일원에서 한국수필 해외심포지엄 및 문학기행이 있었다. 심포지엄에서는 니시오카 겐지 교수가 ‘윤동주와 후쿠오카와 나’, 장호병 수필가가 ‘수필을 통해 본 윤동주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다.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을 이어가는 일본인 학자와, 양국의 해묵은 불화와 악연에도 불구하고 후쿠오카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정거장’이 되기를 희망하는 한국의 수필가들이 모여 가을밤을 보냈다. 원폭 피해지역인 나가사키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후쿠오카에는 윤동주 시인이 머물던 형무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쟁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랑과 소망을 노래한 젊은 시인 윤동주가 순절한 낯선 땅에서 우리는 서시를 함께 낭송했다.      

 윤동주의 시 정신과 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국문학자이며 문인인 마광수 교수에 의해서다. 1979년 28세의 나이로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가 된 마광수는 1983년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모교 연세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왕성한 필력으로 학문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을 썼다. 그러다 1989년 발간한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화제와 논란의 대상이 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그의 시 제목이었다. (함석헌 선생의 글에 나오는 ‘들(野)사람 얼’은 본능에 솔직하고 이중성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마광수)      

 그 이후에도 1989년 소설집 <권태>, <즐거운 사라>,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을 출판하며 관심과 비판을 받다가, 1992년 강의 도중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죄명은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였다.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고, 해직이 되고, 복직이 되고,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는 중에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은 마광수 교수 체포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670쪽에 달하는 사건백서를 냈고, 전공과목 강의를 하지 못하게 하거나 학점을 줄 수 없는 특강에도 500명씩 몰려들었다. 그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꺼낸 성담론은 격렬한 찬반 의견으로 온 사회를 들끓게 했다. 1993년 초부터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주장하는 문학계와 문화연예계에서 마광수 교수의 복직운동이 일어났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에서 ‘마광수의 죄는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라고 평가했다.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문학기행을 하는 내내 마광수 교수가 왜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여 의미 있는 존재로 불러냈는지 궁금했다. 두 문인은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같은 학교(연희전문,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둘 다 20대에 시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두드러지는 저항정신 보다는 고난 속의 희망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휴머니즘을 쉬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활동 기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두 문인이 모두 초창기에 별, 바람, 사랑을 소재로 한 시와 자기 성찰의 산문을 썼다. 마광수는 윤동주의 시에서 부끄러움의 정서를 찾아냈다. 이외에도 어떤 비유전적 문화유전자(meme)가 윤동주와 마광수를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마광수 교수가 다음과 같은 문학관으로 탈이데올로기적인 서정성에 무게를 두고 윤동주의 시를 해석했기에 지구시민들이 공감하는 문학으로 남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또한 “문학은 무식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도하여 순치시키는 도덕교과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문학이 근엄하고 결백한 교사의 역할, 또는 사상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 된다면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 만다.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인 것이다.”라고 보았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1》 (인물과사상사, 2006) 186페이지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시대를 내다보다

 마광수 교수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일과 놀이와 사랑이다.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이 좋아하는 놀이와 하나가 되면 더 없이 좋은 일이기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 학부모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시키라고 조언을 하곤 했다. 자신도 문학과 미술을 좋아했기에 글을 쓰면서 교수로 일했고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90 권이 넘는 자신의 책 표지와 삽화를 대부분을 직접 그렸고 그림전시회를 19번이나 하며 일을 놀이 삼아 즐겼다.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큰 창조적 에너지를 준다고 주장했는데 상상력과 성적 판타지를 글뿐 아니라 솔직담백하고 천진난만한 그림으로 풍성하게 표현했다.      

 그의 시각이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고 열려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마치 감각적이며 솔직한 욕구를 표현하는 사회적 흐름에 대하여 미리 내다본 듯 했다. 마광수 구속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월드컵 축제에서 ‘붉은 악마’라는 도발적이고 독특한 이름의 응원단이 출현했다. 젊은이들은 각양각색의 염색을 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귀고리, 목걸이, 팔찌를 하고 얼굴에 그림을 그린 채 응원전을 펼쳤다. 예상 외로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치우고, 싸우거나 다투는 청소년 범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마치 상수도처럼 공부든 교훈이든 일방적으로 많이 먹이기만 하지 말고 하수구를 열어 풀어내야 한다는 마 교수의 주장이 현실로 나타났다.      

 자식을 이 학원 저 학원에 보내며 과다한 사교육비를 들여 일류대학에 진학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 노력으로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다. 공부는 역시 머리로 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머리가 나쁘면 아무리 고액 과외를 시킨다 하더라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다. 그 대신 그 자식에게는 ‘공부’이외의 ‘장기’가 꼭 있게 마련이다. 그 장기를 찾아 자기의 작성에 맞는 ‘일’을 하도록 부모는 자식을 독려해 주고 응원해 줘야 한다.- 마광수, ‘결혼을 읽다’, <멘토를 읽다> 75p     

 최근에는 20대의 청년 7명이 학교를 떠나 5년 동안이나 합숙하면서 작사 작곡을 하고, 춤과 노래를 만들고, 자신의 동영상을 제작하고, 캐릭터 상품을 디자인하여 생산에 참여하고, SNS로 마케팅을 하며 세계적 아이돌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룹의 이름은 방탄소년단(BTS)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1960년대의 아이콘 비틀즈와 비교된다. 그들의 현란한 모습을 보며 언제 어디선가 보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마광수 교수가 말하던 인공적으로 꾸미는 아름다움이 이미 남녀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사회문화계 전문가들은 그러한 흐름이 문화현상을 넘어 사회현상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미국의 한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벌써 그들의 마케팅 전략을 예로 들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7명의 소년이 만든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서는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세상과 소통하며 자기조직화된 ‘호모파덴스’(이민화, 《호모파덴스》, 2017)가 나타났다.      

 요컨대 ‘창조적 인간’이 되는 것만이 운명을 극복하는 길이고, 창조적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또한 창조적 놀이꾼이 많은 사회일수록 발전의 속도가 빨라진다. 노동집약적 산업보다는 기술집약적 산업이 낫고, 기술집약적 산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력에 바탕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싸구려 옷을 덤핑으로 수출하는 것보다는 디자인을 개발하여 고급품을 수출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마광수, ‘창조적 놀이정신은 운명극복의 지름길’ 중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그 날까지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탄의 대상이었고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소설 속의 여자 ‘사라’에 대해 이유 있는 변론을 했다. 마광수 교수가 소설 《아라베스크》에서 황진이를 불러내는 환상적 이야기를 읽노라면, 27세의 나이에 낙화처럼 떨어진 천재문인 허난설헌도 불러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유 없이 그렇게 썼겠어요. 문학의 품위주의, 양반주의, 훈민주의 이런 것들에 대한 반발이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야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어법이나 전체적 틀은 경건주의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꼭 결론에 가서 권선징악적으로 맺는다거나 반성을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글을 맺잖아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한 반발로 사라를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우리나라 소설에 사라 같은 여자 있나요. 다 자살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러지.”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1》 (인물과사상사, 2006) 187페이지     

 마광수 교수는 문약해 보이지만 신념과 소신이 있고, 독특한 개성과 색다른 상상력을 가진 유미주의자였다. 만나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솔직할 뿐 아니라 예의 바르고 평화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정치, 문화, 경제는 삼권분립이 되어야 한다. 자연이 곧 신이고 야하다. 정치, 종교, 윤리, 도덕 대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 - 2012년 12월 22일 채널 A <쾌도난마> 인터뷰 중

 다시 태어나면 미술가로 살고 싶다. 그림은 검열 받지 않으며 표절도 없다. 요즘은 그림전시회를 하고 있고 글 쓰고 책 쓰며 단조롭게 살고 있다. - 2014년 9월 3일. 오봉옥 시인의 책치 22회


 굳이 여성신학자 현경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결국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그가 남긴 행복론, 일과 놀이와 사랑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 지켜보며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애쓰려 한다.                     




<마광수의 수필>     

                                                     일과 놀이를 읽다      

                                                            마광수     


 일과 놀이가 합치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그런 삶이 최고의 삶이다. 생각해보라. 노래 부르기를 최고의 놀이(취미)로 여겼던 사람이 노래 부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가수로 일하게 된다면 얼마나 신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출발점에서 섰을 때, 다시 말해서 성년이 되었을 때 첫 번째로 지향해야 될 것은 자신이 앞으로 직업으로 삼아 먹고 살 일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즉 취미와 일치시켜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 그때에 해당된다.   요즘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끝내는 사람보다 그 다음 절차로 대학교나 전문대학에 입학한 후 더 공부하려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럴 경우 어떤 전공의 학과를 선택해서 진학하느냐 하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와 전공을 최대한도로 일치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학에서 오래 가르쳐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전공학과를 선택하려 입학한 학생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수에 맞춰서 학교나 학과를 골라 ‘일단 입학하고 보자’는 식으로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이 많다는 얘기다. 그런 학생들은 입학할 때의 기쁨은 잠시뿐이고 곧바로 괴로운 학교생활을 해야 해 나가게 된다. 1학년 때 그런 사실을 심각하게 절감하여 다음 해에 학과 변경 위해 다니던 대학이나 다른 대학에 재입학시험을 보는 학생이 드물게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체념적 정착’의 단계에 들어간다. 학생들이 살아가게 될 미래의 삶은 대체로 불행한 삶이다(소득 수준과는 상관없이).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수학을 잘하는 편이어서 문과만이 아니라 이과도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가장 안전한 삶을 위에서 흔히들 그러는 대로 의과대학의 지원하기를 바랐다. 나는 중고교 시절에 미술과 문학에 큰 취미를 붙였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쯤부터는 미술보다 문학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 국문학과로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의대를 가라니 난감했다.

 그런데 가만히 여러 모로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소설 『의사 지바고』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시인지망생이었는데 지바고도 시인이었는지라 의사를 하면서 시도 쓰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좁혀본 결과 중학교 때 생물 시간에 개구리 해부 실습조차 못했던 나 자신의 소심한 성격이 생각났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서 한사코 의과대학은 못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다음은 국문학과를 가고서도 주위에서 친구가 많이 들어왔다. 1967년은 우리나라가 한창 가난할 때였다. 다시 말하면 지독한 후진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어를 가르쳤던 문학반 담당 선생님까지 국문학과에는 비전이 없으니 영문학과를 가라고 충고하셨다. 국문학과(國文學科)는 곧 궁문학과(窮文學科)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 공통어요, 취직에도 으뜸인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났다고 하셨다. 영문학도 문학은 문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영어단어 외울 때 지긋지긋 했던 생각이 들어 내 소신대로 국문학과를 지망하고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한 선택이 잘한 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재학 중에 나는 시는 시대로 쓰면서 직업으로 대학교수를 지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하여 조교 장학금을 받으면서 소정의 과정을 마쳤는데, 만약 영문과에 갔었더라면 당시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미국 유학이 불가능하여 교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문학과 교수가 되려면 미국 박사학위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얘기가 조금 빗나가기는 했지만 아무튼 자기의 취미(놀이)를 전공과 일치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설사 여러 주변 여건 때문에 ‘일’과 ‘놀이’를 일치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만의 ‘놀이(취미활동)’를 ‘일’과 별도로 가지고 있어야만 그만하면 피곤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또 ‘재미있는 인생’도 된다. 앞서 언급한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소설 『의사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일생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의사이면서 시인이었기에 좀 더 낭만적인 삶, 낭만적인 사랑을 맛볼 수 있었다. 그가 거쳐 간 여자만도 세 명이나 된다. 시를 잘 쓴다는 사실이 여인들로 하여금 그를 사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놀이를 할 수가, 취미 활동을 할 수가 있느냐는 질문이 튀어나올 수 있다. 하지만 놀이에도 ‘비싼 놀이’와 ‘싼 놀이’가 있다. 한국 같은 나라에선 골프가 비싼 놀이에 들고, 동네 조기축구회 같은 데에서 축구를 하는 것은 싼 놀이에 든다.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싸게 놀 수 있는 놀이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일만 열심히 하고 놀지도 않으면 스트레스에 휩싸여 일찍 죽는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요즘 들어 이렇게 바뀌었다. 일만 열심히 하고 놀지 않고 겨울 양식 준비만 하던 개미는 겨울이 오기 전에 과로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여름에 일은 안 하고 노래만 불렀던 베짱이는 겨울이 왔는데도 굶어죽지 않고 삼류 가수가 밤무대에 나가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베짱이가 일류가수가 되지 못하고 삼류 가수밖에 못 되었다고 쓴 것은, 프로의식 즉 직업의식 없이 놀기만 했다는 뜻에서 그렇게 쓴 것이다.

 일과 놀이를 합치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로 최상의 삶을 살게 된다. 피나는 노력이 프로의식과 함께 따라줘야 한다. 놀아도 잘 놀아야 한다. ‘놀 테크’라는 말이 요즘 새로 생겼다. ‘잘 노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고전소설 『이춘풍전』에 나오는 남주인공은 ‘놀 테크’ 없이 기생과 주색질만 했기에 재산 다 잃고서 패가망신한 것이다. 너무 잘못 놀았기 때문에 자살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 도박에 깊이 중독되어 빈털터리가 된 뒤 자살하는 케이스가 바로 그것이다.

 역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자기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 억지로 하다 보면 제 명을 다 못 채워서 일찍 죽는다. 몇 해 전에 어느 잡지에서 의사 노릇하던 사람이 의사 일을 그만두고 한정식집을 차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다들 부러워하는 직업인 의사가 그 사람 적성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한 작가들 중에 이상하게도 의사 일을 하다가 작가로 전업한 사람이 많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도 그렇고,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과 코난 도일도 그렇다. 그리고 독일 작가 한스 카롯사도 그렇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로 재밌는 놀이는 ‘연애 놀이’일 것이다. 연애는 전쟁놀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서도 피 튀기는 총격전이라기보다는 ‘심리전’에 가깝다. 한평생 연애 놀이만 하며 살면 물론 일과 병행하여도 가장 재미있는 삶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결혼(또는 동거)를 하더라도 ‘개방형 결혼’을 하면 아주 좋을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결혼이 바로 그런 결혼인 것 같다.

 더구나 요즘에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꽤 발전하여 모든 직장이고 다 토요일도 쉬는 ‘주 5일 근무제’로 되었다. 노는 날이 늘어나 전보다 좋아졌지만 노는 것을 오히려 버거워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하루 종일 놀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놀 테크’가 ‘일 테크’ 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일과 놀이와 사랑 세 가지의 상호 조화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사랑’도 ‘놀이’에 들어간다. 일과 놀이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애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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