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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Oct 07. 2019

가을에 읽는 수필

휴면계좌



진화 이경희


계절이 바뀔 때 옷을 정리하다 보면 주머니에서 생각치도 않았던 돈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천 원짜리도 좋고 만 원짜리면 더 기분이 좋다. 분명히 내 돈인데도 그럴 때는 마치 복권을 탄 느낌이다.

얼마 전에 스마트폰에 주거래 은행 앱을 깔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뱅킹을 하거나 365일 현금인출기를 찾지 않아도 송금과 결제가 가능하니 편리하기 그지없다. 앱에 평소에 쓰지 않던 여러 가지 서비스가 있기에 이것저것 누르다가 ‘휴면계좌’라는 항목을 눌러보니 놀랍게도 세 개의 계좌에 돈이 남아 있었다. 모두 1990년대에 만든 통장으로 두 개에는 만 원 내외의 소액이 있었지만 나머지 한 군데에는 20만 원이나 되는 잔고가 들어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두 개의 은행이 통폐합 될 때 정리하지 않은 계좌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20년이나 잠자고 있던 계좌를 열어 정말 예금을 찾을 수 있을까.  

어머니 88세 생신인 미수를 앞두고 한복 위에 입을 배자를 맞추러 광장시장에 나가던 길에 은행에 들렀다. 직원이 돈을 내주며 자기도 휴면계좌를 찾아봐야겠다고 웃었다. 그 길로 한복집에 가서 봐둔 양단 옷감으로 배자를 맞추었는데 옷값이 딱 20만원이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한 일이 있나, 아버지 돌아가신 후 오랜 세월 혼자 살아오신 어머니 미수를 어떻게 해드리면 좋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 들고 지쳤던 마음에 힘이 생겼다. 바닥을 보이던 감정계좌까지 온도가 올라갔다.

문득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찾아 쓰지 않은 또 다른 계좌는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민화 교수님의 페이스북 계정이 떠올랐다. 사사롭게는 사촌오빠지만 학창시절 수년 간 큰집에 사는 동안 몽상가인 내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공부의 신이다. 최근 들어서는 4차산업혁명과 인문학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것을 권했고,  4차산업혁명 리더 교육을 통해 큰 깨달음과 성장이 있었다.

보통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등의 SNS 계정은 본인이 관리를 하지 않으면 금방 잊혀진다. 오죽하면 망자의 계정을 지워주는 사이버 장례 분야의 일이 생겼을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계정은 주인이 살아있을 때의 온갖 화려한 일상이 무심하게 빛을 잃고 마치 폐가처럼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5,000명의 친구와 8,500여 명의 팔로워가 있는 이민화 박사님의 페이스북은 아직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소중한 자료와 귀한 메시지가 가득하고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 많은 분들이 계정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지 7주(49일)가 지나고 근무했던 카이스트 대전캠퍼스에서 추모 모임을 마치고 난 뒤 많은 사람이 ‘이민화’라는 이름에 태그를 걸고 게시판에 여러 편의 글을 올렸다. 논문지도를 받은 제자들, 함께 일했던 연구원들,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후배와 벤처기업인들이 성과물이 있거나 관련 자료가 생길 때마다 이민화 교수님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주인은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데 함께 묻힐 뻔 했던 타임라인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가끔 그 계정에 들어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지식을 인출하고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와 동력을 얻을 수 있으니 더 없이 든든하다. 내가 쌓아두지 않은 대용량의 지식을 아무 때나 찾아볼 수 있는 사이버 도서관일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에너지 충전 가상증강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견한 휴면계좌와 온라인 세계에 남아있는 가상공간 외에  돌아가신지 올해로 20주기가 되는 '아버지'의 존재야말로 그리워하면서도 잊고 사는 나의 비밀계좌다. 그 계좌엔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가 잔고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양식당에 데리고 가서 테이블매너를 가르쳐 주셨고, 일정액의 용돈을 주셨다. 월 2000원의 용돈 중 1200원은 버스승차권을 사고 나머지는 모아서 책을 사거나 연극을 보러 갔다.

책장에 책을 한 권씩 채워가며 연극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내 꿈의 다락방에는 습작노트가 쌓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로맨틱한 추억은 다락방 종이상자에 누렇게 변색되어 담겨있던 아버지의 연애편지를 읽는 일이었다. 서두에 젊은 연인이었ㄷㆍ 어머니의 이름을 부른 것 외에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필체는 현대적인 캘리그라피처럼 성글고 시원했다. 글을 읽고 쓰며 무엇이든 기록에 남기는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버지께 받았던 알맞은 용돈과 사랑의 비밀계좌 덕분이다.

휴면계좌를 찾고 멘토의 게시물을 읽으며 되살린 아버지의 비밀계좌는 깊은 산속에서 만난 샘물과 같이 메마른 일상에 생기를 더해 주었다. 의외의 장소에 숨긴 쪽지를 찾아내어 상을 타는 보물찾기처럼 앞으로도 까맣게 잊어버린 휴면계좌를 발견하는 기쁨을 종종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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