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화 이경희 Mar 24. 2020

다섯 번째 창

- 창으로 안과 밖을 보다

다섯 번째 창     


진화 이경희     


여행길에 특별한 느낌을 주는 창문을 만나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집의 표정을 읽는다. 계절에 한 번 정도 고궁에 들러 한지 발린 창호를 통해 들어오는 오후 나절의 빛을 바라보고, 산책하다 창이 예쁜 집 앞에서는 어김없이 걸음을 멈춘다. 저녁에 귀가 할 때는 한 울타리 안에서 마당을 함께 쓰는 이웃집마다 불이 켜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집은 사람이 들어야 생기를 얻고 창은 빛을 담아야 비로소 눈을 뜬다.     


<4월의 창>


15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올 때 가장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다락방 서재와 하늘로 열리는 천창이었다. 다락방에는 눈비가 오거나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누워서도 볼 수 있는 큼지막한 정방형 창들이 있다. 아른대는 봄기운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동산 쪽 창가에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 <4월> 아트포스터를 비스듬히 붙여두었다. 잠이 잘 안 오거나 작업이 안 될 때는 서재의 다른 편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시의 야경을 내다본다. 동쪽으로 멀리 남산 N타워가 보이고 밤새도록 차량의 불빛이 줄을 잇는다. 이즈음엔 웬일인지 밤에도 하늘이 환할 때가 많아 한동안 깊고 푸른 하늘에 그려지는 구름 그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보름 무렵 남쪽 천창은 나의 달빛 갤러리다.     



<밤의 하늘창>


작년 유월 스페인 여행을 할 때는 열흘 내내 다양한 모양의 창과 눈을 맞추며 그 이미지를 마음에 담았다. 오래된 건축물의 창은 이야기가 많고 표정이 깊다. 아라베스크 무늬가 레이스처럼 아로새겨진 아람브라 궁전의 창,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의 기기묘묘한 창, 내 키만큼이나 되는 두께의 석벽에 겨우 아기 손바닥만 한 빛의 통로를 내어준 첨탑의 창, 예술가들이 창작을 하며 오렌지나무 정원을 내다보던 창, 사람들의 발길에 반들반들해진 골목길에 각양각색의 화분이 놓여있는 창가 풍경은 꿈속에서 되살아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대문과 창문 외에는 담장이 견고하게 둘러쳐진 주택 양식은 마당이 보이지 않아 오롯이 가족들만의 공간으로 닫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베리아 반도는 아프리카 대륙 못지않게 햇볕이 강해서 나무덧창을 한 집이 많은데 아무리 궁금해도 엿볼 틈이 없다. 그래서 인가, 창에 나무덧문까지 닫혀 있는 집을 보면 상상력이 더욱 증폭이 되어 스페인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창마다 기기묘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의디의 집>


<알함브라 궁전의 창을 보면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다.>



2019년 연말 송년회 때 추억의 장면들을 담아두려고 평소에 하던 대로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얇은 커튼이 드리워진 실내를 들여다보며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는 내 모습과 실내의 파티 장면이 마치 이중노출처럼 유리창에 겹쳐져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었다. 하지만 나중에 단체톡으로 올라온 사진을 보니 그 순간 밖에 있는 나를 찍은 동료가 있었다. 그날 스냅 사진의 시점을 나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의외의 시선이 있었다니 ‘숨은 나’와, ‘눈 먼 나’가 불시에 맞닥뜨린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사분면으로 설명하는 ‘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에는 네 가지의 창이 나온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나(열린 나, open)’, ‘나는 모르고 너는 아는 나(눈 먼 나, blind)’,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나(숨은 나, hidden)’,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나(모르는 나, unknown)’를 상징하는 창은 만나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 넓어졌다 좁아졌다 열리는 정도가 달라진다. ‘열린 나’의 창을 넓게 가진 사람은 개방적이라 대인관계가 무난한 편일 테고, ‘아무도 모르는 나’의 창이 넓은 사람은 뭔가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같은 평면에 그려지는 사분면으로 과연 모든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전후좌우뿐 아니라 위로 열리는 창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 즉, 입체적인 피라미드의 꼭짓점을 그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공위성을 통해 자동차의 위치를 추적하는 GPS 위성과 같이 내 삶 전체를 조망하고 멀리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다섯 번째 창’이 있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한다.     


<수백 년간 허다한  삶과 죽음, 영광과 굴욕의 역사를 내다 본 작은 창>


<다람쥐도 드나들 수 없을 만큼 작은 고성의 창. 깊고 은말하다.>


창이 없는 집은 공장이나 감옥, 비밀스러운 지하실일 확률이 높다. 고급주택이나 리조트, 쾌적한 카페는 하나같이 널찍한 창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처음 만나거나 코칭을 할 때 상대방이 안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야 고객은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고성능 공기청정기가 있어도 햇빛을 불러들이고 환기를 하기 위해서는 가끔 창문을 열어 주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 현실에서 사회적 관계망이 끊긴 사람들 중에 온라인 SNS 매체인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라는 창을 통해 적절한 자기 노출과 표현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분이 있다. 얼마나 꾸준히 진정성 있는 내용을 공유하고 쌍방소통 하는가에 따라 멀리 사는 친구도 얻을 수 있고 폭넓은 지지그룹이 생기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올리는 게시물이 어느 정도 호응을 얻는가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오프라인에서의 관계 이상으로 공감능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여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쇼팽이 머물던 마요르카 섬 수도원의 창가. 창밖에 오렌지 나무가 서있다.>


아예 막다른 골목에 작은 창이 달려있는 방이나 깊은 산속 또는 광야에서 별을 헤아리며 사는 이가 있고 수련이나 창작을 위해 기꺼이 고독을 감수하는 구도자나 예술가도 있지만, 그들 역시 세상으로 난 오솔길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고 한다. 나는 비록 세상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의식주의 일상생활에 얽매어 사는 소시민이지만, 은근히 꿈과 환상의 세계를 갈망하는 몽상가이기도 하기에 네 개의 창을 유연하게 여닫으며 다섯 번째 창이 있는 다락방에 자주 올라가고 싶다. 때때로 하늘창을 열어 가상현실의 꼭짓점에 시선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열린 나’의 창을 좀 더 넓히며 내 삶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하는 일이 불확실한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호텔이 된 톨레도의 수도원. 가장 높은 곳에 서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작가의 이전글 가을에 읽는 수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