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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Jun 30. 2020

사람책을 읽다

- 사람풍경

사람책을 읽다     


 진화 이경희


 요즘 한 사람을 열심히 탐독하고 있다. 이제 태어난 지 8개월 된 손녀다. 일주일에 서너 번 만날 때마다 머리끝에서 발끝, 눈빛과 표정, 손발의 움직임까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라 그럴까,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루하루 표정과 행동이 달라지고 옹알이가 발전하는 경이로운 모습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희한하게도 아기 얼굴에서 부모와 조부모인 우리 부부뿐 아니라 윗세대의 모습까지 얼핏 보이다 사라진다. 때때로 아이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니 신비로운 일이다.


 매 순간 새롭게 기록되는 ‘8개월 된 사람책’과 동행하는 길에는 의외의 기쁨과 놀라움이 있다. 마치 보물섬에 초대된 기분이 들고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하는 그날부터 온전한 존재로 생명 부음을 받는다는 확신이 왔다. 그 증거로 손녀도 만날 때마다 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익힌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파장이 있다.


 아기는 내가 바꿔 낀 안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옷에 달린 단추와 시계를 만지작거린다. 알록달록 부엉이 무늬가 있는 옷은 끄트머리를 끌어당겨 조물락대다 입으로 가져간다.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순간이 깨우침의 시간이다. 안아달라고 울다가 아빠의 어깨에 기대며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집에 걸린 그림 액자만 보면 팔을 흔들며 웃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에 불이 확 켜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기가 조금 더 자라면 그림 그리는 기쁨을 함께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대형문고에 가는 길에 36색의 무독성 색연필과 색칠공부 책을 사며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할머니가 되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망아지나 송아지 같은 동물들은 태어나면 바로 일어나서 뛰어다닌다. 그에 비하면 수년 동안 오로지 엄마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 아기는 한없이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매일 성장하는 속도가 눈부시다. 백일과 돌을 지나며 몸무게가 2배~3배로 성장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지만 보이지 않게 자라나는 지혜와 지식은 극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뇌세포에 불이 켜지고 새로운 길이 뻗어나가는 것을 상상할 때마다 경이롭다. 그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고 매일 손녀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아둔다. 한 세대를 훌쩍 건너뛸 때까지 30년 이상 아기 울음소리가 그쳤던 집안에 생기가 돌고, 다섯 식구가 아기를 중심으로 그날의 뉴스거리에 열광하는 변화는 ‘코로나 블루(우울증)’를 이겨내는 힘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 거친 세상에 새로 태어난 아기들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슬그머니 일어나기도 하지만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잘 적응하고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가리라는 믿음이 크다. 그 근거로 3kg의 작은 생명이 찾아온 후로 우리 집안과 내 마음속에 새로운 긍정에너지의 샘이 터지고 든든한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평소 말이 없던 아들 며느리와 긴말하게 소통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며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비로소 실감하는 나날이다. 아이돌보미 하던 분이 오지 못하게 되어 일주일에 사흘은 할머니인 내가, 이틀은 아기의 외할아버지가 손녀를 돌봐주시기로 했다.


 매일 사진을 찍고 글로 남기는 습관은 관찰과 탐색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표현하는 내 삶의 방식이기에 손녀라는 사람책을 보다 충실하게 읽어내려고 한다.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하고 그림 그리고 놀며 아이가 자신의 캔버스에 행복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채워나갈 수 있도록 동행할 참이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고 1인 가족까지 늘어나면서 자녀양육이 공동체의 일이었던 시대가 지났다고 하지만 내 아이를 잘 키우고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책임이다. 지구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면서 배워나가는 학교다. 그 중에 선물로 찾아온 자녀들을 키워서 다음 세대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은 필수과목인데 소중한 아이들을 학대하고 생명을 해치는 것은 꼭 필요한 교과서를 찢어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모든 사람은 천천히 읽고 깊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있는 힘을 다해 자라나는 생명’을 북돋우며 치열한 여정에 동참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신간 사람책’을 펼쳐 든다.          


수필가 이진화 

khgina@naver.com

(사)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작가회 편집주간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고양시문인협회 회장 역임

저서: 『신을 신고 벗을 때마다』, 『마음의 다락방』, 『두 개의 의자』 외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경기도문학상 본상(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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