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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Jan 24. 2018

열대와 한대 사이

여행과 출장의 트렁크와 함께


한 기업의 해외연수에 동행하여 강의와 코칭을 하고 돌아왔다. 여행을 하는 틈틈이 일을 하며 한여름에서 한겨울의 나라로 이동했다. 돌아오니 영상 40도와 영상 17도의 온도 차이가 57도나 된다. 이삼일 전만 해도 적도 아래서 땀이 비 오듯 했는데 모자와 목도리를 감싸고 남은 눈이 다 시릴 지경이다. 우리 몸에 이렇듯 큰 영향을 끼치는 기후가 마음엔들 영향을 주지 않겠는가.



나는 종종 몽골 초원에서 말달리던 유목기마민족의 DNA가 내 안에서 작동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남방에 가보면 더위 속에서도 끈질기게 역사를 이어가는 남방계의 혈통도 있는 게 아닐까 추측을 하곤 한다. 추위를 몹시 타고 여름과일을 좋아하는 것이나 동글납작한 얼굴에 골격이 가늘고 코가 작은 용모도 남방계의 특징이라 조상 중에 베트남 할머니도 한 분 정도 계시지 않나 상상을 해본다.


물론 상상도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전혀 경험해보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이번에 갔던 말레이반도의 두 나라는 내 기억에 깊이 아로 새겨진 스무 살 무렵의 추억과 연결이 되어 있다. 대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부모님이 살던 인도네시아에 합격증을 들고 간 것이 1970년대의 일이다. 가족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는 싱가포르까지 큰 동생과 나를 배웅해 주셨다. 1965년에 독립한 싱가포르는 그때 한참 국력을 다지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였다. 리콴유 수상의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아시아적 권위주의 정치는 31년 간 싱가포르를 아시아 최고의 부국으로 끌어올렸다. 말레이시아의 한 주였다가 떨어져 나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기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싱가폴은 엄격한 시스템 속에서 통제되고 정돈되어 있어서 안정감 속에서도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어린 새공원과 보태닉가든이 아날로그 관광지라면 이번에 본 수퍼트리 그로브의 레이저빔쇼나 골드 포레스트 습지 식물원은 마치 아바타류의 SF 영화를 보는 듯 가상증강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수십 미터 높이의 식물 기둥과 인공지능 제어장치 등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디지털기술과 아날로그기술을 결합시킨 결과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그때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에 실패했다면 아버지가 딸을 위해 미리 봐두었던 싱가포르의 영국계 여자대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텐데 한 순간의 선택은 아주 다른 길로 운명을 이끌어간다. 아마도 평생 해외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오늘의 삶과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

싱가포르에 비해 중세부터 국제해운업의 중심지였던 말라카는 도시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15세기부터 동양과 서양 무역의 각축장이었던 말라카는 수많은 민족, 나라, 종교, 문화의 집합지였고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어우러져 동남아 속의 유럽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백 년 동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점령하고 무슬림, 불교, 힌두교, 기독교가 교차하며 제각기 색깔을 드러내는 묘한 곳이다. 인종조차 다양하여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다름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공존하는 고도였다.

닷새만에 영상 40도에 모든 것이 녹아든 도시를 떠나 새로 연 인천공항 제2청사에 들어서서 트렁크에 넣어둔 겨울옷을 꺼내 입으며 도리어 낯선 나라에 온 느낌이 들었다. 고객의 회사에서 단체로 온 분들을 배웅하고 30분 정도 새 공항 청사에 머물며 탐색을 했다. 셔틀버스 승차권을 사놓고 마치 외국인처럼 청사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공항 구석에는 머리에 히잡을 쓴 한 무리의 말레이시아 여성들이 어그부츠에 다운점퍼를 입고 사진을 찍느바빴다. 현수막에는 기업연수라고 써있었지만 무슨 기획사 이름이 있는 걸로 봐서 한류 문화탐방을 온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영하 10도가 넘는 겨울왕국이 신기하고 호기심 넘치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는 생활인은 갑자기 무덤덤한 느낌이 든다. 세련됨 속의 긴장감, 혹시 그들이 느끼는 우리나라의 인상이 아닐까.



영하 17도 시베리아 동토의 추위와 영상 40도 열대 남방의 진득한 열기가 소용돌이치며 화해하기 위해서인가 머릿속이 어리벙벙하다. 열대와 한대의 피가 공존하는 나의 본향은 어디인가. 매순간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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