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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May 07. 2018

성(城)을 찾아서

진화 이경희


지난 사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국립극단의 연극 <성>을 보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을 보러 다녔던 명동 시절 국립극장이 30년 간 금융기관 사무실로 쓰이다 명동예술극장으로 돌아왔지만 최근에는 자주 가지 못했다. 5년 전 프라하에 다녀온 후부터는 카프카와 소설  <성>에 대해 부쩍 관심이 생겼다. 그 작품이 프라하성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시 고전이 바탕이 된 연극은  예술극장에서 보아야 제격이다.


카프카가 미완성작으로 남긴 소설 <성>의 주인공 토지 측량사 'K'는 분명히 성의 부름을 받고 마을에 도착했지만 성에 들어가는 허가를 받을 길이 없고 관계자와 직접 접촉을 할 수도 없다. 이방인인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하나 같이 의혹에 싸여있고 그의 입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정하다. 사랑, 일거리, 거주지,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 없이 하루하루 날짜를 알리는 종소리와 때도 시도 없이 쏟아지는 눈발이 허둥대는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인공 'K'의 고군분투가 안쓰럽다. 들어가려 애쓰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성> 이야기는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을 닫아걸면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성채의 속성은 체코의 최고의 작가 밀로시 우르반의 <일곱 성당 이야기>에서도 그려진다. 2014년 6월, 한국어 번역판 출판기념회와 소설 낭독회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작가의 체코어 낭독은 신비로운 리듬과 파장이 있었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일곱 성당 이야기>는 1999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0개국에서 번역이 된 작품이다. 특히 독일과 스페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미스터리 고딕 소설로 일곱 개의 성당 중 한 곳은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장소다. 우연찮게 <일곱 성당 이야기>의 주인공도 이름이 하필 'K'다. 홍대 앞 낭독회에서 만난 작가는 체격이 아담하고 내성적인 모습이 연극 <성>에 나오는  'K'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가상현실세계와 AI를 다룬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의 이름도 'K'다. 시공을 초월하여 도처에 'K'가 존재한다. 소설 <성>에 나오는 최초의  'K'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체코에서 이방인처럼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 자신의 아바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흔들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성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모든 현대인들은 'K'라는 익명성으로 대표되고, '성'은 거부, 단절, 은폐, 억압, 권위, 제도, 또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금방 닿을 것 같지만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성, 내가 다다르고자 애쓰지만 입구조차 보이지 않고 가파른 성벽만 보이는 나의 성은 어디일까. 아직도 꿈꾸고 있는 새로운 세상인지, 반드시 나아지리라고 믿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웅장한 성의 윤곽이 있다.



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월례 미팅을 위해 찾은 강남의 삼성역 근처에도 코드 없이는 접근이 어려운 현대판 성들이 즐비해 있었다. 백화점, 호텔, 무역센터, 대기업 사옥, 그 모든 빌딩에는 나름의 보안체계가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이 있다. 내가 찾아간 세계적 공유사무실 건물은 입구의 높은 회전문 위에 커다랗게 ‘환영(Welcome)’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지만 첨단의 성에 들어가기 위해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오가며 이리저리 경로를 탐색하다 실패하고 결국 내부의 멤버를 통해 빌딩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카드가 있어야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방문객에게는 높은 문턱을 두어 보안을 유지하고, 입주한 사람에게는 차별화된 편의성과 안락함을 주는 이중의 전략을 쓰고 있었다.



우리 집은 정원이 있는 소규모의 공동주택으로 대문이 항상 열려있다. 대신 대문 앞에 경비실에 있어서 우리 집뿐 아니고 막다른 골목의 여러 이웃집도 덩달아 보안 유지를 한다. 붉은 벽돌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물에 나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어떤 이들은 우리 단지를 ‘비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오래된 집이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가족의 작은 성이다. 청년 시절 집이 없을 때는 지나가다가 불 켜진 집만 보아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평생학습을 시작한 중년에는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가 진리의 성으로 보였다. 앞으로는 세대 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와 코칭 빌리지를 계획하면서, 동유럽이나 남유럽에 가서 고성에서 사계절 동안 인생의 저서를 쓰고 싶은 꿈이 있다. 성에 다가갈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은 성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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