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20대엔 늘 가성비를 따졌다. 실용적이고 가장 싼 것을 사야해서 섣불리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가장 신났던 순간은 딱 좋은 디자인, 딱 필요한 제품, 딱 취향에 따른 소비만 했음에도 '생각보다 생활비가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던 때였다. 나답게 산다는 만족은 열등감을 박살냈다. 그제서야 우리집의 가난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용기가 생겼다.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객지서 근무하셔서 8년간 외가에서 살다가 국민학교 1학년 충청남도 천안군(現 천안시)로 이사왔다. 지금은 두 기관 다 없어졌지만 1992년 천안에는 소년교도소와 국가보훈지청이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소년교도소로 발령나서 집을 구했고 2년 후에 어머니도 보훈지청으로 가게 돼 다섯 식구가 처음으로 모였다. 1998년 중1에 서울로 올 때까지 6년. 5명이 함께 산 기간은 그게 전부다.
천안 살 때까지는 별 의식이 없다가 서울로 전학와서 우리집이 친구들보다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껏 자연에서 놀고 직접 키운 옥수수와 고구마를 간식으로 먹었다. 그런데 서울에선 친구들과 놀려면 햄버거를 사먹고 즉석사진을 찍거나 노래방을 가야 하는데 한 달 용돈 만원으로는 불가능했다. 반 친구들은 10만원씩 받았고, 일찌감치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을 듣고 배워 가난하다고 소문난 친구는 은근히 피했다.
우리집은 부모 둘 다 직장이 있었지만 솔직히 강남에 살 수준은 못 됐던 거 같다. 다른 교육열이 넘치는 가정처럼 학군지를 찾아 온 것도 아니었다.
1998년 외환위기로 정부 구조조정에 따라 천안보훈지청이 폐청됐다. 동료 대부분은 대전으로 발령 신청했는데 어머니는 애들 생각해 미친척 서울을 썼다. 폐청 직원을 배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배동 남부보훈지청으로 배정받았다. 국가직 공무원이어도 시골 촌동네에서 남부지청으로 전입오는 경우가 없어 사람들은 어머니가 윗선에 빽이 있는 줄 알았다.
새벽 6시에 시외버스를 타고 천안에서 서울까지 통근하기를 삼 개월. 애들을 서울로 데려오기엔 무리고 통근도 힘들어 명예퇴직을 고민하던 찰나, 시세보다 낮게 공무원에게만 임대해주는 아파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탕비실에서 임대권을 얻은 직원이 잔금부족으로 못 들어 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찾아 본거다. 어머니는 마침 만기된 적금이 보증금에도 딱 맞고 1순위 신청조건에 해당돼 그 직원에게 자기가 신청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또 미친척 들이댔다. 5년 임대권이지만 8급 말단 공무원이 강남에 입성한 것은 하늘의 도움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
다만 하느님은 하실 일 다했고 여기서 버티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몫이었다.
전학 오자마자 본의 아니게 왕따가 됐다. 선생님이 '전학와서 적응할 동안 도와주라고 붙여줬던 친구'가 반에서 왕따가 됐는데 그녀가 나를 꽉 붙들고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 했다. 겪어보니 그 친구는 남 무시하듯 말하고 태도가 얄미웠다. 같이 다니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한달동안 거의 말을 안했고 친구를 못 사겼다.
그것이 전화위복이었을까?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다보니 가난하다는 게 알려지지 않았다. 심하게 자존심 상할 일은 다 피해갔다. 그리고 묵묵히 관찰한 덕에 알게 됐다. 강남에선 성적이 권력이다. 난 강남에 적응할 방법으로 공부를 택했고 반 등수가 떨어지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살어음판 걷듯 3년을 보냈다. 다들 학원을 서너개씩 다녔지만 가구도 길에서 주워다 쓰는 형편에 학원다니고 싶다는 말은 못했다. 학원가기 싫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 보내주면 겁나게 열심히 할 텐데.
대학민국은 2021년 고교 무상교육이 전면실시 됐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제도적 변화인지 가계부를 열어보다 이해했다. 나는 학비를 내고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부모가 전적으로 부양했기 때문에 얼마나 돈이 드는지 몰랐다. 그저 '학원도 안다니고 용돈도 적은 내 처지'만 보여서 스스로 컸다고 착각했다.
가계부를 보면 고등학교 3년간 납부금과 급식비로 총 1090만원 정도를 썼다. 방학을 제외하고 계산하니 매달 40만원 정도를 냈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적은 돈이 아니다. 나 때 고교 무상교육 했다면 좋았을 걸. 당시 단과 학원비가 20만원 정도였는데 그 돈이면 그렇게 가고 싶던 수학과 영어 학원에 다닐 수 있었을 거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필요한만큼 쓰시되 낭비하지 마십시오' 라고 교육했다. 그러나 나는 어쩌나 눈치를 봤던지 필요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참았고 체면 상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소속될 방법을 무던히 연구해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봤을까?
생각해보면 어머니 영향이 컸다. 그 분은 자신을 위해서 한푼도 쓰지 않았다. 화장도 한 번 안했고 번 돈 모두 가정에 쏟아부었다. 게다가 간혹 뭘 사달라고 하는데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아무 대답을 안한다. '안돼. 돈이 없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입을 꾹 닫고 계시면 알아서 눈치껏 물러선다. 어찌 자기를 위해 한 푼도 쓰지 않는 어머니에게 불평할 수 있을까. 동생은 과학고 준비를 포기했다. 수학을 특별히 잘했고 학원에서 과학고 준비반을 합격했지만 매달 60만원씩 든다는 말에 어머니 표정이 너무 슬퍼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안했다는 걸 다 커서 들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어릴 적에는 나 밖에 몰라서 열등감의 근원을 가정환경에서 찾으려 들었는데, 가계부를 들여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마흔. 진짜 여윳돈은 없었을 거 같다. 서울 온 지 일년 후 명예퇴직을 하셨다. 공무원 아파트에 사는 5년 동안 수입은 줄었고 할머니 병원비로 지출은 늘었다. 임대기간이 끝나는 때가 나 고3이라 월세방이라도 구할 수 있게 대비해야 했으니 여유가 없었을 거다. 그리고 언니 대학교 등록금 대출과 고등학교 학비로 매달 40만원씩 드는데, 학원은 커녕 필요한 만큼 쓸 돈도 쉽지는 않았겠다.
그런 살림을 운용하면서도 배곯지 않았고, 우리는 어머니 눈치를 봤을지언정 돈돈 거리는 노예로 크지 않았다. 그 수준에서 그 정도 살아 냈으면 열등감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졌어야 하는 게 맞다.
사전에 가난(家難)은 '생존에 필요한 식료품, 위생과 보건, 의식주 및 최소한의 교육 등 기본적인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기초 필요에는 아끼지 않았다. 천안 살 적에 나와 동생은 6년간 치아교정을 했다. 부정교합을 방치하면 외관상 좋지 않고 신경이 눌리거나 지능저하가 올 수 있다는 정보를 듣은 부모는 천안 시내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교정을 시켰다. 기본 검진에만 3만원씩 나가고, 보정기 틀하나 제작하면 120만원이 드는데 아이 성장에 필요하다며 아끼지 않았다.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아 비오면 진흙창이 되는 시골 동네에서 교정한 애는 나 밖에 없었다. 서울에 와서 봐도 부정교합 치료를 하는 친구는 별로 못 봤다.
정확히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집은 당시에도 절대적 가난은 지나갔다. 아버지는 천안 살 적에 '우리는 상중하에서 하, 하에서 상 정도 산다.'는 말을 자주 했다. 완전 '하의 하' 수준에서 두 사람이 성실하게 '하의 상'까지 올라왔다고 자부했으며 이유가 뭐든 강남에서 지금까지 버텼으면 두 분은 충분히 중산층까지 올라 선 셈이다.
나를 위축시켰던 열등감은 사실상 '가정환경이 주는 당연한 감정'이 아니고 '주변과 비교하면서 나 스스로 선택한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우리집이 너무 가난했고, 뭘 할 수 없을 것 같아 웅크리던 20대가 안타깝다.
지금 1인가구로 독립한 나는 어떤가? 자산과 소득 모든 부분에서 '하의 하'다. 그러나 허투루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서 열등감을 선택하지 않을 거다. 그게 어머니가 가계부와 적금통장을 전달한 목적이라는 걸 이제 알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20대에 경제관념이 없었다. 개념없이 소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뭐든 싼 것만 골랐으며, 돈 없단 말이 창피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돈을 쓰면서 배워야 할 경제적 가치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고, 돈을 벌면서 배워야할 경제적 책임의 무게를 모르고 학교와 집만 오갔다.
그렇다 보니 대단히 모순된 사고가 있었다. '대학교 등록금과 용돈'을 당연히 받으면서도 '쓰고 싶어도 참고 가성비 따지며 아낀 몇 푼'이 더 크게 느껴져 빈곤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원도 진학하면 부모가 등록금을 줄거란 막연한 믿음으로 제 실속만 챙기는 철 없는 애새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관념을 쌓을 기회는 있었다. 전공이 수학인지라 2학년 때부턴 외양부터 씀씀이까지 확 바뀌는 동기가 몇몇 있었다. 과외를 여러개 해 돈을 벌어 좋은 옷 사입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도 어머니에게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면 어떻겠냐 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르바이트 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래서 돈 벌 생각을 접었다.
솔직히 당시 심정은 과외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수업할지도 모르겠고 질문에 답을 못할까봐 겁났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같이 천한 일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아버지 말씀도 있어서 부모에게 의존했다. 아니, 더 솔직히 들여다보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외모도 별로고 누굴 가르칠 실력도 없고 완벽하지 못하면 비웃음 당할까봐 불안했다. 다 안다는 듯 잘난 소리는 해대고 싶은데 모자란 부분을 들킬까봐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대학교 3학년쯤 되니 다들 해외여행은 한번쯤 다녀왔고,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로 휴학을 했다. 그 즈음 동기 하나가 미국 어학연수에 '얼마가 필요하고 어떻게 돈을 마련할지' 부모와 함께 상의한 이야기를 한다. 삼천만원을 부모에게 빌려서 우선 1년 연수를 받고 온 다음, 취업 후 상환 일정을 약속했다는 거다. 그 친구 아버지는 대학병원의사고 교회에 헌금만 매년 1억씩 한다고 들었는데 '부모대출에 상환'이라니! 주는 만큼만 쓰고 돈 문제를 입에 올려 본 적이 없던 나로선 별 세계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다. 대학원 1차 학기엔 성당에서 함께 교리교사를 하던 언니를 도서관에서 마주쳐 깜짝 놀랐다. 같은 학교인 줄은 알았지만 부잣집 딸이 근로 장학생을 하고 있다니! 병원장이던 언니의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는 좋은 혼처를 찾아주며 결혼하길 원했만 언니는 박사진학을 선언하고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는 중이었다. 물론 후에 좋은 곳으로 시집도 갔고 교수도 됐다.
그 두 가지 경험을 기억하면서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 일부라도 장학금을 받을 활동을 했다. 대학원 학생회 일을 하면서 몇 백, 학부TA강사를 하면서 몇 백 수준으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논문과 중등교원자격증을 어머니께 드리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교직이수를 했지만 고시공부를 하고 싶다. 나중에 결혼 할 때 하나도 손벌리지 않을테니 공부할 동안 조금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나마 부모와 나눠 본 경제관념 있는 대화였다.
우숩게도 복수전공으로 경제학을 했다. 거시적 경제변수가 어떻고, 국제정세를 논하며 똑똑한 소리는 할 줄 알았지만 '돈을 소비가 아니라 투자가 되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반푼이었다.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고시생활 9년에 삼천만원 내외가 들어간 것을 보고 허탈했다. 신림동 고시촌에 가서 온전히 3년간 시험에만 집중포화하면 그 정도가 필요하다. '어떻게든 혼자서 싸게 수험을 치르려' 했었는데 '대출을 해서라도 중요한 3년 간 총력을 다해 도전' 했으면 어땠을까? 진이 빠지기 전에 합격하고 돈 벌어 빚을 까내도 되었을 텐데. 만일 불합격 해도 30대 초반이라 몇 년 안에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게도 투자하고 배당받는 매커니즘을 인생에 접목하지 못했다.
남들은 학자금 대출에 아르바이트 하느라 고생했다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참고 사느라 고생했다. 공부할 동안에 쓴 생활비를 보면 평균적으로 한달에 30만원, 하루 1만원으로 교통비 내고, 밥 사먹고, 책 값에 옷, 신발, 화장품까지 사 썼다는 의미다. 그렇게 돈이 들까 노심초사 숨만 쉬면서 살았다. 가난해서 뭘 못한다는 생각에 쭈구리로 지내는 20대의 나에게 이 자료들을 보여주고 싶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대다. 뭘 원하는 것을 묻고, 그것에 필요한 돈은 스스로 마련하면서 세상을 배워야 하는 때다. 그렇게 악착같이 참는 힘으로 거침없이 도전해 보는 거다."
혹시 어느 골방에서 자존심 지키느라 숨죽이는 청춘이 있다면 격려하고 싶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차피 한 번은 세상과 하이파이브해야 한다. 그게 이 순간, 그대 인생에서 가장 어린 이 순간이면 좋겠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서 세상과 손잡는 법을 알려줬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서, 나도 해본 말이다. 아니면 그대 하고 싶은대로.
부모와 나는 다른 개체다. 공무원은 한정된 예산에서 1원도 오류가 나지 않게 계획대로 집행해야 한다. 부모는 그렇게 깐깐한 삶을 선택했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삶의 방식이라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지만 갑갑했다. 그렇다면 부모와 다른 나만의 삶을 개척할 용기를 냈어야만 했다. 책만 읽고 보내버린 20대가 아쉽다. 그러나 당시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 그것 밖에 되지 못한 걸 어떻게 하겠는가.
뭐, 할 수 없다. 지금부터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