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앤킴 Sep 22. 2022

끝은 내가 정한다

영화 - 굿 라이어

< 굿 라이어. 헬렌 미렌, 이안 맥켈런 주연. 미국. 2019년 스릴러 >


 우연히 예고편을 보고, 전부터 볼까 말까 망설였다. 이미 제목에 스포가 버젓이 있고, 내용이 어쩌면 짜증 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로맨스 스캠 영화여서 그 사기 내용 또한 허술하고 뻔할 것 같았다.


 노년의 미망인은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로이라는 남자와 매칭이 된다. 서로 말이 잘 통했고, 그들은 호감을 갖고 첫 데이트를 한다. 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로이가 무릎이 아픈 이유로 베티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지나치게 친절하고, 세상을 어려움 없이 살아온 우아하고 부유한 베티는 로이의 사기 범죄 타겟이 된다.

 손자의 걱정과 반대에도 베티는 로이를 깊게 신뢰하고, 로이의 제안대로 공동 계좌에 돈을 입금해서 절세를 계획한다.


 로이가 벌인 사기의 범주가 내 예상보다 현란했다. 허술한 사기 잡범이 아닌, 인생 자체가 범죄로 치밀하게 엮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액과 스케일이 꽤 크고, 여러 명의 등장인물과 스토리가 있는 금융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베티에게 접근한 것도 돈이 목적이었다. 베티는 돈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성공한 후 은퇴하고, 타인을 대하는 성품도 훌륭했다. 그런 범죄자가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나기에 단연 최고의 여인이었다.

 옥스퍼드 교수였던 베티도 노년의 사랑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헛똑똑이었다. 손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이와 함께 떠난 베를린 여행에서 손주가 밝혀낸 로이의 과거마저도 덮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은 로이의 범죄를 순조롭게 도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전이었다.

 그녀가 노년의 사랑이 사기였다는 것에 분노해서 복수를 펼치는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큰 반전이 있었다.

 이들의 악연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로이는 단순 사기범이 아닌 어려서부터 극악한 범죄자였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까마득히 잊고 산 그의 기억을 살려내니, 그저 어렸다고 뻔뻔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고도 뭔가 피해를 입은 듯 남 탓을 하며, 자기중심적으로 기억해서 기가 막혔다. 범죄자는 달리 범죄자가 아니란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60년에 걸친 상처와 분노, ‘끝은 내가 정한다'는 그녀의 다짐, 치밀한 계획과 복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반전으로 영화 후반부는 더 몰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에 비해 복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로이 같은 악마로 인해 베티의 일가족이 처참한 비극을 맞고, 인생 전부가 망쳐졌는데도 불구하고 베티는 왜 진작 복수하지 않고 노인이 되어서야 복수를 했을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사건 당시 전쟁 중이었고, 모든 것을 잃고 베티 혼자서 감당하고 살아나가는 것조차 버거운 세월이었을 것 같다.

 또, 부유하고 우아한 노년의 그녀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지독히 불행한 어린 시절과 달리 결혼 생활은 평온하고, 행복했을 것 같다. 어쩌면 남편과의 사별 후에나 그 복수를 실행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추론을 해보는 영화의 관객으로서, 부디 그녀가 복수를 잊고 산 세월이었길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로이가 물조차 자기 손으로 마시지 못하고 추하게 질질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티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멋진 파티를 한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이 파티 장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쫓아가서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60년의 그 세월 동안, 그 악마가 새겨놓은 깊은 트라우마에 가슴이 아팠다. 영화의 어두운 심연의 장면이 날 압도했다.

 차라리 옥스퍼드 교수였던 그녀가 노년에 허술하게 로맨스 스캠을 당해서 분노하는 내용이었으면, 그저 멍청한 미망인으로 여기고 그나마 조금 가벼운 영화였을텐데...

 이 영화는 그녀의 오랜 세월이 짐작되어서 마음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노후에 이르러서라도 복수를 할 수 있었던 그녀의 단단함에 조금은 통쾌했다. 하지만, 그 짐승 같은 범죄자에게 그 어떤 복수인 들 무슨 의미인가 싶어 진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제목의 스포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에, 두 노인 역을 맡은 배우들이 정말 연기를 잘한 거구나 싶었다.

 영화 초반, 미국 영화인데 배경이 런던인 것이 좀 의아했다. 그 의문도 영화의 반전과 함께 풀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언젠가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기억난다.

 "네가 복수하지 않아도, 그는 살면서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살면서 친구의 말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당시에는 위로가 되었다. 그때 고마웠다고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한 말을 세월이 지나서야 친구에게 불쑥 전했다.

 이젠 그 당시 슬픔이나 분노는 잊고, 친구의 말과 고마움만 남는 것을 보니.. 그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영화 내용의 아쉬움도 있지만, 재미있는 반전 복수극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엘비스는 이 건물을 떠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