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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자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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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13. 2015

유자 훈련기

가르침보다 더 큰 배움

개를 키우자고 결정한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손’이라는 말에 앞발을 내미는 강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영특하게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 주다니! 종을 초월한 교감! 개는 인간의 친구! 지금 생각해보면 유자와 만나기도 전에 과장된 기대와 지레짐작으로 앞서 나간 셈이다. 내 손에 개의 앞발을 소환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말이다. -엄마가 이런 딸일 줄 모르고 나를 낳은 것처럼.-     


개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데에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하기야 말을 알아듣는 아이들한테 뭔가 가르치는 일도 힘든데, 태어난 지 다섯 달 남짓 된 개를 훈련시키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일단은 ‘손’부터 시작했다. 강아지에게 품고 있던 로망이 있으니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유자 앞에 내 손을 내밀고 “손!”이라고 외친다. 유자는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손!”을 외치며 유자의 앞발을 내가 직접 잡고 내 손 위로 옮긴다. 그 다음엔 호들갑을 떨며 잘했다는 칭찬과 간식을 제공한다. ‘손’이라는 음성 명령과 앞발의 움직임이 만나면, 칭찬과 간식이 생긴다는 사실을 유자가 인지할 때까지 훈련은 계속됐다. 아마 첫날은 실패했고 다음날에 성공했던 걸로 기억한다. 손을 달라는 말에 앞발을 살짝 내미는 유자가 너무 예뻐서 동영상까지 찍어놓았다. 가끔씩 그 영상을 돌려 보면  그때의 짜르르한 감동이 살아난다. -내가 첫걸음마를 뗐을 때, 부모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데 요새는, 유자도 요령이라는 걸 피운다. 작년까지만 해도 간식이 있든 없든 말을 잘 들었다. 앉으라면 앉고, 손 달라면 척척 앞발을 내밀고. 이제는 슬슬 귀찮아한다. 간식이 없다 싶으면 아무리 말을 해도 못 들은 체 한다. 심지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때도 있다. 너무 귀찮게 했나 싶어서 오히려 사람이 깨갱하게 된다. 반대로 간식 냄새를 맡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가 할 수 있는 재주는 다 보여준다. 착 앉아서 앞발을 들었다가 훌렁 배를 까고 ‘빵!’ 자세를 취한다. 어차피 내가 시킬 것도  그중 하나였으니 간식을 주긴 주지만, 기분이 묘하다. 영악한 놈. -머리 굵은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 조금 알 것도 같다.-     


내가 꿈꾼 건 예쁘게 앞발을 내미는 강아지였지만, 사실 앞발이야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일까. 유자와 우리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배변 훈련만으로도 충분한 걸. 똥오줌만 잘 가리면 됐지. 유자가 한 가지 재주도 부리지 못하는 개였다고 해도 우리는 정말로 유자를 예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자에게 잔재주를 가르친 건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감과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면 된다고 하면서도 교육과 성적에 큰 기대를 품는 평범한 부모들의 마음을 약간은 이해하게 됐다. 휴대폰 갤러리와 SNS를 아이 사진으로 가득 채우는 초보 부모들의 마음에도 공감할 수 있다. 이게 다 개 덕분이라니. 늘 그랬듯이, 유자를 가르치면서 배운 게 훨씬 많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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