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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자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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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15. 2015

브로콜리는 먼 곳에

애견 미용의 충격

유자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직후에 겪은 문화 충격이 하나 있다. 바로 ‘놀라운 애견 미용의 세계’다. 개털 깎아놓은 모양에 ‘무슨 컷’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은 걸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동물병원 탁자에 놓여 있던 애견 미용 잡지를 들춰보고선 입이 딱 벌어졌다. 일본에는 푸들 미용에 대해서만 다루는 잡지까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저 ‘와...’라는 감탄사뿐이었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애견 미용은 이미 엄청난 산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하지만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고, 푸들 미용이라는 신세계를 서서히 탐색하기 시작했다. 애견 커뮤니티와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다른 강아지들의 미용 후기를 구경하면 시간도 참 잘 갔다. 유자의 털이 길어질수록 더 열심히 찾아봤다. 내 눈에 정말 귀여워 보이는 브로콜리 컷과 테디베어 컷을 보며 ‘유자한테 뭐가 더  어울릴까?’라는 쓸데없는 고민도 했다.      


대망의 첫 미용일, 예약해 둔 시간보다 일찍 미용실에 도착했다. 어떻게 자를지는 아직 못 정했다고 얘기해놨기 때문에 조금 일찍 간 거였는데, 다른 강아지가 미용 중이라 그냥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가격표에 적힌 가격이 무시무시해서. 애견 미용은 처음이었고, 인터넷에는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대충 2~3만 원 선이라는 얘기 아니면 가게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대충 3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가위컷’은 무려 6만 원이었다.     


내 머리카락을 자르러 미용실에 가도 채 2만 원이 들지 않는데, 강아지 미용에 6만 원이라니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지출이었다. 결국 미용사가 나와서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라고 친절하게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짧게... 빡빡 밀어주세요...”였다. 좀 슬펐다. 사람에게 ‘머릿발’이 있다면 개들은 ‘미용발’이 있는 셈인데 돈 때문에 ‘3mm 반삭’을 시키게 되다니. 심지어 빡빡 미는 스타일도 결코 저렴하진 않았다. 목욕비도 있고, 유자 털이 엉켰다고 추가 비용도 들어서 결국 3만 원을 냈다.     


전체미용 직후엔 푸들 같지가 않다

첫 미용을 끝낸 유자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털과 함께 귀여움도 깎여나갔다. 주둥이의 털이 다 사라지자 유자 얼굴이 약간 비열해 보였다. 작고 가느다란 몸통과 다리는 그대로 드러나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유자도 생전 처음 해본 미용이 충격이었는지 낑낑거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 날 유자의 몰골을 본 가족들도 “개를 군대 보내는 것도 아니고 왜 털을 저 따위로 깎아 놨냐”고 나를 공격했다. 다시는 전체 미용을 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세 달 후에 유자는 또 털을 빡빡 밀었다. 강아지를 키울 때조차 무전유죄라는 말은 맞아 들어간다.         


유자는 아직도 ‘무슨 컷’을 해본 일이 없다. 여전히 전체 미용과 위생 미용만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브로콜리 컷을 시켜보겠다는 다짐은 유효하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브로콜리 컷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브로콜리 컷은 아직 먼 곳에 있다. 가난한 주인이라는 게 괜히 미안해진다. 유자에게는 브로콜리 컷을 시켜주는 주인보다, 산책을 자주 나가는 주인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미안해진다. 그런 게 돈의 위력이겠지. 나도 애써 잊어보기로 했다.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진짜 중요한 것을 잊게 된다. 진짜 중요한 건, 유자는 3mm 반삭을 해도 잘생겼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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