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자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정 Sep 23. 2015

씹고 뜯고 물고 즐기고

개의 이빨은 장식이 아니니까

개는 물어뜯어야 한다. 뾰족한 송곳니는 그러라고 나있는 물건이다. 요즘 개들은 좁은 집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니까 얌전해질 필요가 있지만, 근질근질한 이빨을 아예 숨길 수는 없다. 푸들도 사냥개로 쓰이던 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자도 사냥 본능을 숨기지 못할 때가 있다. 밖에서 작은 동물을 발견했을 때, 장난감을 던지고 물어오는 놀이를 할 때는 여지없이 사냥개다. 

     

사냥을 나갈 수는 없지만, 유자는 아쉬운 대로 제 몫의 장난감들을 물어뜯고 논다. 매일매일. 하루에 최소 한 번은 놀자는 신호를 보낸다. 앞발을 앞으로 쭉 뻗고 엉덩이를 하늘로 들어 올려 요가 자세 비슷한 포즈를 취한다. 내가 밥을 먹든 책을 보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은 놀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놀자! 인형 가지고 놀자! 이 상태로 오래 두면 내 손을 물면서 놀려고 한다. 그러기 전에 장난감 하나를 집어 든다. 오늘의 희생양은 코코몽이다.      

던져! 던지라고!

코코몽을 들고 방으로 뛰어가면 유자는 나를 앞질러 침대 위로 뛰어 오른다. 다시 엉덩이를 쳐들고 인형이 날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쪽저쪽 간을 보다 휙 던져주면 크와아앙 뛰어올라 공중에서 인형을  하고 문다. 물자마자 제 집으로 인형을 물고 뛰어 들어간다. 그래 봐야 인형을 오래 숨기고 있지도 못한다. 오래지 않아 집 밖으로 인형을 툭 밀어 내놓고 제 머리도 쏙 내민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코코몽을 다시 집어 들고 집안 곳곳을 뛰어다닌다. 땀날 때까지.     


그나마 요새는 장난감과 개껌을 물어뜯는 걸로 만족해줘서 다행이다. 유자는 어릴 적에 장판과 집안 살림들을 씹어놓은 전과가 있다. 부득이하게 유자 혼자 집에 두고 나갔다 온 날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유자는 집에 온 나를 반기고, 나도 집 잘 보고 있었구나, 기특하다, 예쁘다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해줬다. 그러나 열린 안방 문 너머 처참한 바닥을 보고 말았다. 누런 장판이 죄다 뜯겨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흐트러진 장판 조각을 모아도 바닥이 다 가려지지 않았다.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유자는 왜? 뭐?  왜?라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장판보다는 충격이 덜했지만 그 후로도 유자는 전화선을 물어뜯고 문틀을 긁어놓고 몇 권의 책 귀퉁이를 씹어 먹었다. 안방 장판의 모자란 조각은 결국 못 찾고 색이 다른 장판을 어설프게 이어 붙였다. 집 전화는 그냥 없는 대로 살고 있다. 책들도 잘 말려 책꽂이 구석에 꽂아뒀다. 그 정도의 피해로 유자의 물어뜯는 습관에 적응할 수 있다면 괜찮은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새 물어뜯는 거라고 해봐야 봉제 인형 아니면 내 손 정도니까. 언제 코코몽이 흰 솜을 내뿜으며 장렬히 전사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몇 개의 인형을 끝장내더라도 그 정도의 물어뜯는 즐거움은 지켜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답잖은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