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깨달음
날이 더워지면 유자는 바닥에 눕는다. 자기 몫의 쿠션이나 소파, 이불 따위는 슬슬 멀리하고 거실 바닥이나 베란다 바닥을 찾는다. 인간보다 체온도 높을뿐더러,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다. 땀구멍도 없다. 내가 느끼는 더위보다 유자의 더위가 훨씬 클 것이다.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녀석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해주고 싶다. 난 참 배려심 넘치는 주인님인 것 같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아이스 팩 몇 개가 보인다. 엄마가 임플란트 할 때 치과에서 준 것, 냉동식품을 택배로 받았을 때 딸려온 것, 동생이 라식 수술받을 때 새로 산 것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엄마는 언젠가 다 쓸 데가 있다며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두지만 아직 쓰는 건 못 봤다. 내가 유자를 위해 쓸 것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다면 굉장하지만.
아이스 팩 세 개를 꺼내서 세 군데에 나눠 놓는다. 유자가 잘 눕는 이불 속에 하나 두고, 개집 안 쿠션 밑에 하나 두고, 유자 전용 쿠션 바닥에 하나 깔고. 유자는 바닥에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나를 쳐다본다. ‘저게 또 뭘 하나’ 싶은 표정이다. 나는 아이스 팩을 넣은 이불에 손바닥을 대어 본다.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서늘한 감촉이 좋다. 혼자 뿌듯한 마음이 들어 유자를 불러본다. 안 온다.
일부러 시원한 이불을 옆에 둬도 유자는 반응이 없다. ‘에잉’ 하는 마음으로 방에서 책이나 보기로 한다. 거실에 혼자 남겨지는 건 싫은지 방으로 따라 들어와 침대 위로 올라간다. 침대도 더울 텐데. 흩어놓은 아이스 팩을 주섬주섬 가져와 침대 위에 재배치한다. 내 옷가지에 하나 숨기고, 베개 밑에 하나 감추고, 이불 아래 하나 슬쩍 넣고. 드디어 못 보던 물건을 알아챘는지 유자가 킁킁댄다. 하지만 그뿐이다.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두터운 이불 위에 눕는다. 바보 같은 개, 나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나는 급기야 옷가지에 아이스 팩을 모아 둘둘 만 다음 누워있는 개의 등허리에 올려놓는다. “시원하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묻지만 개는 대답이 없다. 오히려 나를 쳐다보며 살짝 으르렁거린다. 다음 순간 옷을 치워버리고 일어나 온몸을 부르르 턴다. 그러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빼꼼 내놓고 날 쳐다본다. 그마저도 금방 집어넣는다. 덥지도 않나.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인 호의에 불과했다. 배려와 호의는 둘 다 친절하고 따뜻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서툰 호의에는 자기만족밖에 없다. 아이스 팩을 들이대는 것보다 혼자 쉬게 두는 쪽이 개를 위한 배려였나 보다. 진짜 배려가 어떤 건지 꼭 이렇게 한 발 늦게 알아챈다. 유자를 배려하려면 귀찮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주는 걸로 충분하다. 날이 더워지면 사람이나 개나 짜증이 는다. 그럴수록, 호의보다 배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