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내비게이션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고속도로 대신국도로 안내했다. 밤늦게 서울에서 도착한 두 아이는 새벽에 일어나 커피한잔으로 정신을깨운 뒤 방금덮고잔 이불처럼 자신들을 차에 실었다.추석맞이 '부산행'이다.
운전자를 제외한 세 식구는 충분하지 못했던잠을자거나국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동영상으로찍었다.오르막 도로 끝에서 붉은태양이부딪히듯다가오던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와~
내비게이션 덕분에 평소보다 빨리 부산에 도착했다.며칠 전까지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어머님은 엄청난양의제수 거리를 사다 놓으셨다. 먼저도착한 사람이일을 척척 잘 해내면 좋겠지만시어머니께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무 하나를 썰어도 먼저어머님이시범을 보이셨고,산적을 할 때는 막내동서를은근히 기다렸고,나물을 볶을 때는 오늘도 근무 중인 큰 동서를말씀하셨다. 하지만 다들사정이 있어늦을 거란 이야기를 나눴기에나는 책임의 막중함과과감한 시도로 어머니의 불신을 타파하기로했다.
큰 아이는 바다 중 광안리를 특히 좋아한다며 할머니 곁에서 수시로 엄마의 일이 끝나기를 확인하였다.끙끙 앓고 계신 시어머니의 일은 자정을 지나 제사직전까지 계속되리라. 세 동서의 출현이 예상되는시점에아이의 바람을 핑계 삼아 우리 가족은광안대교가 눈 앞에펼쳐지는 Coffee Smith로 갔다.바다를 바라보고, 모래사장을 걷기도 하고, 제트스키가 모래사장 가까이에까지 다가와 벌이는거친 묘기를 보며 희희낙락했다.
돌아가니 거실 가득 시댁가족들이모였다.모두가 한마음으로 건강도 좋지 않으시면서 제사준비에 온힘을 다 쏟는 어머니를 성토했다.층층시하에7대 종손 맏며느리인 어머니의입장을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무리하여 곧 병원행을하실것이라 말이나 논리로도설득이 안되니 속상함을 비난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나 역시 그들과한패가 되어 동의하는제스처를 취했다. 여든이 되시는 어머니의고단한'제사 원칙'에집단으로 항의하는 우리를둘러보시던 어머니는한숨을 내쉬며 "효자 자식 하나도없다." 신다.
추석날 시간에 맞춰 도착한 제관들! 더 이상 둘곳 없는구두들이 현관 밖에까지 즐비하다. 제사상의빈공간에는밥과 국, 밥과 탕수가 조상의 수만큼 번갈아바뀌면서 차려졌다.명절의 첫 밥은 장손 집에서다들드시고는 두 집을더 방문하여 제사를 지낸 뒤 선산이있는 울산으로 간다.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를 마지막으로 부산을 떠나 울산으로 향했다.아이들에겐 기억이 가물가물한 할아버지일 테고,남편에게는 더없이 애틋한 부친일 테고, 나와는 이렇다 할 추억이 없는 시아버님이시다. -가끔책을 나눠 읽은 적은 있다. 최명희 씨의 10부작 '혼불'이 마지막이었다. 읽으신 뒤보자기에싸서 내게 돌려주셨는데 한참 후 암병동에 입원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부부는 병동에서 밤새 복도를 서성이며반년 정도를 드나들었다. 시아버님이 사투를 벌이시던 안타까움의 시간이었다. 아버님의 산소에 가려면 언제부턴가 댐을 관리하는 관리인에게 신분증을맡긴 뒤다리를 건너 산속으로 가야 한다.
나무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함을깨던 산길을 한참이나 오른 뒤에야 도착하여절을 올린다.나는 숙모님과시 할머님의 묘지앞에 절하는 두 딸과남편을 바라본다.분명 나의 반쪽이나아이들은 남편과 같은 성을
가진 '경주 김패밀리'들이다.산을 내려가던 우리는 올라가는 친인척 일행들과두 번 마주쳤다. 서로 대면 대면하기도 하고 친밀감이동시에 느껴지는 묘함도 있었다.댐에 있던두 척의배는수로를거슬러올라가성묘를하게 될또 다른 가족들이이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울산을 빠져나오니 금세 경주다.경주시의톨게이트는옛 왕조의 위엄을 알리듯 웅장하다.그제 난리가났고 여진이 계속되는 탓에추석날임에도 불구하고 지붕과 담을 수리하느라사람들이 바쁘다.정체와 순조로운 구간통과를반복하며 갈 때와는 달리5시간이 훨씬 넘겨 집에도착했다.
"'달님 안녕'이란 책 생각나?"
"그럼요."
하드커버지의 동화책을 기억하냐고 물으니 딸들은 달님 표정까지 생생히 기억하고있단다.대여섯 살 때 가지고 놀았던 책을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구나! 한가위 달은 구름 뒤에서 좀처럼 벗어나질못하고 있다. 다들 슬리퍼를 신고 한가로이 숨을쉬며여유롭게 걷다가 구름 속에서 흰 빛으로만 둥글게퍼져 나온달님께 잠시 두 손을 모았다.
기름진 제사음식과는 달리집에와서는 방금 한쌀 밥에팬에 전지를 가득넣고 맛술과 후춧가루로 고기를 익힌 뒤 묵은지와두부를 넣어찌개를끓였다-도로에서 장시간시달려서인지배도 고프고뭔가 얼큰한 국물이뗑긴다.부추 한 움큼으로 마무리한찌개와 시어머님 솜씨의
고구마 줄기 찜으로다들 행복함을만끽했다.
밤이 되니 큰 아이의 말이 생각나 다시 마음이 몰캉해졌다. 아이는 외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던전어회의 기억으로 지금도 '전어'이야기가 나오면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미국에서 지내다 한국으로돌아왔지만 자신은 일 년에 추석과 설 겨우 두 번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데 그나마 이게 언제까지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엄마, 제가 할머니를 백번 더 뵐 수 있을까요?"
부산을 떠나기 전 아이는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다시뛰어 올라가 할머니를 껴안고 떠나왔다.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