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의 일몰 속에서
좋은 장소에서 마음을 비우고 좀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며 J는 안동으로 가자고 했다.
일어나서 본 나의 얼굴에 어린 수심 때문이다.
"우리 저 아래 백사장으로 내려가 보자"
"정말 넓은데!"
"해운대나 광안리 백사장보다 폭이 두배야."
"조개껍질도, 거친 돌멩이도 하나 없어."
"어떻게 이런 백사장이 수백 년 된 서원 앞에 있는
거야?"
'풍수지리'는 먹고 놀며 재산을 축척하던 양반들의
땅 투기 흑심과 정치권의 궤변처럼 느껴져 오랫
도록 관심이 가지 않던 분야였다. 하지만 수많은
풍산을 지나서 아름다운 병풍을 두른 병산 앞에
서니 절묘한 배산임수의 조합과 고요하지만 빠르
게 흐르는 물길 앞에서는 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여기저기를 걷다가 오후 5시경에야 비포장 도로
의 운치에 신선해하며 도착한 병산서원!
노을 속에 조용히 잠겨 드는 백사장을 한참 걸었다.
빠르게 걸을 이유도,
무슨 말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우리는 손을
잡고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기도 했다.
확신에 찬 화가가 커다란 붓으로 하늘에다 쓱쓱
그어 놓은 듯한 구름들이 바람에 흩어졌다.
가까이 지내던 부부는 한 달간 멀리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환희에 찬 경험과 건강한 귀향을
기원한다.. 지금의 나이에서야 나는 제대로 가을
을 느끼며 잦은 소풍과 산책을 나서고 있다. 가을
물 빛에 물 길에 물소리에 취하여 걸었던 오늘의
산책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을 지나 고즈넉한 집으로 돌아와
여유로움을 다시 회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