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경보음에 놀라서 스마트폰을 보면 폭염이니햇빛에 강한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경북지역민들은 바깥일을 하지 말라는 친절한경고다. 내가 여기 사는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주소지가서울이라며, 이곳 '여성회관' 의 무료 문화강좌에는공무원의 등본 확인으로 등록도 못하고 있는데.
쾅! 쾅쾅쾅
"무슨 소리지? 포수가 낮에도총을 쏘는 거야?"
다시 스마트폰 경보음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엔인근 지역에서지진이 발생했다는 거다."지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집 뒷산이 무너지는듯한 이 울림은 뭐야?" 비 오는 늦은 밤 총소리가 났었다. 다음날 아침 집 대문 다리 건너에 엄청난 크기의 고라니가 쓰러져 있다며 남편은
그쪽으로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면사무소에 연락을 했고, 당일 엽총 사용신고자 이름도 확인했다. 포수는 총 맞은 고라니를 찾지 못하고 철수했는데 연락 줘서 고맙다며 트럭에싣고 떠났다. 생명을 위한 추모의염을 할 새도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조용하던 마을에 콩 꽃이 피고 꼬투리가 달리면수시로
기계음 총소리가 난다. 산과 산 사이의 울림은그야말로 난리가 난 것 같다. 잠 못 든 마을 터줏대감과마님들의 불만 때문인지 소리는 곧 멈췄다. 다만 산 너머 마을에선 별 불평이 없는지 수시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로
전해진다. '고라니는 영리해서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곧 가짜인걸 알고 밤마다 농작물을 먹으러 온다던데!'
이럴즈음 두 딸에게서 연락이 온다.누가 어디서바깥일을 하다 쓰러졌다거나, 밭 일을 나가 실종된 사람을 찾아보니근처에서 사망했다는 걱정반 경고 반이 혼재된 인터넷기사들. 이미 팔뚝 여기저기가 모기와 숱한 종류의 벌레에게 물려 심한 상태가 된 나와J는 '자식 말은 들을 필요가 있다.'는마음으로 바깥일을 놓아버린다.
30호 캔버스에 집을 둘러싼 해바라기, 늘어진 주홍 능소화를스케치한다. 그리다 만 소매물도풍경화와 2개의 꽃그림 모두를 올 연말까지 완성할 거란 다짐을 하며 열심이다. 유화 물감에 사용되는오일냄새와 큰 캔버스가 차지한 공간은 더위를 더 가중시킨다. 햇볕에 내던지듯 모든 그림판을 밖으로 내둔다. 더 이상 못하겠다.
종목을 바꿔 귤과 앵초처럼생긴 꽃이예쁜 민화를 그릴 생각이다. 옻을 먹인 한지를 정성스럽게다린 뒤 먹으로 본을 뜨고, 밝은 색부터 하나씩바탕을 입혀가니 마음이 고요하다. 분재를 심어놓은 도자기 둘, 그 도자기를 담은 청회색 더 큰 도자기까지.
그러나 초연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연신 땀방울이 한지 위에 떨어졌고, 더위에머리가 빙빙 돌린다. 마음이 급해지면서 일을 저지르고만다. 하나를 채색하고 바로 옆의 것을 또 채색할경우 번짐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물 조절 실패와 서두름이결합되어 번지고 지저분해지고 얼룩졌다.여기에서 더 이상 계속하다간 이 그림을 찢어버리고 말 거다.
일하다 더워지고 지치면 나는 작년에 파 둔 지하수의 서늘한 물로 샤워를 한다. 조급했던 마음과 채색 욕심을 멈추고, 붓을 내려놓고, 일어나 작업 중이던 그림을 듣고 목욕탕으로 간다. 큰 붓과 샤워기의 물줄기로 두껍게 올려진 색과 얼룩을부드럽게 씻어낸다. 종이는 찢어짐 없이
연하디 연한 색만 흐릿하게 남기고 욕조에 걸쳐진 채 건조되고 있다.
"넌, 참 팔자가 좋구나"
말려진 본은 가로와 세로, 앞 뒤로 꼼꼼하게다림질하여 채색을 시작한다. 이번엔 더한 실수가 생겼지만작업 시간 이상의 고침을 반복하며 완성에 이른다. 세 개의 도자기를 채색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시간은 실제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작업의 소요 시간보다 길었다. '포기'도 나쁘지 않겠지만 완성을 염두에 두고 꼬박 닷새를 씨름한 이 그림엔 나의 여름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