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혹적이며 화려했던 정원은 가을과 함께 마른 무덤처럼 사그라들고 있었다. 3년 전 "이래선 안 되겠어. 일 년 내내 곳곳에 서서 중심을 잡아주는 식물을 심어야겠어." 그래서 고른 것이 상록 장미이자 사계절 꽃을 피우는 사계 장미였다.
어릴 적 기억과 작은 경험들은 중요하다. 어른이 된 다음 우리는 그 기억을 풀어내며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 한 축을 구성할 수가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상황에 해당된다. 어려운 시대에 골병이 들 만큼 다섯 자식 키우느라 힘들었을 엄마는 작은 꽃밭을 가꾸셨다. 장미라고 해봐야 그 옛날엔 단 한 종류 빨간색 장미였다. 어느 날 물새 한 쌍이 장미나무에 알을 낳았는데 에메랄드그린이었다. 얼마나 신비로웠던지 그 광경은 그 후 오랫동안 내 마음에 둥둥 떠다녔다.
장미꽃을 이어 보려면 꽃이 시들 때 로즈힙이 될 예비 열매까지 따주면 된다. 엄마는 그걸 모르셨고, 그렇게 좋아하는 꽃을 풍성히 즐길 수 있으려면, 장마 시작 전에 삽목 하면 뿌리를 잘 내리니 꽃을 늘려가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이것도 엄마는 모르셨겠구나! 작고한 부모님 생각에 혼자서 하는 안타까운 탄식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한 현대의 지식과 정보의 폭발은 나 같은 초보 정원사도 다양한 시도를 성공하게 한다.
미니 장미 6종과 중간 크기(중륜)와 큰 송이(대륜)의 장미를 세심하게 골랐다. 흑장미, 빨강 장미는 정원 중심의 왼편으로, 핫핑크, 연분홍은 제일 가장자리로, 보라, 연보라 장미는 중심에 가깝게, 정 중앙엔 아이보리, 주황, 코랄, 그 옆에 진노랑과 연노랑 장미를 심었다. 흰색 장미의 아름다움을 탐하여 세 그루는 산책하며 손을 뻗을 수 있는 거리에 심었다. 겨울엔 등겨와 커피 가루를 덮어 잘 안착하게 도왔더니 묘목에서 나무로 자라났다.
작년 이맘때쯤 인연을 맺은안사돈(큰아이의 시어머니)께는 인편이 닿는 대로 꽃과 장미를 보냈다. 코로나 시대의 답답한 서울 칩거에 위로가 될까 해서였다. 정작 화려한 멘트로 감사를 전해온 건 바깥사돈이었다. 5~6월에 절정이었던 장미는 작은 아이의 도시공간에서향기를 풀어내며 피었다. 부득이하게 집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서로 조심하는 시간 동안 장미가 사랑스러웠다는 후문과 사진을 보내왔다.
11월 정원의 장미는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영하로 내려가기 직전까지 꽃을 피우는 강한 모습이 볼만하다. 늦가을 쌀쌀함이 시작되면 장미 꽃잎은 부드럽거나 매끈하지 않다. 섬세했던 장미잎은 미니 뻥튀기처럼 도톰해졌고, 꽃의 크기도 많이 줄어들어 대륜 장미는 미니장미가 된다. 꽃잎 표면은 갑자기 소름이 돋은 인간의 피부에 나타나는 징표를 보이며 오돌토돌하다. 색감조차 날씨로 인해 싹 변해버렸는데 농축 자체다.
줄기와 잎에 가위를 갖다 댄다.매혹적인 컬러일수록 정말이지 그 가시가 매섭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확 긁어버리거나 피를 흘리게 한다.군데군데 잘라놓은 장미를 집 안으로 들이려면 다시코팅 장갑을 써야 했다. 아~ 그런데 꽃에서 첫 잎이 나는 장미의 기다란 목 부분을 잡아보니 매끈하다(참고:첫 번째 사진). 아무리 맨손으로 움켜잡아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 목이 긴 사슴 인양 장미 목을 붙들고 썬 룸으로 데려왔다. 장미는 온기 가득한 집 곳곳에서 천천히 잎을 떨구거나 피어나는 중이다.
곧 12월-그제 장미잎을 다 땄다. 햇볕에 내놓으면 백화현상으로 색이날아가 버리기에,그늘에서 천천히 말리고있다, 수시로 오가며 장미 향을 맡기도 하고.집에서 장미 오일을 만들려면 올리브 오일에 깨끗한 잎을 넣어 녹여내면 되고, 차를 만들려면 마른 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된다. 포푸리는 투명한 망에 넣어두면 될 것이다.장미 향으로 인하여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설탕과 함께 팔팔 끓여서 만들 수 있는 잼도 시도해볼 만하다. 비타민 폭탄인 로즈힙은 꿀이나 설탕을 넣어 차로 즐겨도 좋다.
모과 향이 좋은 11월은 바깥일이 줄어들어 정원주인은 방학을 맞았다. 다소 황당하지만, 상상력 천재이며 어른을 위한 우화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나무'와, 중국 역사 드라마 삼국지와 칭기즈 칸, 진시황을천일 야화처럼 새벽까지보고 있다. 책으로 읽고 또 읽었지만 헷갈리던 스토리가 영상으로 펼쳐지니 일목요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