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그 편지가 있었다
최인호의 사적인 에세이 '인연'을 읽으며 동시에 김유정을 알아가는 중이다. 유정의 '마지막 편지'를 읽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고,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엉엉 울며 글을 써야 한다는 열정을 느끼곤 했다는 작가.
영화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
그리고 장편소설 상도, 길 없는 길....
나의 2030에 그의 영화와 글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가 오래전 고인이 된 김유정 생가를 방문했다. 살아서는 지독한 말더듬이, 폐병쟁이,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멸시받았으나, 죽어서야 고향의 문학관에서 부활한 김유정을 편지로나마 만난 이야기에 읽기를 멈췄다. 나는 펜을 끼워둔 채 여러 날 읽기를 하다 옮겨본다.
필승아(김 유정의 절친 안회남 본명),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여튼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 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편지를 쓴 나흘 후, 삼월의 봄날에 김 유정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고흐를 생각나게 한다. 안타깝고 아쉽다.
설 날 아침 생수 세 그릇을 떠놓고, 잠시 돌아가신 부모님의 저 세상의 안부를 여쭈었다. 폐병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나의 다정한 이웃이었던 '김 귀화'를 위해 정안수 한 그릇 다시 준비하러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