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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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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Dec 13. 2019

외할머니 장례식

- 내게 '손녀'라는 이름이 영영 떠나간 날


초가을 햇빛이 창가에 살금살금 스며드는 토요일 오후.

"응, 엄마."

"작은딸, 우리 엄마 돌아가셨다."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한순간 멍해졌다. 나의 뇌 회로는 순식간에 리와인드되어 할머니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소환되었다. 꼬꼬마 어린 시절 시골 큰기와집에서 놀던 나를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 밭일하시다 시원한 물 드시던 모습, 명절날 며느리들(내게는 외숙모들)을 진두지휘하시던 모습, 긴 머리를 감아올려 비녀를 꽂아 쪽을 진 후 매만지던 모습, 아궁이에 불지피며 가만히 불을 바라보시던 모습, 말년에 한동안 기거하시던 서울 외삼촌 댁에서 가만히 소파에 앉아계시던 모습..


막내 아들인 우리 아버지께서는 갓 서른 넘어서 부모를 모두 잃으셨기 때문에, 내게 외할머니는 유일한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없는 유년이란 얼마나 외로울까. 다행히 나의 유년시절은 외할머니가 있어 풍요로왔다. 방학마다 우리 삼남매는 버스를 갈아타며 첩첩산중 시골에 있는 외갓집에 갔고, 열흘 남짓 큰 기와집에서 놀다 오곤 했다. 버스에서 내려 대문에 들어서면, 몇 달 만에 온 우리를 용케 기억하는 메리- 잡종개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골든 리트리버와 흡사했던-가 제일 먼저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맞아주었고, 안방에서 늘 붓글씨를 쓰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방문을 열고 나오시고, 부엌에서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마을에는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널찍한 개울도 있고, 그늘이 컴컴할 정도로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오백살 먹은 느티나무도 있고 - 우리는 그 나무를 둥그나무라고 불렀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초등학교도 있어서 방학이라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우리끼리 놀다 오곤 했다. 저녁이 되면 마당의 수돗가에서 얼굴과 팔다리를 쓱쓱 닦고, 밥 짓는 부엌을  서성거렸다. 뒷뜰 장독대에 늘어선 항아리 수를 세거나, 커다란 감나무 꼭대기에 자리한 까치집을 바라보거나, 뒷뜰과 이어진 뒷산에 소복하게 피어있는 도라지꽃을 감상했다.  "밥 먹자~" 할머니께서 부르시면 방금 따온 푸성귀로 만든 반찬에 고봉밥을 먹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푸르스름한 땅거미에 온 집안이 물드는 그 저녁, 희게 빛나던 고사리꽃, 굴뚝에서 나오던 흰 연기, 구수한 밥냄새, 열무김치, 애호박 볶음, 깻잎찜, 가지나물, 단감 장아찌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던 저녁.. 밥을 먹고 나면 집 앞의 논과 산은 검게 물들고 산등성이 위로 별이 가득 반짝였다.


"얘들아, 일어나봐라. 눈 왔다."

겨울에는 포근한 솜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 꼼지락 거리다가 눈이 왔다는 할머니 말씀에 벌떡 일어나 내복 바람에 창호문을 열어제끼고 나갔다. 함박눈이 마당과 담장에 곱게 쌓여있었고, 웃목의 화로에서는 된장뚝배기가 보글보글 끓던 그 겨울 아침도 생각났다. 긴긴 겨울밤에는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외할아버지께서 깎아주신 고구마와 생무를 간식으로 먹었더랬다.  이렇듯, 내 어린 시절의 추억 90퍼센트는 시골 외갓집에서 온 것이고, 지금도 입맛 다시며 떠올리는 정갈한 밥상에는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수고로움이 있었다. 물론 우리 외가 역시 다른 집처럼 이런저런 애증의 역사가 있기는 하나, 나는 지금까지도 기와집에 대청마루가 있고, 부엌의 아궁이에 무쇠솥이 세 개나 걸려 있던 외갓집이 나의 외갓집이었음을 따뜻하고 자랑스럽게 기억한다.  

거동이 불편하게 되시면서 큰외삼촌은 할머니를 서울집에서 모셨다.


"나는 여기서 누가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집 밖에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구나."

인사하러 간 우리에게 할머니는 늘 그렇듯 담담히 말씀하셨다. 150센티미터도 안되는 아담한 몸집에 21세기에도 비녀로 쪽진머리를 고수하시던 할머니에게 우리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도시 문명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배타적이었을까. 산골마을로 시집 온 후 한평생 당신의 손으로 정성껏 키운 작물로 손수 만든 음식만 드시던 분께 도시의 음식은 얼마나 외롭고 빈곤했을까.


...... 장례식장에는 외할머니의 자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의 다섯 외삼촌은 모두 상주의 자리를 지켰고, 엄마와 이모도 밤새 장례식장을 지키셨다. 나는 절을 두 번 올리고, 상주와 맞절을 했다.

 "할머니께서 편히 고통없이 가셨으니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맏상주이신 큰외삼촌의 말씀에 오히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는 여느 명절처럼 즐겁게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 자란 것에 감탄하고, 곧 결혼하는 사촌에게 덕담을 건넸다.


3일째 아침, 다들 굳고 긴장한 얼굴로 발인을 시작했다. 장성한 손자들이 상여를 버스 안으로 옮겼다. 흰 빛이 도는 송판으로 짜여진 관은, 할머니처럼 자그마했다. 화장 후 선산의 외할아버지 묘에 합장하기로 한 터라 버스는 서울추모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잠시 기다린 후, 목사님의 인도 아래 할머니가 누워 계신 관에 마지막으로 모두 자손들이 손을 얹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는, 할머니의 장녀, 가장 늙은 딸인 나의 엄마가 그렇게 비통한 소리로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탯줄의 인연을 떼어내기란 어려운 것이구나. 생살을 떼는 거보다 더한 아픔이구나.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열기가 훅 끼쳐나왔다. 관이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우리들은 모두 길잃은 아이들처럼 엉거주춤 서서 어찌할 바 모르고 흐느끼며 울었다. 장례지도사와 목사님이 길을 안내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고 손을 잡아 위로하며 대기실에 들어갔다.


그 뒤, 예배를 드리고, 한 줌 재가 된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장 근처에서 국밥으로 점심을 때운 후 선산으로 향했다. 이 모든 과정은 꿈 속처럼 아득했다. 할머니는 몸을 잃고 한 줌 재로 남았는데, 국밥집 반찬으로 나온 고구마 줄기볶음과 가지나물이 맛있어서 나는 밥을 깨끗이 비웠다. 살아있는 나의 몸은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마음이 헛헛해서인지,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목숨에 더 집착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평소보다 오히려 더 식탐이 동하면서 그릇들을 깨끗이 비워냈다.

사진 <40-50년 전 외갓집 마을>


선산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제법 기운 오후였다. 햇살은 늦여름처럼 제법 뜨겁고 나른했다. 암, 우리 엄마가 자손들 힘들게 하실 분이 아니지. 비가 안와서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얘기를 나누며 밤나무 가득한 산기슭을 올라 층층히 산소가 모셔진 선산을 올랐다. 장지에 오르자, 일꾼들이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골함을 매장할 자리가 정갈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손님과 가족들을 위한 밥차도 와있었다.  


큰외삼촌께서 복잡한 제례의식의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순서대로 진행하셨다. 며느리, 손주들, 문상객 모두에게 절을 올릴 순서를 정해 주신 대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할머니께 큰 절을 올렸다. 해가 뜨면 가장 햇살이 먼저 닿는 산등성이에서 외할어버지와 외할머니가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고, '아버지, 엄마랑 잘 지내시라'고, 웃으며 이모가 인사를 올렸다. 모두들 굳은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으면서 장례식은 편안히 끝났다. 제례용품을 정리하고, 장지로 직접 온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찍고, 산소 주변에 잔풀도 뽑고...


나의 친정엄마가 선산 위쪽의 조상 중 엄마의 할아버지-나의 외증조할아버지-께 인사를 올리겠다 하셔서 부축을 받고 올라가셨다. 엄마는 맏손녀라고 극진히 사랑해 주셨던 당신의 할아버지 얘기를 평소에도 많이 하셨는데, 얼마나 할아버지를 좋아하셨는지 엄마는 놀랄 때마다 '아이구, 엄마!'가 아닌, '아이구, 우리할아버지!'라고 할 정도이다. 나는 오후 햇살이 저 아래 저수지에 포근히 내려앉은 9월의 마지막 날, 나의 늙은 엄마가 당신의 할아버지께 존경과 사랑을 가득 담아 큰 절을 올리던 그 날의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천천히 절을 올리고 일어나는 엄마의 주름진 얼굴은 평화와 행복으로 한껏 빛났다.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려오기 전,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수지의 물은 많이 말라서 가장자리에 풀숲이 어지러이 우거져 있었다. 예전에 상전옥답이던 땅과 나의 외갓집은 모두 저수지 속으로 사라졌다. 마을 언덕에 우뚝 서있던 오백살 먹은 둥그나무만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검푸른 나뭇잎이 우거져서 한여름에도 서늘하던 그 나무도 난도질에 가까운 주변 개발에 지쳤는지, 세 개의 버팀목이 가로로 넓게 뻗은 가지를 받치고 있었고, 무성하던 나뭇잎은 간 데 없고 누렇게 병색이 완연했다. 수백년 독야청청 한 자리에서 버티던 그 힘찬 기세는 간데 없고, 사라진 마을, 사라진 전답을 보며 기운을 잃은 듯 했다.


지켜야할 마을이 없으니, 나무는 더 버틸 이유를 찾지 못한 걸까. 나는 이렇게 어엿한 어른이 되어 돌아왔는데, 너는 그동안 어떤 세월을 보낸 거니. 시들고 병든 큰 나무를 보며 나는 슬펐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잃을 것인가.


그 뒤, 며칠에 걸쳐 치러진 장례식을 매일 다시 생각했다. 상여를 운구하던 남동생들.

문이 열리고, 열기가 훅 나오고, 관이 들어가던 그 순간.

슬픈 공기가 떠도는 추모공원. 

복잡한 장례의식을 설명하며 진행하시던 큰외삼촌.

엄마의 큰 절.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 할머니의 모습도 다시 생각했다. 은비녀로 쪽진 머리.

무표정한 듯 덤덤한 얼굴로 천천히 집안일 하시던 모습. 할머니의 항아리에서 마술처럼 나오던 맛난 반찬들.

마당 수돗가에서 퍼올린 시원한 지하수를 떠서 건네 주시던 모습.

 큰외삼촌집 소파에 아기처럼 앉아계시던 모습까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긴 세월을 함께 한 가족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 중 가장 큰 어르신이었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내게 '손녀'라는 이름은 영영 사라졌으나, 할머니는 내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돌려 주고 떠나셨다.


지금은 사라진 그 모든 것, 또는 곧 사라질 것들이나 지키고 싶은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일곱명의 아들딸과 열 네명의 손자들은 모두 할머니의 밥을 먹고 자랐고, 큰기와집 물 맛과 음식 맛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 어딘가에서 자신의 세상을 또 꾸리며 기어코 살아갈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구름이 개는 것처럼 할머니는 긴 삶을 순리대로 마감하고 떠나셨고 당신의 기나긴 삶 앞에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그저 어린 아이의 투정 거리 같을 뿐이었다.


내게는 둥그나무 아래서 뛰놀고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산과 들을 누비던 생생한 유년기가 있다. 그러니, 나는 좀 더 삶에 겸손하고 당당해져야겠다. 슬픔은 이렇게 순식간에 위로로 변할 수 있음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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