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아지는 비밀과 늘어나는 갈등
18화. 쭌 ①
많아지는 비밀과 늘어나는 갈등
미팅을 나간다고 하면 “미팅도 돈을 주는 거야?”
회의를 한다고 하면 “너네는 회의를 왜 그렇게 많이 해?”
또 회의를 간다고 하면 “너네는 일을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해?”
시나리오 얘기를 하면 “재미없는데?”
스케줄 얘기를 하면 “어차피 설명해 줘도 몰라. 시간이랑 장소만 알려줘.”
비영리모임 파괴왕을 만들었을 때 “취지는 좋은데… 돈은 안 될 거 같은데.”
강의를 들으러 간다고 하면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배워?”
돈은 적지만 포트폴리오로써 가치가 있을 때 “그게 그렇게나 도움이 되나?”
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내가 하는 일들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돈을 주는 일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 경향이 컸다. 또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독립영화를 본 경험은 없는지라, 돈을 못 벌어오는 독립영화 감독인 내가 작품을 위해 참여하는 활동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연애 초반부터 “나는 지금 영화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할 거고, 그만둘 생각이 없다”라고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돈을 안 받거나 적게 받고도 재미있고 의미가 있으면 일을 하는 사람인데, 쭌은 자꾸 돈을 주는 일인지 물으니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돈을 안 받는 일, 예를 들어서 회의나 비영리 모임 활동 같은 것들은 시원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남편에게 말을 안 하고 몰래 다녔다. 그리고 친정이나 오빠네 집에 며칠 놀러 간다고 하고는 그곳에 시원이를 맡겨놓고 단편영화 촬영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계속 비밀로 간직하고 앞으로도 사용하고 싶은 방법인데, 남편이 글을 흐린 눈으로 대충 읽어서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이 모르는 스케줄이 꽤 많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몰래 다니는 만큼 내 몸에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고,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핑계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으니, 이유를 모르는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서로 감정의 골을 파고 있다가 한 번씩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며 열심히 싸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을 속이면서까지 활동을 해야 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고 한심했고, 그렇다고 이런저런 걸 다 말해봤자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답답했다. '그만둬야 할까?'라는 질문을 매일, 수십 번씩 했다. 그런데 그만두면 뭐가 달라지나?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될 게 뻔했다. 만족과 성취가 없는 삶, 남편과 아이에 대한 원망,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지금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우울증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될 터였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남편이 누구보다도 더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잘 되기를 응원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부부는 운명공동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이해받고 응원받고 싶은 마음이 모두 욕심이었나 보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
"나는 칭찬을 해 줘야 더 신이 나서 잘 해."
식사를 할 때 마다 남편이 '내 음식 솜씨의 발전을 위해' 하는 '비평'은 내겐 '무시'와 '비난'이다.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 심지어 내 입엔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들도 남편에게는 모두 '부족한' 음식이다. 맛없다, 싱겁다, 깊이가 부족하다, 가지 반찬을 왜 했냐(내가 좋아하니까 했지)는 말을 식사 때 마다 들으면 입맛이 뚝 떯어진다. 실제로 기분이 나빠서 밥 숟가락을 놓고 밥 먹기를 중단한 적도 있다. 정성 들여 만든 이유식을 아이가 뱉어내고, 남편마저 식사에 대한 불평을 하니 식사 준비는 내게 고역이 되었다. 아이의 이유식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시판 이유식으로 바꿨고, 우리의 식탁에는 굽기만 하면 되는 고기반찬이 주로 올라왔다. 음식을 능숙하게는 못 해도 10대 때부터 혼자 끼니를 직접 차려 먹은 게 십수 년이라 형편없는 실력도 아니라 손맛 구박이 억울했다. 우리 남매는 어려서부터 내가 만든 떡볶이며 스파게티를 자주 먹었고, 한 번씩 집에 친구들을 초대할 때도 모두 불평한 적이 없었다. 시원이 친구네 가족은 내가 만든 잡채와 김치찜을 정말 좋아해서 레시피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밥 먹을 때 불평 대신 그냥 무조건 맛있다고 말을 하라고 시켰더니 '그러면 맛없는 채로 계속 먹어야 되잖아.'란다. 어이구 내 속이야. 밥 먹는 것 하나로도 이렇게나 조율이 어려운데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쟁점들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을까. 원하는 걸 분명히 말해도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저 제자리걸음을 걷는다. 계속 같은 걸로 싸우는 것도 귀찮아지자 말수가 줄었다. 남편의 뾰족한 말을 피하려 선을 긋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남편에 대한 애정도 점점 식는 게 느껴졌다. 이럴거면 왜 같이 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즈음, 언니와 함께 놀러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남편이 언니에게 하소연을 한다.
"저는 현미가 언제 뭘 하는지 하나도 몰라요. 처형한테만 말하니까."
나는 사실 처음 만난 사람하고도 아무 얘기나 다 한다. 시간이 길게 주어지면 요즘 가진 고민들까지도 상담을 할 정도로 나를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언니는 나와 상성이 잘 맞는다. 내가 뜬금없이 아무 말이나 던져도 그에 맞춰 자신의 생각을 툭 던지듯 얘기한다. 내가 아이디어를 구하면 아이디어를 생각해주고, 궁금한 게 있으면 함께 궁금해한다.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비난하지 않고, 내가 피드백을 구할 때만 나를 평가한다. 처음에는 남편에게도 똑같았다. 아무 말이나 내가 겪은 상황들 내가 겪고 있는 고민들, 구상하고 있는 아이디어들을 재잘거렸다. 내 입에 지퍼를 채운 것은 남편이 맞다.
"어차피 네가 설명해도 다 몰라."
"너는 일을 너무 다양하게 해서 기억하기가 힘들어. 그냥 며칠 몇 시에 어디 가는지 정도만 알려줘."
"설명을 똑바로 해야지. 이렇게 말하면 될 걸 너는 너무 설명을 어렵게 해."
"네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오래 볼 사람들이 아니니까 네가 설명을 못해도 지적을 안 한 거야."
이 글을 보면 남편은 또 내게 맘 상해 할 걸 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예전에 했던 말들을 되풀이할 거다.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의 탈출구를 찾아 헤매며 길고 지루한 논쟁을 이어갈 거다. 그래도 서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시간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정도는 해결을 할 수 있을 거다. 아마도.
글. 김현미
교정. 교열. 윤문. 김지현 rlawlgus2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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