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관점엔, 차이가 있다
여보, 우리 아이가 자폐인가 봐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청와대 사랑채에 인파가 가득하다. 집회 현장에 동행한 아이들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그들 곁에 섰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여기저기를 탐색하는 아이들과 그 뒤를 쫓는 부모, 그들의 고단함이 힘없는 눈빛으로 대신한다.
부모와 어깨선을 나란히 하는 아이는 엄마의 손을 벗어나려 부단히 애썼으나 무대에 시선을 뺏긴 부모들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먹먹한 표정으로 무대 위로 오른 몇 명의 집회참가자는 이발기로 그들의 머리카락을 담담하면서도 빠르게 쓸어내렸다.
그 앞에 모인 수많은 부모들은 붉은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의 속도로 아이의 손을 더 힘껏 잡았다. 그리고 엄마 손에 얽매인 아이는 이곳의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름도 낯선 발달장애인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 지난 집회가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난 특별한 아이를 둔, 대한민국 경찰관이다.
우리 시후는 밤잠을 쉽게 드는 법은 없었지만, 사근사근한 미소로 초보 엄마를 녹일 줄 아는 아이였다. 때론 엄마인 나보다 자신의 자동차 장난감이 더 좋은지, 들려도 못 듣는 척,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하는 모습에,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내가 좀 더 다가가곤 했었다. 그렇게 수월해 보이던 육아는 복직을 앞둔 시점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하원길, 어린이집 원장님의 눈빛은 달랐고, 이윽고 원치 않는 초대를 받았다.
“어머님, 시후가 언어가 느린 거보다 호명과 눈 맞춤이 잘 안 돼요. 불쾌하게 듣지 마시고 가까운 전문기관에 상담 한 번 받아 보는 건 어떠세요?”
불쾌함보다 불안함이 더 컸던 그때 쿵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빠르게 찾은 곳은 발달센터였다. 당시 15개월이었던 아이는 상담센터에서 여전한 모습을 보였고, 그곳에선 어린이집 원장님과 다른 견해를 내놓으셨다.
“아직 어려서 모릅니다. 아이와 많이 놀아주시고요. 치료도 이릅니다. 시간 많이 보내세요.”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여전한 불안함은 존재했지만, 우린 해당분야 전문가의 의견에 조금 더 무게감을 싣었고 복직과 함께 아이를 저 먼 친정으로 1년 보내게 되었다. 안일하게도.
그때 아이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이가 친정으로 내려간 지 7개월이 지난가을, (친정)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딸~ 병원 예약 좀 해줘. "
(친정) 엄마는 정기검진 중 자궁내막증 진단과 함께 ‘자궁 및 난소 적출 불가피’라는 의사 소견을 듣게 되었다. 같은 여성임에도 그때의 나는, 소중한 신체 일부분의 상실이 얼마나 큰 아픔일지 공감하기보다 작고 소중한 시후가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더 슬펐던 것은, (친정) 엄마도 금쪽같은 손주 걱정에 수술을 고민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야기를 엄마의 입을 통해 전해받던 순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편을 아리게 한다.
서둘러 엄마 수술과 회복을 한 달로 잡고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업무 특성상 한 달 휴가를 낼 수 없는 자리였으나, 지휘관을 찾아가 부탁하고 간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8개월 만에, 한 달을 기약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온 집은 이미 아이에게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하루이틀이면 쉽게 채워질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안일한 생각은 며칠 지나지 않아 터지고 말았다.
코앞에 놓인 추석연휴에 휴가를 빼지 못해, 남편은 아이와 단둘이 시댁에 가기로 했다. 집에서 둘이 있는 것보다 시어머니 손이 더해지는 편이 나아 보여 신신당부와 함께 기차역까지 배웅을 했다.
“여보, 시후 옆에서 항상 있어주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응~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일하는 중간중간 건 전화에서 남편은
“시후 잘 있는데? 걱정 안 해도 돼~”라며 밝은 답이 오갔고, 그렇게 무탈하게 연휴가 끝이 나는 듯 보였다.
그날 저녁 아이가 잠든 시간, 남편은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나를 거실로 이끌었고 무거운 표정으로 거실 한편에 주저앉아 울먹이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여보, 우리 시후가 자폐인가 봐.”
“뭐라고?”
“할머니 집에 갔는데, 친척들이 우리 시후가 이상 하대~ 병원 가보라고.”
아이는 26개월, 발화는 몇 개 단어를 내뱉는 정도, 여전히 눈 맞춤과 호명이 선택적인 상황이었다.
남편은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연휴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아이는 낯선 환경과 익숙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울다가 웃는 모습을 반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른들은 남편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건넸었다. 그러나 난, 어린아이를 가운데 두고 이런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나눴을 그들의 모습에 울분이 터졌고. 그 공간에서 외롭게 스스로를 보호하려 울부짖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화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무리 남들이 아이가 이상하다고 해도, 그 순간 너는 아이의 편이 돼줬어야 해. 그게 아빠잖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내가 키울게.”
그날부터였다. 우리 사이의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고, 서로 상반된 방향을 바라보며 등을 맞댔다. 그리고 그 외로운 길의 출발선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따뜻한 빛은 시후의 온기뿐이었다.
사진출처(제목) _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