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진단명, 2021
그래, 진단명 따위에 흔들리지 말자
남편과의 치열했던 그날밤을 보내며 머리는 무거웠으나, 오히려 가슴은 뜨거워졌다. 행여 내 곁에 잠든 어여쁜 아이가 자폐일지라도, 그 타이틀이 내 아이삶을 외롭게 만들진 않게 노라,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한 달 후 휴직계를 다시 제출했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휴직이 이렇게 길어지리라 상상하지 못했었다.
아이의 특별함을 인지하고 가장 서둘렀던 것은 대학병원 진료 예약이었다.
일명 우리나라에서 저명하다는 의사가 있는 병원에 예약 전화를 걸었고, 2년 반이라는 대기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때당시 통화를 했던 직원분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는 답변이 나의 귀를 의심케 하였고 '감사합니다'라는 가식적인 화답으로 전화를 마무리했었다. 그렇게 우린, 매일의 충만함 속에 그날을 기다렸다.
보통과 다른 이른 새벽, 알림을 걸어둔 핸드폰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곁에 잠든 아이가 깰까, 까치발을 들어 조용히 나온 거실은 차가운 공기로 나를 맞이했다. 서재로 들어가 지난 2년 반의 기록과 아이의 일상을 기재한 페이퍼를 훑어본다. 낱장의 끄적임이 시후의 지난 노력을 대변할 순 없다는 것을 익히 알지만, 내가 의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의 가능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새벽이 유독 설레었다.
아이는 지하철을 탄다는 사실에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런 아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가벼워지는듯했다.
“시후야, 오늘 에릭 타고 의사 선생님 만나고 올 거야. 우리 얼마나 멋진지 보고 오자.”
이른 점심을 든든히 먹고 찾은 병원은 예상대로 아픈 아이들로 가득했다. 13시 30분 진료예약이었으나, 1시간 30분 대기 발생한다는 문구가 이미 전광판에 뚜렷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호명됐다.
‘박시후 들어오세요.’
한 손에 아이 손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 차가운 진료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채 3분이 되지 않았다.
앉자마자 2주 전 받은 발달검사와 자폐 척도 검사 결과지를 건네받았다.
의사는 누군가에 쫓기는 듯, 틈도 없이 결과지의 내용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물론 내가 준비해 간 페이퍼는 무용지물이었다.
아무것도 묻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흔들리는 눈빛과 곧추 세운 허리로 나에게 의존해 있는 안쓰러운 아이만 눈에 들어왔다. 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의사는 진단서를 건네며 장애등록하고 사회적 지원받으라는 차가운 끝맺음 인사를 날렸다.
그렇게 내쫓기듯 나간 진료실에서 간호사는 진단서를 동봉하겠다는 냉소적 사려 깊음 뿐이었다.
그제야 혼미해진 정신을 바로잡았고, 동봉되면 다시는 뜯지 못할 그 서류를 눈에 담기 위해 그들의 차가운 행위를 멈춰 세웠다.
시후가 6살이 되던 해, 페이퍼에 또렷이 기재된 아이의 아픔을 확인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뜯지 못한 채 가방 깊숙이 박혀 있다. 마치, 부적처럼.
오진의 가능성이 없음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꽤 두툼한 결과지를 각성이 한껏 올라간 아이를 옆에 두고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아이와 설레며 갔던 길을, 아무 말 없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서류뭉치 끝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묵직한 낱장의 페이지는 오늘 안에 다 넘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 유치원이었다.
“어머니~ 병원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목소리에 오늘 내내 부여잡은 내 감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더 이상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이, 터져 나온 눈물을 수화기 너머로 들키지 않게 함이 최선이었으나,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은 넘쳐흘러 담을 수 없었다.
감사히도 선생님은 내가 충분히 슬픔을 토해 낼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주셨다.
가끔, 가족보다 매일 마주하는 그 누군가에게 더 의지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날 그 순간도 그러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말도 건네지 못했지만 깊은 울음으로 이미 충분히 위로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선생님의 마음이 고이 담긴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어머님, 얼마 전 책을 읽었는데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곁에서 응원해 주면 마침내 꿈을 이룬대요. 시후에게 제가 그런 어른이 될게요.”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늦은 밤, 그녀의 응원에 힘입어 긴 마라톤을 위해 느슨해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여민다.
오늘 데이트 같았구나, 다행이다.
슬픈 마음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다음엔 엄마가 더 단단해질게.
사진출처(제목) _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