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자리에서 수박 반통은 거뜬히 먹는 아이.
미디엄으로 구워진 스테이크를 즐길 줄 아는 아이.
소근육은 느렸지만 젓가락질은 빛의 속도로 습득한 아이.
무소유 신념에 반기를 들만큼 음식 앞에선 적극적인 아이, 바로 사랑둥이 박시후다.
“여름이 됐어요. 수박 시키세요.”
두꺼운 패딩으로 온몸을 감싼 12월이다.
요 녀석, 늘 제철 아닌 과일을 찾는다.
여름에는 딸기, 겨울엔 수박.
며칠 전부터 수박 수박 노래를 한다.
여름 나라에 수박 배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활짝 웃으며 유치원을 뛰어 들어간다.
똑딱똑딱, 시계를 본다. 11시다.
“밥 먹자.”
배꼽시계는 눈치 없이 1시간 빨리 울리기 시작한다 교실 유리창에 매달려 그분께 텔레파시를 보낸다. 밥 선생님이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을 지켜야 하는 사회는 음식을 사랑하는 시후에게 가끔 가혹하다.
그리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분이 계신다. 선생님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지 하원할 때 주머니 속에 달콤한 간식을 살짝 찔러 넣어주신다.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입모양이 사랑스럽다.
학수고대한 12시다.
걸리버 시후에게 작은 식판이다.
그래서 3번 리필한다.
시금치 된장국이 나온 날에는 밥 선생님이 알아서 시금치를 듬뿍 넣어주신다.
“시후 꺼죠?”
배식을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름, 박시후다.
고기반찬이 나오는 날은 야채를 열심히 골라 먹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아삭아삭 김치는 최애 음식이다.
아이의 또 다른 부캐, ‘선택적 비건’
육류보다 채소 과일을 선호하는 모습에 유치원에 계신 어른들의 흐뭇한 미소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모두가 예상하겠지만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식습관이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나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고기를 즐기지 않는 건 아니다.
최후에 먹는다. 야채를 충분히 즐긴 후에.
그날, 후식으로 방울토마토가 나왔다.
역시나 손을 번쩍 든다.
“엄마, 아니 아니 선생님, 토마토 더 주세요.”
“몇 개 더 줄까?”
“17개요!”
그날, 시후 덕에 하하호호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오늘도 집에 돌아와 편지를 쓴다.
밥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단다.
왼손이 중심이 되어 커다란 수박을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수박물 하나 안 흘리며 얼마나 야무지게 먹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군침이 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편지를 적어나간다.
지금 이 순간 오른손은 거들뿐.
그래도 술술 적어나간다.
점심을 한식으로 맛있게 먹은 아이는 다른 메뉴가 먹고 싶은지 스파게티를 요청한다.
“동물 모양 스파게티 해줄까? 그냥 스파게티 해줄까?”
1초의 망설임도 없다.
“아니, 만들지 말고 시키세요!”
유치원에선 엄마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엄마 밥이 맛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집에 오면
냉정한 미식가로 변해, 차마 못 먹겠단다.
나는 오늘도 배민을 뒤적뒤적 살펴본다.
“엇, 시후야. 오토바이 아저씨가 집 앞에 왔어. 준비하자.”
아이만의 유니크한 고유명사가 있다.
밥 선생님(배식 선생님), 여름나라(여름), 오토바이 아저씨(배달원) 등.
날것에 가까운 이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이내 이 어휘력에 감탄한다.
너만이 품을 수 있는 감성이 소중하다.
난 지금의 네가 참 좋다. 천천히 크자.
사진출처 _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