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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민 Oct 20. 2023

검정봉지 속 감귤 한 소쿠리

무거움과 가벼움의 공존



퇴근길 바구니에 담긴 감귤의 은은한 향에 어릴 적 ‘아빠의 퇴근시간의 설렘’이 떠올랐다.    

 


저녁 하늘에 붉은빛을 발하던 시간, 진하고 구수한 냄새를 뽐내는 된장찌개의 소곤거림과 찰랑이며 방정맞게 울리는 압력밥솥의 요란함에도 아빠의 퇴근은 보장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여쭤본 물음에, 오늘도 거하게 한잔을 하기 위해 가족과의 소중한 금요일 저녁을 포기하신 아빠의 빈자리는 붉은빛 석양만큼 서운했다. 그럼에도,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맛보는 엄마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동생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재미없는 9시 뉴스를 보던 그때, 성급한 현관문 소리가 우리 귀를 두드렸고,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올린 아빠 두툼한 손에 매달린 검정 봉투 우리에게 건네고, 아빠는 비틀비틀 소파에 몸을 누우셨다.   

  

우린, 검정봉 안 그 녀석이 궁금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회사동료에게 들으셨다며 아이들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며 조안나 아이스크림을 사 오셨다. 그날 이후였을까, 묵직한 무게감에 기대했었다.



바스락 거리는 검은 봉투의 리듬은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그 사이를 빼꼼히 고개 내민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 녀석은 다름 아닌, 감귤이었다.


작은 탄성과 함께 흘러나온 실망스러움에도 서둘러 검은 봉투를 감싸 쥐고 두툼한 이불이 깔린 아랫목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 알씩 떼어먹어도 맛있고, 뺏길까 아쉬워 통째로 먹은 때에는 목젖을 꽉 붙잡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순간이 즐거웠다.






어느덧 20년 이상의 시간이 훌쩍 지나, 아빠와 같은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잔잔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럼에도 도시의 밤은 이제부터 재생되듯 유독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을 등지고 은은한 빛을 발화하는 노란 전등 아래, 열을 맞춘 바구니들이 몇 안 되는 과일을 담아 자판 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전등 아래, 가장 밝은 빛을 내는 감귤 한 소쿠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 싱싱하지 못한 녀석이 몇몇 개 섞여 있음을 앎에도 결국 그 자판 앞에 서고 만다.


“사장님, 귤 한 바구니 주세요.”


그러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손 끝에 매달린 검정봉지는 유독 무거웠고 이상하게 마음 가벼웠다.            



마음이 먹먹했던 퇴근길, 자판 위 감귤 한 바구니를 보는 순간 마음의 온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사장님에게 건네받은 검정봉의 무게감에 어릴 적 아빠가 떠올랐다.     


무거운 퇴근길, 속상해서 마신 술 한잔에 오른 취기를 설렘으로 바꾼 그날의 검정봉지는 아빠에게 희망이고 사랑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주황빛 감귤이 검정봉지 안에 소복이 쌓여있다. 묵직함이 손가락 마디에 전달되는 순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현재시간 21시 03분.

잠자리에 들었을 아이들을 깨우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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